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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성지 오대산을 가다]④ 탑원사(塔院寺)·현통사(顯通寺)

기자명 법보신문

지난한 역경 견뎌온 중국 불교의 모태

<사진설명>대라정 저앙에서 바라본 대회진 전경. 높이 50m가 넘는 대탑을 중심으로 탑원사와 현통사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서둘러 다음 목적지인 탑원사와 현통사로 향했다. 대라정에서의 감동이 진득이도 발길을 붙들었지만 빠듯한 일정에 떨어지지 않는 발을 재촉해 길을 나섰다. 내려오며 바라보는 오대산의 절경은 짧은 일별(一瞥)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뒤흔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대라정에서 버스로 불과 5분 거리에 위치한 탑원사와 현통사는 오대산 불교의 얼굴 격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절의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사격도 오대산에 점점이 박힌 사찰 가운데 가장 크고 유물 또한 풍부하기 때문이다. 또 지금은 두개의 사찰로 나눠져 탑원사와 현통사로 불리고 있지만 명나라 이전만 해도 대현통사로 불리며 대가람을 이뤘던 곳이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두 절을 모두 한꺼번에 현통사라 지칭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현통사가 오대산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호불 황제였던 북위 효 문제(471~499)때이다. 당시 역대 어느 왕조보다 신심이 깊었던 효 문제는 불교를 국가적으로 장려했고, 곳곳에 대가람을 세워 황실의 안녕과 국가의 무운(武運)을 기원했는데 현통사는 이런 황제의 깊은 신심이 오대산 중턱을 깎아 가람을 세우는 기적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통사의 운명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아니 중국왕조의 흥망성쇠에 따라 기구하게 변천해 온 것이 마치 사람의 지난(至難)한 인생을 보는 듯 파란만장하기만 하다. 어쩌면 효 문제가 8만평이 넘는 산을 깎아 대가람을 세운 뒤 어떤 이름을 지을 것인가를 두고 고민했던 것도 이 절의 운명을 예견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오대산에 유래가 없는 대규모 가람을 들인 이후 황제는 절의 이름을 놓고 크게 고민을 했다고 민초들의 입과 입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황실의 원찰이니 절의 이름도 황제가 짓는 것이 마땅한 터. 따라서 황제는 사찰의 이름을 놓고 며칠 밤낮을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깜박 잠에 빠진 황제의 꿈에 수많은 야생화와 그 속에 한 송이 연꽃이 수줍은 듯 고개를 들고 있는 장면이 등장했다. 꿈에서 깨어난 효 문제는 손으로 무릎을 치며 신화들을 불러 절의 이름을 화원사(花園寺)라 지으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번 핀 꽃도 언젠가는 시들어 떨어진다는 말이 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꽃처럼 화려하게 오대산에 등장한 화원사는 북위의 멸망과 함께 전쟁 속에서 폐허로 변해 버렸고, 얼마 뒤 화려한 역사를 뒤로 한 채 짧은 삶을 마감해야만 했다.
그 후로 수백 년이 흘렀다. 중국은 5호 16국의 혼란에 거쳤고, 다시 무수한 전쟁의 아수라를 겪으며 결국 수나라와 당나라로 통합이 이뤄졌다. 새롭게 나라를 정비한 당 태종은 불교에 귀의하며 중국 전역에 산재한 사찰을 정비했는데 이때 폐허가 된 화원사도 대대적인 중수를 거쳐 대화엄사(大華嚴寺)라는 이름으로 다시 반짝 역사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절은 다시 전쟁으로 폐허가 됐고, 또 다시 버려지는 신산의 아픔을 겪게 된다.

