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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구하 스님 (1872-1965)

기자명 법보신문

한국불교 근대화의 산파

1965년 10월 3일 입적
통도사 주지 3회 역임
독립자금 지원 증거 발견
위장 친일 논란 일기도


구하 스님은 개화기와 일제시대를 거치는 동안 불교계의 중심 축을 담당하며 한국불교의 근대화를 위한 산파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일제시대 명진학교를 설립해 인재양성에 힘썼는가하면 40세의 나이에 통도사 주지로 취임한 후 14년에 걸쳐 연임하며 개혁을 이끌었으며 30본산연합사무소 위원장에 피선돼 당시 불교계를 이끄는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시대 한국불교를 대표했기에 친일 행적에 대한 논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1875년 울산에서 태어난 스님은 13세 되던 해 천성산 내원사로 입산해 1889년 경월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이후 범어사에서 강백 의룡 스님으로부터 외전(外典)을 3년간 배웠고, 해담, 혜옹 스님에게서 내전(內典)을 두루 배웠다.

1900년 통도사에서 한국불교의 법맥을 이어오던 성해 스님으로부터 전법제자가 되면서 구하(九河)라는 법호를 수지 했다.

자신의 수행과 교학에 힘쓰던 스님은 이후 나이 35세가 되던 1906년 일본 불교계를 시찰하는 대표단에 포함돼 일본의 문물과 풍경을 관광하며 일본 불교를 접하게 됐다. 이를 계기로 스님은 전근대적이고 부패한 조선 불교를 개혁해야겠다는 발원을 세우게 됐고, 귀국 후 용성 스님을 비롯한 5∼6명의 중진 스님들과 연합해 조선불교의 개혁에 착수했다. 스님이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후학을 양성하는 것. 이를 위해 스님은 고산 스님을 비롯해 몇몇 스님의 도움으로 명진학교를 설립, 교감·교장 소임을 맡기도 했다.

이후 1911년 통도사 주지로 취임한 스님은 통도사가 전통사찰로서의 사격을 갖출수 있도록 건물들을 중창하고 옛 유물들을 수집해 보존하는데 앞장섰다. 또 스님은 출가자의 계율을 엄격히 강조하면서 당시 스님들이 경제적 안정을 위해 물건을 사고 파는 행위를 일체 금지시키기도 했다. 이 밖에도 마산, 울산, 진주, 양산, 창원, 창녕 등지에 통도사 포교당을 건립해 전법에 힘썼으며 매월 두 차례 법회를 열어 교리를 강설했고, 다수의 승려들을 일본에 유학시켜 인재를 양성하는데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스님은 1917년 이회광, 강대련 등과 함께 일본을 방문하면서 이곳에서 일본을 칭송하는 발언을 하는가 하면 1920년대 중후반 「조선불교총보」등에 친일 성향의 글을 발표해 불자들의 친일을 선동하기도 했다. 이런 까닭에 구하 스님은 오늘날까지 불교계 친일인사 명단에 포함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스님이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는 기록이 발견되는 등 스님의 친일이 위장이었음을 증명하는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면서 스님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다시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해방 후 중앙총무원장에 피선되기도 했던 구하 스님은 1965년 10월 3일 통도사 보광별당에서 세수 93세, 법납 76세로 입적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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