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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에서 수행자로 한중연 정년퇴임 김 형 효 교수

기자명 법보신문

내 철학의 오디세이 종착역은 마음


철학은 대상의 학문 아닌
사유의 학문.
서양철학 공부했지만
내가 품은 의문
해결해 주지 못할 때
과감히 떠나.
불교 통해
세상을 아름답게 보고
나의 마음을
아름답게 만들 터.


나지막한 목탁소리와 함께 노교수의 방에서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천수경 독경소리가 분당 운중동(雲中洞)의 미물들을 일깨운다. ‘운중사 조실 스님’의 사시 예불 시간. 수년전부터 한국학중앙연구원 북재의 아침은 김형효 교수의 고요한 목탁소리와 함께 시작돼 왔다. 몇년전 벽에 청화 스님과 숭산 스님의 사진을 붙이고 미륵반가사유상을 달더니, 요즘은 아예 매일 10시면 직접 목탁을 치며 염불을 하고, 발표하는 글이나 강의 내용도 거의 법문 수준이다.

염불선 수행 3년

3년전부터 김형효 교수는 염불선 수행을 해왔다.
수많은 불교서적을 탐독하면서도 직접 수행하리라는 생각은 없었는데, 3년전 어느날 청화 스님의 설법집을 우연히 읽으면서 ‘변화’가 찾아온 것이다. 그 순간 마음에 환희심이 가득해졌고 막 눈물이 터져나왔다. 김 교수는 그 순간을 회고하며 “아무래도 내 업장이 녹느라 그 눈물이 났던 것 같다”고 환하게 미소를 짓는다.
당시 “이번 겨울방학 때 꼭 한번 찾아뵈리라” 생각했지만, 그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청화 스님이 입적해 ‘친견’의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인연의 끈이 닿지 못했음을 안타까워 하며 그때부터 청화 스님의 모든 저서를 읽었고, 직접 염불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김 교수의 아침은 가볍게 목탁을 치며 천수경과 금강경을 독송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밤 10시쯤 산보를 나서 염주를 돌리면서 원각경 게송들을 나지막히 읊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한다. 또 3년전부터 금강선원에 나가 혜거 스님의 법문을 들었고, 스님으로부터 여천(如天)이라는 법명도 받았다.

동서양 비교철학자, 후기 구조주의의 대가, 하이데거 전공자. 서구의 토미즘과 동양의 주자, 율곡과 다산을 거쳐 최근에는 노자와 원효, 붓다까지. 김형효 교수가 걸어온 철인의 행보를 단 한마디로 표현하기란 어렵다. 그래서 이름 붙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궁색하게나마 찾아낸 표현이 ‘철학적 오디세이’라는 문학 수식어이다.

“철학의 특징은 과학과 달라 특정 영역이나 대상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철학은 대상의 학문이 아니라 사유의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서양 철학의 여러 영역을 공부했지만 그것이 내가 품은 의문을 해결해주지 못할 때 미련없이 그 철학을 떠났습니다. 왜냐면 나는 철학적 지식을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과 인생에서 만나는 철학적 의문을 탐구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영역에서 모든 문제의 해결점을 발견하려는 한국학계의 독특한 연구풍토(!)와 달리 그에게 있어 자신의 전공은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지난 8월 31일 그의 30여년간의 교수 생활을 마감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정년퇴임을 맞은 김형효 교수가 내린 결론은 인류가 행복해질 수 있는 마음의 길닦기의 본질이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반야심경의 한 구절에 담겨있다는, 얼핏 보기엔 매우 단순한 이야기였다.

“색즉시공에서 공의 의미는 죽음처럼 아득하고 허무한 그런 개념의 텅 빔입니다. 하지만 그 공이 다시 세상의 온갖 아름다움으로 다시 발현합니다. 색즉시공의 의미는 소유되지 않는 것을 소유하려고 하는 어리석음을 일깨워주는 데 있습니다. 색즉시공은 소유론을 대부정하면서 우리가 소유하려는 현상들이 결국 환상임을 알게 해줍니다. 그럼에도 공즉시색이라는 존재론의 대긍정을 위하여 길을 열어 놓습니다.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찬탄하는 가장 아름다운 감탄사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실존-구조주의 거쳐 佛學 귀착

그가 마주한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철학은 30∼40년간 진리를 찾아 헤맨 끝에 발견한 절대 긍정의 경지가 아닐까.

