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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준호 박사 김성철 교수에 반론

기자명 법보신문
  • 기고
  • 입력 2004.08.10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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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속적인 정서에 영합해 불교본질 흐려선 안돼”

동국대 강사 조준호 박사가 본지 651호 16면에 게재된 김성철 동국대 교수의 “대승 사상-신앙 초기불교에서 나온 것”이란 주장에 대한 반론의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



먼저 가장 최근의 김성철 교수의 주장을 중심으로 그 동안의 논의에 대해 이의를 제기해 본다. 김 교수는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의 논리적 귀결이다”라고 한다. 이 점에 있어 분명 대소승 논쟁은 시대착오적일 수 있다. 그렇지만 시대착오적이지 않을 이유 또한 있다. 그것은 이 같은 김 교수 주장이 반복될 때이다. 물론 역사적으로 그리고 교리적으로 초기불교 배경 없는 대승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이 말이 언뜻 보기에는 우리에게 당연한 주장처럼 보이지만 약 2000년에 걸친 복잡한 쟁점을 함의하고 있다. 그것은 대승 이전의 불교는 부처님의 진의(眞意)가 모두 드러나 있지 않은 서론적인 또는 예비적인 가르침으로서 결론적인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현재까지도 법상(法床)이나 대학의 강단에서조차 초기불교는 불완전하고 미완성의 가르침에 지나지 않는 의미의 소승이란 범주에 넣어 설명된다. 하지만 이는 순전히 종파적인 용어와 이해에 지나지 않는다.



초기불교 귀결이 곧 대승 아니다

초기불교와 부파 측에서는 받아들일 리 만무한 주장이다. 초기불교 전통의 부파는 현재에도 엄존하며 서로 간에 종파성을 넘는 평등한 입장에서 회통하고 불교라는 이름으로 단결을 호소해야 할 시점에서 분명 재고되어야 할 사안이다. 열린 세계화의 시대에 진정한 교류를 막는 장벽이다. 좋은 관계는 쌍방간의 노력이다. 따라서 초기불교는 초기불교로서 대승불교는 대승불교로서 각각 ‘불교의 귀결’이라 보아야한다. 이제는 우리부터 대소승의 문제에 있어 종파적·전통적 입장의 차별적인 선입견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이 요청된다.

다음으로 “초기불교 도처에서 기복과 작복의 가르침을 만날 수 있다”는 김 교수의 주장은 기복과 작복의 개념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나아가 이같은 짧은 글은 물론 이제까지 그의 다른 글을 통해서도 두 개의 용어를 같은 뜻으로 혼용해 쓰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만약 기복과 작복이 같은 개념이라면 이제까지 불교계에서 기복이 굳이 문제되어 논란될 이유가 없다. 분명 이전의 논문에서 필자가 밝히고 있고 다시 김 교수도 언급하고 있듯이 초기경전에서는 적극적인 이타행(보시)과 개인·사회윤리의 실천(지계)에 따라 복이 이야기되는 것까지는 일치한다. 하지만 차이는 ‘복의 주관자가 따로 상정되어 있지도 않을뿐더러 그에 대한 빎’이 개입되어 있지 않는다고 하는 필자의 초기 불교 이해이다. 결론적으로 김 교수 등은 기복·작복이라는 용어의 혼용으로서 양자간의 내용상이나 방법상의 차이를 애써 감싸 안으려하는 느낌을 받는다. 만약 불교가 “종교 기능주의 입장에 따라 신앙의 존중만을 앞세워” 유신론적 신앙체계를 용인하게 되면 불교만의 종교적 또는 사회적 역할로서 유신론적 세계관의 비판 여지는 갈수록 축소된다. 나아가 불교의 정체성에 따른 존재 이유마저 희미해져간다.



기복을 대승이라 호도 말아야

한국불교의 역사적 맥락과 구조상 왜 기복에만 치중할 수밖에 없는가? 기복에만 몰두하여 ‘사회적 대의(大義)’를 세우지 못하고, 그래서 안으로 계속해서 ‘세속적인 수준의 분규’만을 일삼을 수밖에 없었던 비극의 악순환. 때문에 사회적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한 과보로서 사회 일각의 냉소적인 태도, 그리고 정치계 등으로부터 갖은 수모를 한탄해야만 하는 처지. 이렇게 기복, 사회적 역할의 결여, 종단 분규 그리고 사회 일각의 냉소적인 태도와 정치계 등으로부터 무관심 등은 서로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총체적이고 근본적인 반성이 있어야 한다.

필자는 “기복을 죄악시하지 않는다”. 다만 기복에서 작복으로 지향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작복은 백 번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작복이야말로 대사회적으로 불교의 위치를 당당히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기복에 머물러 기복을 조장하여 사찰의 규모나 종파적 차원의 신도 수 늘리기 경쟁으로는 불교 미래는 없을뿐더러 다른 종교와 차별적인 불교 흥기의 존재 이유 또한 설명할 수 없다. 일대사인연이라는 불교 진리적 차원보다는 세상의 일반적인 성향에 부응해주거나 대중의 통속적인 정서에 영합하여 불교의 본질을 흐리게 하거나 포기할 수는 없다. 주변적이거나 방편적 외피 때문에 결코 불교의 본질이 호도되거나 본말이 전도되어서는 안 된다. 즉 기복은 일반 사람들(이나 다른 종교)의 목표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불교의 목표나 본질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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