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53 청화가 보영에게

기자명 법보신문

청정한 관음화신이 되소서

4살 때 인연 맺은 사제지간
16살 때부터 맞절-존칭 써
“공부하다 죽읍시다” 늘 격려


스님! 진정 관세음보살을 영념상속(念念相續)하시다가 한사코 영념상속하시다가 까무라치시고 그래서 관세음보살과 일체가 되시기를 피가 마르도록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산승도 다음 봄에 어설픈 변명이 나오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하렵니다. 더욱 동체대비를 내시어 인연 있는 불자들을 다스하게 섭수하시기 바라오며 불은(佛恩) 안에서 내내 건승하시고 오는 봄에는 기필코 초인의 상봉이 있기를 기약하면서 축도의 합장을 올리나이다.

보영은 지난날 선사 청화(淸華, 1923~2003)와의 인연을 돌이켜볼수록 그 인연의 지중함에 그저 감사드릴 뿐이다. 출가한 아버지의 사제라는 청화, 그 분은 어쩌면 자신의 곁에 왔던 관세음보살일지도 몰랐다.

보영이 청화와의 첫 만남을 기억하는 것은 일곱 살 때 무안 혜운사에서였다. 큰 키에 깡마른 체구, 한 없이 맑고 청명한 두 눈…. 이미 네 살 때부터 자신을 보아왔다는 그는 지갑이나 볼펜, 휴대용 칼 등 자신의 주머니에 있는 것을 모두 꺼내 주곤 했다. 처음에는 그저 마음씨 좋은 스님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같이 지내면 지낼수록 어린 보영의 눈에도 그는 확연히 달랐다. 말은 극히 적었고 화를 내거나 언성을 높이는 일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늘 평온해보였다. 고구마나 나물 하나만 탁발을 해와도 꼭 여법한 의식과정을 거쳐 대중들과 똑같이 나누었고,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한 번은 엄동설한에 내복도 없는 얇은 승복에 뒤꿈치가 닳아 철사로 묶은 고무신을 신은 그가 탁발을 다녀왔었을 때였다. 청화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보영을 보고 예의 그 맑은 미소를 지어보였지만 보영의 눈에 먼저 띈 것은 미소가 아니라 그의 발이었다. 파랗게 언 맨발에 철사가 계속 뒤꿈치를 스쳐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는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그의 맑은 미소와 함께 발갛게 물든 발이 보영의 가슴에 아프게 와 닿고는 했다.

보영의 눈에 비친 청화는 그 자신이 늘 강조했듯 ‘순탄한 환경에 길들지 말라. 그것은 한 순간에 지나간다. 가진 자는 잃는 것을 배우고 행복한 자는 고생하는 것을 배우라.’라는 신념으로 빈곤과 시련을 벗으로 삼아 치열하게 정진했던 수행자였다.

청화는 해방 후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극심했던 1947년 사촌동생의 소개로 우연히 찾았던 백양사 운문암에서 벽산 금타(碧山金陀, 1898~1948)를 만난 후 곧바로 출가를 결심했다고 했다. 금타화상에게서 ‘진정한 진리의 불덩어리를 보았다’던 그는 이후 스승이 그러했듯이 밤낮으로 눕지도 않는 장좌불와(長坐不臥)에 하루 한 끼 공양을 40여년 간 고수하며 번뇌의 질긴 쇠사슬을 끊기 위해 몸을 돌보지 않는 불퇴전의 용맹정진을 했던 것이다.

1983년 겨울 해제를 얼마 앞두고 보영이 급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두륜산 남미륵암으로 청화를 찾았을 때도 그랬다. 두 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는 협소한 공간, 문을 닫고 앉았어도 뼈 속 깊이 파고드는 영하 20~30도의 혹독한 추위는 방이라는 말을 무색케 했다. 보영이 먼저 청화에게 절을 올리자 청화 또한 열여섯 살 이후 늘 그래왔듯이 존칭과 맞절로서 화답했다. 이제 어엿한 스님으로 성장했으니 스님답게 살아야 한다는 무언의 가르침이었다. 간단한 인사가 끝나고 고개를 들어 청화의 얼굴을 바라보던 보영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의 양쪽 귀에 얼음이 꽉 차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스님, 귀에 그것이 뭡니까?”
“으음, 얼음이군요. 날씨가 추워서 그런가봅니다.”
“추우면 불을 지피셔야죠, 스님.”
“춥고 배고파야 도심(道心)이 생긴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방이 따뜻하면 긴장이 풀려요. 또 객이 오면 지필 땔감도 부족하고….”

순간 보영은 눈물이 왈칵 솟았다. 내심 자신도 열심히 정진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보영은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그래, 저분은 생명을 걸고 깨달음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보영이 21일간 단식하며 하루 8시간씩 염불하는 용맹정진을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그러나 처음 야무진 각오와는 달리 하루 이틀 지날수록 고통은 거대한 파도처럼 그를 덮쳐왔다. 열흘정도 지나자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때 보영을 이끌어준 것 역시 스승 청화였다.

“한번 하겠다고 결심했으면 끝까지 해야지 중간에 포기하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한생 태어나지 않은 셈치고 우리 공부하다가 죽읍시다, 스님.”