김형효 교수는 벨기에 루벵대에서 초기 실존주의와 현상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에 하이데거와 데리다의 철학을 소개한 대표적인 서양철학자다. 하지만 그에게 실존주의는 인간의 우연적 필연성을 설명해주지 못했다. 다시 소쉬르에서 라깡, 융, 푸코 등 언어학과 정신분석학을 토대로 구조주의를 탐구하기 시작했지만 구조주의는 인간을 지나치게 정태적으로 규정하고 결정론적으로 본다는 한계에 부딪혔다. 마치 X레이 사진을 찍으면 인간의 살과 표정이 사라진 채 뼈만 드러나는 것처럼.

한국으로 돌아온 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로 재직하면서 그는 공자에서 다산까지 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인의 학문이 나온 이후에도 왜 세상은 하나도 나아진 적이 없을까, 유학에서 말하는 도덕과 정치의 일치는 현실감이 없구나 하는 판단이 드는 순간 김형효 교수는 또다시 짐을 꾸렸다.

40대 후반에 다시 접한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 데리다를 통해 그는 원효와 노자의 철학, 붓다의 사유가 하나의 궤로 이어지고 있음을 발견했다. 데리다의 해체주의 철학을 통해 발견한 진리는 인간의 사유와 탐구에 의해서 형성되고 재구성되는 지식 체계의 극지점이 아니라, 본래 그대로 놓여있는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의 체계였고, 화광동진(和光同塵:빛을 부드럽게 하여 속세의 티끌에 같이한다)의 세계였으며, 화쟁의 다른 이름이었다. 이는 또한 하이데거가 “그것이 말한다”고 말한 그것이기도 했다.

김형효 교수는 이 진리가 이미 수천년전 노자와 붓다에 의해 설해진 바임을 깨닫고 도덕경과 불교경전을 재해석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우리의 이성에 의해 만들어지는 진리가 아니라 이미 세상에 있는 것이며, 오히려 이성과 의식을 버리면 보이는 세계였다.

이제 정년을 맞은 김 교수는 미래의 사유는 철학적 지식이 아니라 ‘수행’이라고 간결하게 답한다.

김 교수가 이순(耳順)의 고개를 넘어 비로소 반야의 지혜를 몸소 얻기로 마음먹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불교는 내가 공부한 것 중에서 가장 수승한 종교이자 가장 높은 철학적 사유”라고 이야기하는 김형효 교수의 목소리에는 환희심과 아쉬움이 교차하고 있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김형효 교수가 불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수행을 한다는 사실은 그러나 전혀 모순이 아니다. 김 교수에게 있어 최고의 스승은 바로 부처님과 예수님이며, 부처님이 본각(本覺)이라면 예수님은 시각(始覺)이기 때문이다. 경험적으로 진리에 들어가는 과정을 예수님을 통해 느끼기 시작했다면, 부처님은 무언의 깨달음을 느끼게 한 존재이다.

미래의 사유는 철학 아닌 수행

인생 육십갑자를 돌고 돌아 만난 바다는 바로 자신의 마음이었다고 말하는 김 교수는 이제 철학자로서의 사명을 ‘사회적 보살도’로 표현한다. 세상을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김 교수가 말하는 사회적 보살도의 회향법이다.

“우리나라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가장 행복한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난하지 않지만 돈에 게걸스럽지 않고, 정신적으로 우아하고 단아하면서 삶을 즐기며 살아가는 나라. 남과 내가 다르더라도 서로를 존중해주는 나라. 이것이 진정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소유의 욕망을 버리고 본성의 실존을 찾아가야 합니다. 불교를 통해 세상을 아름답게 보고 나의 마음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것, 이것이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는 이유입니다.”

김형효 교수에게 있어 불교는 어쩌면 마음이라는 큰 바다로 나아가는 뗏목일지도 모른다. 그는 오늘도 사유한다. 그 사유는 모든 이들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아름답게 바라보는 저 언덕으로 향하는 ‘길없는 길’일 것이다.

탁효정 기자 takhj@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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