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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성지 오대산을 가다]③ 대라정(大螺頂)

기자명 법보신문

동자승 지혜로 만든 오대 문수보살 봉안지

<사진설명>오대산 대라정 전경. 사진 중간으로 1080계단이 선명히 보인다.

열기로 달아올라야 할 7월 한 낮이건만 오대산은 선선하기만 하다. 마치 우리의 초가을을 옮겨다 놓은 듯 시원스런 살바람에 콧등에 맺힌 땀방울은 이내 자취를 감춰버렸다. 여름의 열기를 한 순간에 식히는 청량한 바람. 예로부터 오대산이 청량산(淸凉山)으로 불렸다는 옛 선인들의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님을 오대산에 발을 들이는 순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청량사를 나올 무렵, 해는 중천을 넘어섰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설로 신이함이 가득한 청량사에서의 감동을 뒤로 하고 다음 순례지인 대라정(大螺頂)으로 향했다.

대라정은 오대산 중심부인 대회진(臺懷鎭)에 위치한 사찰로 동대, 서대, 중대, 남대, 북대의 다섯 문수보살을 모두 모아 놓은 곳으로 유명하다. 예로부터 대라정을 참배하면 오대의 문수보살을 모두 참배한 것으로 인정하는 풍습도 이래서 생긴 것이다.

대라정이 오대산의 참배지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 청나라 6대 황제에 등극한 젊은 건륭(재위 1735~95)이 이곳을 참배하면서부터다. 깊은 신심을 간직하고 있었던 건륭은 황제 등극과 함께 문수성지 오대산을 찾았다. 북경 자금성에서 오대산까지는 620여km의 거리. 족히 한두 달은 넘게 걸리는 긴 여정이다. 젊은 황제는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대산을 향해 길을 떠났고, 결국 오대산 입구에 도착했다.

그러나 정작 오대산은 건륭 황제의 참배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동대를 오르기 위해 발길을 옮기자 비바람이 몰아쳤고, 다시 중대를 오르려 하면 폭설을 퍼부어 황제의 발길이 꽁꽁 묶여 버린 것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패기 넘친 황제였지만 자연의 힘 앞에는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기를 수차례. 더 이상 순례를 강행할 수 없었던 황제는 아쉽게도 자금성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수성지를 꼭 참배하겠다는 황제의 서원이 결코 식은 것은 아니었다. 이듬해 황제는 신하들을 이끌고 험난한 여정을 거쳐 다시 오대산과 마주했다. 반드시 오대를 참배하겠다는 마음에 황제는 한달음에 산을 올랐고 오대산의 중간 지점인 이 곳 대라정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멀쩡하던 날씨는 대라정을 뜨기가 무섭게 흐려지더니 폭풍우가 휘몰아쳤다. 설사가상으로 살을 에는 추위가 엄습했고 중대의 중턱에서 쏟아지는 눈 속에 그만 고립되고 말았다. 이제는 참배가 문제가 아니고,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갖은 노력 끝에 다시 대라정으로 돌아온 황제는 부랴부랴 오대산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황제가 떠난 자리에는 대라정 주지 스님의 깊은 번뇌와 고민이 오대산만큼이나 높은 크기로 남겨져 있었다. 황제는 그곳 주지 스님에게 “3년 뒤에 다시 돌아올 테니 꼭 오대의 문수보살을 모두 참배할 수 있게 해 달라”며 간곡한 부탁을 하고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제의 부탁은 부탁이 아닌 명령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주지 스님의 목숨이 걸린. 황제의 부탁을 받은 주지 스님은 깊은 번민에 빠졌다. 황제의 명을 어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날씨를 바꿀 수도 없고. 이를 화두삼아 몇날 며칠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스님은 급기야 시름시름 병까지 앓게 됐다. 그러나 스님의 화두는 이제 갓 출가한 동자승의 한마디에 말끔하게 날아가 버렸다. 동자승의 해법은 오대의 문수보살을 모두 대라정으로 옮겨오는 것.

주지 스님은 곧 동자승의 말에 따라 동, 서, 남, 북, 중대에 있는 다섯 분의 문수보살을 동일한 크기로 만들어 이곳 대라정에 봉안했다. 이후 건륭 황제는 매년 대라정에 올라 문수보살을 참배했고, 후대 사람들은 이를 두고 ‘작은 참배’라 불렀다고 한다.