현통사가 오늘날의 모습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600년 전인 명나라 태조 때이다. 폐허로 변했던 가람은 다시 대대적인 중수를 거쳐 대현통사(大顯通寺)로 개칭됐는데, 이름처럼 크게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현통사가 탑원사와 두개의 가람으로 갈리게 된 것도 이즈음이다. 당시 명나라에 불교가 융성하자 서역에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보내 명나라의 안녕을 기원했는데 이에 크게 기뻐한 명나라 황제는 현통사에 높이 50m가 넘는 그야말로 대형 불사리 탑을 조성하게 된다. 그러나 불사를 마치고 나서 황제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부처님 진신사리와 본존불을 함께 모실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깊은 고민으로 번민의 날을 보내자 현통사의 한 스님이 보다 못해 한 가지 해법을 제시하게 되는데, 현통사를 둘로 나누는 것이었다. 결국 황제는 스님의 뜻을 받아들여 불사리 탑을 기준으로 아래쪽은 탑원사로, 위쪽은 현통사로 구분을 하게 됐는데 이렇게 해서 하나의 가람이 두개의 사찰로 변하게 된 것이다.

<사진설명>현통사 문수전. 그 뒤로 금박을 입힌 동전과 장경각이 차례로 보인다.

현통사에 얽힌 사연들을 들으며 걷고 있는 사이 일행은 어느새 탑원사 입구 대탑 앞에 서 있었다. 쪽빛 하늘 한 가운데를 찌르고 서 있는 백색의 대탑으로 인해, 하늘이 파란 눈물을 흘리고 있는 듯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오랜 세월 험난한 풍파와 싸워온 탓에 지금은 병원신세(?)를 져야할 만큼 훼손이 진행돼 안타깝지만 거대한 몸체와 아름다운 조각들은 오대산을 지키는 수호 신장인양 당당하기만 하다. 몇 해 전부터 중국은 정부 차원에서 탑원사의 보수 작업과 함께 백색의 탑에 황금을 입혀 개금하는 불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종교적인 신심보다는 좋은 관광자원으로만 생각하는 중국 관리들의 수준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온전한 대탑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안고 휘적휘적 경내로 들어섰다. 이내 눈 안 가득 밀교 양식의 건축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오대산에 남아 있는 10여개의 밀교사찰 중 하나라더니, 그 명성 그대로 대형 윤장대, 120여개의 만리차, 라마교 양식의 불상들이 고풍스런 모습으로 일행을 맞이하고 있다. 특히 이 곳은 티베트 불교 형성에 막대한 영향력을 줬던 쫑카파 스님이 1410년경 설법을 했던 것을 인연으로 지금도 수많은 티베트 수행자들이 찾는 밀교의 성지라고 한다.

<사진설명>탑원사 윤장대를 돌리고 있는 수행자.

대탑 내부를 돌고 나오자 경내는 많은 순례객들로 붐비고 있다. 물론 관람을 목적으로 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지만 깊은 신심으로 절을 맑히는 이들도 적지 않게 눈에 띤다. 전각 한 구석에서 온몸을 던지는 오체투지로 업장을 소멸하는 이들이 얼핏 보인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쉼 없는 고행으로 굵은 땀방울은 얼굴과 목을 타고 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다. 순간 관광의 기분으로 들떠 있던 마음이 고요히 내려앉으며, 가람이 온통 성스러운 공간으로 되살아난다. 경건한 마음으로 대탑 옆 작은 문을 넘어서자 미로처럼 구불거리는 길을 따라 현통사 입구로 이어진다. 현통사는 대웅전, 무량전, 관음전, 문수전, 천불전, 동전, 장경각 등이 일직선상에 배치돼 정갈한 맛이 일품이었다. 특히 전각 하나 하나가 마치 각기 다른 시대 작품인양 느낌이 달랐다. 경내를 유유자적 걷던 일행이 유독 한 건축물 앞에서 일제히 걸음을 멈췄다. 마치 우리의 미륵사지 석탑과 닮은꼴의 대형 건물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명나라 때에 건축된 무량전이다. 무량전은 명나라 때 벽돌을 쌓아 만든 전탑양식의 보기 드문 건축물이라 한다. 순간 마음은 익산을 향하고 있다. 화원사가 폐허를 딛고 탑원사와 현통사로 거듭나듯, 폐허로 변해 황량하기 그지없는 미륵사 또한 어느 날 불현듯 옛 영화를 재현할 수 있으리라.

글·사진=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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