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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中 인광이 소혜원에게

기자명 법보신문

오직 자식이 어머니 그리워하듯 염불하오

초발심 거사에게
염불의 공덕-방법
상세히 일러줘


일체중생은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곧 모두 부처님 지혜를 갖추고 있소. 다만 탐진치 삼독이 그 안에 섞여 끼었기 때문에 부처님 지혜가 지견으로 변한 것이오. 모름지기 깊은 믿음과 발원으로 부처님 명호를 지송하며 살생을 금하고 생명을 보호하며 모든 사물을 아끼고 어떠한 죄악도 짓지 말고 뭇 선을 받들어 행하며, 스스로의 수행으로 남들도 감화시켜 다함께 정토법문을 닦도록 이끌기 바라오.

세상 사람들은 매양 자기에게 (부처님) 지혜가 있다고 큰 소리로 떠들 줄만 알지, 그 지혜라는 게 광석 안에 섞여 있는 금과 같아, 전혀 받아 쓸 수 없음을 모르오. 반드시 광석을 녹이고 제련하여 찌꺼기들이 완전히 사라지게 순화시켜야만 비로소 금으로 사용할 이익이 생기게 되오.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 입으로 시원스레 떠드는 것만 좋아하는데 이는 음식이 맛있고 영향 있다고 말만 하는 것과 같소. 굶주린 배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되니, 참으로 서글프다오.


스스로 불자임을 자부하는 거사 소혜원(邵慧圓)은 누구 못지않게 불교에 대해 많이 안다고 자부했다. 특히 선과 유식사상에 조예가 깊던 그는 불교는 철저한 자력종교임을 확신했고 극락왕생을 바라는 정토나 비밀스러움을 추구하는 밀교는 일반인들이 불교를 우매한 종교로 인식케 한다고 믿었다. 그런 까닭에 불교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면을 드러내되 맹목적이고 타력적인 부분들은 과감히 배격해야 한다는 게 그의 굳은 신념이었다.

그런 소혜원이 열렬한 정토행자로 바뀐 것은 오로지 인광(印光, 1861~1940)의 영향이었다. 1919년 가까운 도반의 권유로 읽게 된 『인광대사문초』(1918)는 정토에 대한 그의 고정관념을 뿌리 채 흔들어 놓았다. 이 책에서 인광은 염불이란 부처님의 생각에 의지해 잡념 망상을 쫓아내는 일이며, 마음의 거울에 낀 먼지를 닦아내는 수승한 방법임을 설파하고 있었다. 또 염불이란 자력에만 의존하는 다른 모든 수행법과는 달리 부처님의 가피력을 함께 겸비하고 있는 까닭에 아무리 업장이 두터운 중생이라도 꾸준히 염불하면 마음과 부처가 둘이 아닌 경지에 이른다고 말했다. 즉 한 톨의 모래알은 제아무리 작고 가벼워도 물에 넣으면 곧장 가라앉고 말지만 수십 톤 나가는 바위라도 큰 배에 실으면 뜨는 것처럼 중생의 업력이 아무리 두텁고 무거워도 부처님의 가피가 있으면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소혜원에게 인광의 법문은 충격이었다. 특히 최상의 수행법이란 믿었던 참선이 견성을 가능케 할 수는 있어도 지혜와 복덕을 구족해야 하는 궁극적인 성불에 이르기란 극히 어렵다고 단언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소혜원은 처음으로 자신이 어쩌면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염불을 그저 단순하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폄하해왔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인광의 법문집을 수차례 반복해 읽은 소혜원은 그를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정토에 대한 선입견을 접고 제대로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간단한 짐을 꾸려 인광이 머물러 있다는 보타산 법우사로 향했다. 쉬지 않고 며칠을 걸어 소혜원은 법우사에 도착했지만 그곳에는 자신처럼 인광을 만나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었다.

소혜원은 한참을 기다려 마침내 인광과 마주 앉을 수 있었다. 소혜원은 인광에게 따지듯 물었다.

“극락정토가 어디엔가 정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거사님 화엄경을 읽어보셨겠지요. 보현보살처럼 이미 증득한 경지가 부처님과 다를 바 없는 보살들도 서방 극락세계를 발원하고 있지 않소. 또 용수나 마명보살, 천태지의, 영명연수, 감산덕청 같은 대선지식들도 염불을 탁월한 방편수행으로 보았소. 그건 그 분들이 몰라서 그렇다고 생각하시오?”

“… 그렇지만 극락은 마음을 떠나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수많은 성현과 경전에서 실제 극락이 있다고 했는데 어찌 추상적인 유심정토만 진실이라 고집한단 말이오. 자성미타에 편협하게 집착해서 믿음과 발원이 없거나, 혹 있더라도 간절하지 않으면 그저 공염불에 불과하다오.”

