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가현각 『증도가』 ③
영가현각 『증도가』 ③
  • 법보신문
  • 승인 2005.09.0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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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넉한 마음 청정하고 품격은 본래 높네
<사진설명>안중식의 대환희도

“사대를 놓아버려 붙잡지 말라, 적멸의 성품에서 먹고 마실 뿐이다. 현상은 무상하여 모든 것은 공한 것, 이대로가 여래의 대원각이다.”

유유자적한 수행자의 모습을 노래한다. 육신을 지탱하는 것은 사대 때문인데, 도인은 사대를 놓아버리고 적멸의 성품에서 삶을 살아간다. 그는 나, 나의 것에 걸림이 없다. 현상의 본질은 무아이며 적정하여 이를 ‘여래의 대원각’이라고 하였다. 원각의 적멸한 무심은 선의 본질이다. 어느 시인은 ‘내 앞에는 길이 없는데 내 뒤에 길이 생겼구나’라고 하였다. 자유인의 삶의 자취다.

“결정의 말씀, 참된 수행자임을 나타내는 것. 알아듣지 못한 자가 있거든 납득이 될 때까지 물어라.”

‘결정의 말씀’은 『열반경』에서는 사자후라고 하였다.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음과 여래는 언제나 상주한다’는 설이다. 『유교경』에서는 ‘달이 뜨거워진다고 해도, 해가 차가워진다고 해도 여래가 설한 사제법문은 틀림없는 결정의 설’이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진실한 수행자는 결정의 무상과 공의 원각을 나타내 보인다는 것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가 있다면 수긍될 때까지 질문하라는 것이다.

“바로 근원을 자르는 것[直截]은 부처님이 증명하시는 바라, 잎을 따고 가지를 찾는다는 것은 내 할 일이 아니다.” 결정의 설이 ‘직절근원’이다. 이는 여래가 증명하는 것. 진승(眞僧)인 현각은 결정의 설대로 수행할 뿐이지 경전의 지말에 두리번거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직절은 바로 직지(直旨)이며 직하(直下)다. 어떤 이가 향적에게 ‘어떤 것이 바로 근원을 자르는 일이고 부처님이 증명하는 바라는 것이오?’라고 물었을 때, 손에 들고 있었던 주장자를 내 던지고 나가 버렸다. 수행자의 ‘직절근원’을 보인 것이 아닐까?

“마니주,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여래장속에 친밀히 거두어져 있다.” 불성을 마니의 보주라고 한다. 이는 여래장속에 있는데 중생이 이를 알지 못할 뿐이라는 것. 여래장은 원어로 자궁, 또는 태아이며 ‘여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그러나 선가의 이해는 이와 다르다. 『조당집』 「남전장」에, ‘어느 수좌가 물었다. 마니주가 여래장 속에 친밀히 거두어져 있다고 했는데, 마니주는 대체 어떤 것이오?’ 남전은 ‘내가 자네와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것이 ‘장’이다. 그 수좌는 또 묻는다. ‘가지도 오지도 않을 때는 어떻습니까?’, 남전은 ‘그것도 장이다.’라고. 또 묻기를, ‘어떠한 것이 구슬입니까?’ 남전은 그 수좌의 이름을 부른다. 수좌는 ‘예’라고 응답. 남전은 ‘가라! 그대는 내가 말하는 것을 알지 못해.’

선사에게서의 여래장속의 마니주는 ‘지금, 여기, 자신의 작용’이다. 결코 부처가 될 미래의 가능성 등은 말하지 않는다. 또한 이 보주를 “여섯 가지 신통묘용으로 공하면서 공하지 않고, 한 알의 둥근 빛이지만 색이 있으면서 색이 없다.”고 한다. 임제는 ‘육도의 신령스런 빛이 아직도 꺼졌다, 밝혀졌다 한다.’고 했고, 역시 ‘육신상에서 활달히 움직이고 있는 무위진인을 심안으로 보라! 보라!’고. 불성의 신령스런 지혜의 작용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 투명하면서도 그렇지 않고, 색이 있으면서 없는 것이다. 이처럼 여래장에 거두어져 있는 마니주의 진공묘유는 우리자신이 자각에서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오안을 깨끗이 하고 오력을 얻음, 다만 증득해야만 알뿐 헤아릴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은 이를 의미한다. “거울 속의 모습은 보기가 어렵지 않지만 물속의 달, 어찌 잡을 수가 있을까?” 몸과 마음이 선정삼매로 단련되었을 때, 결국 불성의 ‘깨침’이 있음을 말한다.

“언제나 홀로 가고 언제나 홀로 걷는다. 달인(達者)은 모두 함께 열반의 길에서 논다. 고즈넉한 마음 청정하고 품격은 본래 높네. 초췌한 얼굴 깡마른 이를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대자유인, 달인의 모습을 노래한다. 깨침으로의 길은 홀로였지만 깨친 후는 다른 달인과 함께 열반락에 있는 것이다. 달인은 청정무구한 지도(至道)의 품격을 가졌지만 외면의 형상에 걸린 이들은 그를 지나쳐 버린다는 것이다.

혜원 스님(동국대 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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