격려와 질책 끝에 마친 21일간의 기도…. 그때부터였다. 보영은 대쪽처럼 야윈 청화에게서 범부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향기가 남을 비로소 알았다. 훗날 시인 최하림이 그를 일컬어 ‘맑은 꽃 비상하게 자기를 다스린 사람에게만 느껴지는 향훈’이라고 표현했던 바로 그것인지도 몰랐다.

간혹 보영이 속된 생각이라도 품고 있으면 청화는‘부처님께 생명을 다 바쳐라. 규율을 잘 지켜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부처님께 죄스럽고 우리가 확고히 공부하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믿고 따르겠냐’ ‘망상하는 것, 많이 자는 것, 앉는 자세가 바르지 않는 것이 수행의 큰 걸림돌이다’ ‘불법 자체가 원융무이하니 종파나 교학, 참선 등 하나에만 치우쳐선 안된다’는 등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또 때로는 과학이나 역사에 대한 글을 써 보내주기도 했고, 스피노자, 니체, 괴테 등의 어록이나 요한복음서 내용을 써서 보낼 때도 있었다. 특히 안거가 시작될 무렵이면 간곡한 편지를 보내와 수행을 독려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망상과 정도를 가로막는 짓궂은 폭군과의 피비린 투쟁은 우리들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보다도 귀중한 시일을 미루고 미루다 어언간 황혼의 마수에 걸려든 산승을 거울삼으시어 진정 찰나도 자아성불을 떠나는 생활을 마시기 바랍니다.”

또 한 번은 보영이 붓글씨 공부하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청화는 이와 관련해 당부의 글을 인편에 보내오기도 했다.

“서도나 묵도나 음악 등은 영생을 지향하는 지난한 길에서 고독한 자기를 가누고 지키기 위한 준비자량이란 한계를 명심하시고 불타의 이념을 체득하고 증명하고 전도하는 일의(一義)적인 사명을 다만 찰나라도 소홀히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은 부질없는 몽환포영(夢幻泡影)에 사로잡혀 우리들의 소중한 생명을 얼마나 낭비하여 온지 모릅니다.”

청화는 해제하거나 광주에 나올 일이 있으면 보영이 있는 정광사를 자주 들르곤 했다. 그럴 때면 청화는 보영을 비롯한 대중들에게 법문을 들려주기도 했고, 여느 때처럼 그저 좌선삼매에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청화의 철저한 계행과 청정심은 베 한 보자기로 사향을 둘러막을 수 없듯 경내를 그윽이 드리우고는 했다. 보영은 청화의 그 국화꽃보다 진한 향훈이 수많은 불자들을 감동케 하고 불문에 귀의토록 하는 힘이라고 믿었다.

보영 또한 자신을 친딸처럼 평생 보살펴주며 이끌어주었던 스승 청화를 자주 찾았고 특히 생일 때면 어김없이 그가 있는 곳을 찾아 안부를 묻고는 했다. 입적 한 해 전인 2002년 11월에도 그랬다. 그런데 그날은 다른 때와는 달리 열심히 수행하라는 각별한 격려와 함께 게송을 건네주었다. ‘세상을 버린다’는 사세게(辭世偈)였다.

이 세상 저 세상(此世他世間)
오고감을 상관치 않으나(去來不相關)
은혜 입은 것이 대천세계만큼 큰 데(蒙恩大千界)
은혜 갚는 것은 작은 시내 같음을 한스러워할 뿐이네(報恩恨細澗)

보영이 그 짤막한 게송이 임종게(臨終偈)였음을 안 것은 다음해인 2003년 11월 6일이었다. 죽음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떠난다는 선승(禪僧)의 높은 기개를 내보인 마지막 활구였던 것이다. 적멸에 들기 몇 달 전부터 건강상태가 극히 좋지 않았던 청화는 늘 그래왔듯 그날도 장좌불와를 계속했다고 상좌들로부터 전해들었다. 그러다가 저녁 10시 30분께 제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금생에서의 세연(世緣)이 다했으니 이제 가련다. 수행 열심히 해서 중생구제 하는 일이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일이다.”라는 마지막 당부의 말과 함께 마침내 오랜 장좌불와를 풀고 자리에 조용히 누웠다고 했다. 보영이 입적 소식을 듣고 밤길을 달려 곡성 성륜사를 찾았을 때는 숨을 멈췄음에도 그윽한 미소를 띠고 있는 한없이 평화로운 스승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청빈과 무소유의 실천자’ ‘장좌불와와 일종식 납자’ ‘염불선 주창자’ ‘타인에게 한없이 관대하고 자신에게 한없이 엄격했던 수행자’ 등 수많은 대중들의 찬탄과 경외에도 정작 자신은 살아생전 부처님처럼 살지 못함을 늘 부끄러워했던 성스러운 사람. 그 분이 가신지 이미 오래건만 보영의 귀에는 “산승을 가장 위하시는 길은 보영 스님 스스로 가장 계율 청정한 관음화신이 되시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산승이 자나 깨나 기원하는 산승의 사무친 비원입니다.”라던 늙은 스승의 애정 어린 당부가 아직도 쟁쟁하기만 하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청화 큰스님이 광주 정광사 주지로 계시는 보영 스님에게 보낸 편지들은 『성자의 삶』(사회문화원, 2004)에 실려 있습니다.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