소혜원은 또다시 물었다.
“부처님은 모든 욕망을 떠난 분으로 아는데 극락세계는 각종 금은보화로 가득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공(空)인데 극락을 원하는 것도 집착이고 헛된 욕망 아닙니까?”
“범부중생의 지견으로 여래의 경계를 헤아리지 마시오. 극락은 부처님의 공덕으로 나투신 실상이지 오탁악세의 업력으로 이뤄진 것과는 다르다오. 조금도 탐욕심이 없기에 극락세계의 뭇 보배 장엄도 이룰 수 있다오. 또 윤회를 끊기 위해 정토에 가고자 하는 것조차 욕망이라고 한다면 어찌 끝없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겠소. 대자대비한 아미타부처님을 부정하는 것은 곧 자신을 포기하고 버리는 짓이라오.”

인광과의 대화는 소혜원으로 하여금 염불에 깊은 관심을 갖도록 했다. 그는 그곳에 머무르며 인광의 법문을 들었고 그럴수록 염불수행의 수승함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새록새록 솟아났다. 소혜원의 눈에 비친 인광은 책에서 ‘항상 부끄러운 승려(常慚愧僧)’라고 밝혔던 것처럼 하심이 몸에 배어있었다. 특히 농부나 품팔이 아낙 등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이 법을 청해오더라도 물리치지 않았고 한결같이 자상하고 간곡하게 염불할 것을 당부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경전이나 연기의 이치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또 그는 계율에 철저했으며, 동물에서 곤충에 이르기까지 악도에서 벗어나 극락왕생하기를 간절히 발원하는 모습을 볼 때면 숭고하기까지 했다.

소혜원은 그곳에서 인광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유교집안에서 태어난 인광은 어린 시절 다른 유생들이 그렇듯 불교를 비방하는 글을 써 보았는데, 그때 눈병이 심하게 나 앞을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부처님께 참회한 후 다시 볼 수 있었던 일, 또 스물한 살에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출가했던 일, 이후 6년간 문을 걸어 잠그고 염불정진 했던 일이며, 법우사 장경루에서 20여 년간 방대한 경전을 공부했던 것도 전해들을 수 있었다. 그의 법문에 깊은 울림이 있는 것도 이러한 치열한 수행과 방대한 지식에서 비롯된다고 소혜원은 생각했다.

소혜원은 어설픈 정진으로 성인의 지위를 증득하려 했던 욕심을 버리고 아미타불의 본원력을 믿어 정토에 왕생하겠다는 간절한 원을 세웠다. 그런 소혜원에게 인광은 “오직 자식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듯 하는 염불법문만이 마음을 지닌 모든 중생이 받들어 수행할 수 있다오.” “정토 법문 수행도 기본적으로 청정한 계율을 엄격히 지키고, 선정과 지혜를 힘써 닦아야 하오. 그 바탕 위에서, 믿음과 발원으로 부처님 명호를 지송하여 극락왕생을 바라는 것이오.” 등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인광을 만나고 돌아온 소혜원은 어느새 염불전법사가 되어 있었다. 가족이나 친척 간의 대화 주제도 염불일 때가 많아졌다. 그의 가까운 친척인 반중청(潘仲靑)도 그중의 한 사람으로 소혜원은 그를 위해 인광에게 바람직한 불자의 행에 대해 물었고, 이에 인광은 반중청에게 혜순(慧純)이라는 법명과 정토행자의 생활을 상세히 적은 편지를 보내주기도 했다.

둘도 없는 도반이 된 혜원과 혜순은 인광의 안심(安心)법문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를 서원하고 이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들은 기존의 인광 법문을 유려하게 윤문하는 것을 비롯해 사재를 털어 새 법문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한 번은 소혜원이 법보시를 위해 일을 무리하게 벌여 빚을 지게 되고 이에 인광에게 도움을 청하자 자신의 능력을 헤아리지 않고 일을 벌이지 말 것을 당부해오기도 했다.

인광은 평생 주지 등 소임을 맡기는커녕 단 한 사람의 상좌도 두지 않았지만 소혜원 등 재가불자들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인해 인광에게 귀의하는 이들은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인광은 늘 덕이 없음을 부끄러워했고 번잡함을 꺼려해 때때로 폐관수행에 들어가고는 했다.

소혜원은 그런 스승 인광과의 인연이 한없이 고맙고 자랑스러웠으며 부디 오래오래 이 땅에 머무르며 많은 중생들에게 감로법을 주기를 늘 발원했다. 그러나 죽음이 성인과 범부를 어이 구분하랴. 인광은 1940년 10월 28일 임종을 맞이해야 했고 “염불하면 부처를 보고 틀림없이 극락왕생한다(念佛見佛, 決定生西)”는 말을 남기고 아미타부처님의 영접을 받으며 정토로 향했다. 세수 80, 승랍 60년이었다. 소혜원은 인광의 문집을 후세에 길이 전하는 것이 스승의 지중한 자비은혜를 갚는 길이라는 신념으로 정토로 향하는 마지막 날까지 인광의 정토법문을 알리는 데 혼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인광법사의 이 편지는 인광대사 가언록인 『화두 놓고 염불하세』(불광출판부, 2000)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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