설화 같은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일행의 눈앞에 대회진이 가득 들어왔다. 대회진은 대형 사리탑이 봉안돼 있는 탑원사를 비롯해 현통사, 광종사, 만불사, 대라정 등 크고 작은 사찰 10여 개가 모여 있는 오대 불교의 중심지. 더욱이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수만 리 길을 마다 않고 오대산을 찾은 수행자들이 오대에 오르기 전 목을 축이며 숨을 고르던 곳이다. 말하자면 원활한 성지 순례를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라고나 할까.

빡빡한 순례 일정에 숨조차 고르기 힘들었던 일행은 대라정을 오르기 전 에너지 충전을 위해 인근 음식점에 들렀다.

이곳은 강수량이 적고 물이 귀해 밥보다 밭농사로 얻은 채소를 주식으로 하는 곳이다. 짧은 기간이지만 기름기 넘치는 중국음식에 속이 메스꺼웠던 일행에게는 더없이 좋은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신선한 채소라도 먹으면 느끼해진 속을 달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에서였다. 그러나 이런 희망도 잠시. 식탁 위에 올려진 음식에 땅이 꺼지는 듯한 한숨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삶은 토마토에 기름 자글거리는 오이며 가지. 신선한 채소는 그야말로 그림속의 떡이었던 것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오대산 지역은 워낙에 물이 귀하고 오염이 심해 날 것을 그대로 먹으면 탈이 날 수 있다고 한다. 때문에 이 곳 사람들은 부득이 모든 음식을 삶거나 익혀 먹는 것이다.

허기를 달랠 양으로 음식 몇 점을 마지못해 집어먹고 대라정으로 향했다. 대라정은 오대산 중심부의 비교적 낮은 봉우리에 위치해 있다.

<사진설명>대라정을 오르기 위해 만든 리프트.

그러나 보기와는 달리 경사가 심해 오르는 길이 쉽지만은 않다. 이렇다보니 오대산 절경에 맞지 않게 스키장에서나 봤음직한 리프트가 산의 입구에서 대라정까지 늘어져 있는 기이한 풍경이 연출된다. 인간은 대자연의 부드러운 살갗을 생채기 내는 중금속과 다를 바 없는 또 하나의 오염원이라는 생각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결국 우리는 빠듯한 여정을 핑계로 리프트에 몸을 맞길 수밖에 없었다. 물론 불교 성지를 참배하는 불자의 한사람으로써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이 불경스런 일임을 잘 알고 있기에 마음속으로 죄송스런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안전장치가 허술해 보이는 리프트는 작은 바람에도 쉽게 요동쳤다. 그러나 잠시 뒤 리프트가 산 중턱을 향하자 시원하게 드러난 대회진의 전경과 살갑게 불어오는 바람에 잠시 심란했던 마음이 어느새 한가지로 모아진다.

탑원사 사리탑을 중심으로 목조 양식의 고졸한 사찰들이 옹기종기 모여 뿜어내는 고풍스런 아름다움에 막혀있던 가슴이 시원스럽게 뚫린다. 아마도 고래로 수많은 순례객들이 대라정에 오른 것도 이런 상쾌함 때문이리라.

<사진설명>오대 문수보살을 봉안한 대라정 문수전.

일주문을 지나 경내에 들어서자 나이 지긋한 백송이 장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는 백송은 마치 문수성지를 지키는 수호신인양 근엄해 보이기까지 한다.

백송을 지나 고개를 들자 오대의 문수보살을 봉안한 문수전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중대 유동 문수보살을 기준으로 좌로 북대 무구 문수보살, 서대 사자후 문수보살이 우로 남대 지혜문수보살, 동대 촉명 문수보살. 다섯 문수보살이 서로 다른 모양으로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순례객을 반기고 있다.

다섯 분의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있으려니, 중생들에게 지혜를 주기 위해 그 때 그 때 마다 다른 모습으로 화현했을 문수보살의 대자대비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참배를 마치고 대라정 전망대로 향했다. 전망대 왼쪽으로 산비탈을 따라 꼬리를 물고 길게 내려앉은 계단이 눈에 가득 들어온다. 108번뇌에 10을 곱한 1080개의 계단. 한발 한발 가파른 계단을 위태롭게 오르는 순례객들이 흘리는 굵은 땀방울이 눈에 보이는 듯 아련하게 다가온다. 리프트라는 현대 문명을 거부하고 오직 자신의 두발만을 의지한 채 성지를 찾는 이들의 넘칠 듯 아름다운 신심(信心). 2천여 년을 이어져 온 중국불교의 전통이 다시 살아나는 듯 가슴 한 구석이 뭉클하다.

글·사진=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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