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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천송반야경』 ①

기자명 법보신문

팔천 개 詩句로 이뤄진 지혜의 완성

반야경전은 남인도에서 형성되어 점차 북인도로 전파되는데, 이 과정에서 처음에는 작은 게송에서 출발하여 2만5천송, 12만송에 이르는 반야경전이 나오게 되고 다시 이를 요약한 반야심경이 출현하게 된다. 팔천송반야경은 초기대승경전의 이 같은 흐름 가운데에서도 초기에 속하는 경전이다.

여기에서 송(頌)이란 32음절을 한 구절로 삼는 시구를 가리키며, 팔천송반야란 ‘팔천 개의 시구로 이루어진 지혜의 완성’을 의미한다. 그 성립 시기는 대략 기원전후 1세기 무렵이며, 성립의 주체는 기존의 부파불교와 대립하던 법사들(dhrma-bhanaka)이라고 한다. 따라서 그 내용은 아비달마불교의 격식과 번쇄함을 극복하고, 나아가 불도의 희망을 잃은 중생들에게 깨달음의 행복을 되찾아주고자 하는 새로운 노력과 시도들로 가득차 있다고 볼 수 있다.

입장에 따라 다르겠지만, 솔직히 평범한 이들에게 있어서 초기·부파불교의 가르침은 그 내용만큼 절실하게 와 닿지는 않는다. 곧, 내용이야 어려울 것이 없지만, 실천이란 측면에서 본다면 대개의 교설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벗어난 특별한 환경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모든 교리의 주제는 여읨[離]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깨달음을 완성한 이는 후유불수(後有不受)를 선언한다. 어느 한 구석 삶의 티끌을 벗어나지 못한 채 이를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미혹한 중생에 대한 배려는 뚜렷하지가 않다. 바라문 지상주의를 극복하고 만인의 구원을 선포한 고오타마의 불교가 스스로의 틀 속에 갇혀 버렸다는 인상이다.

팔천송반야라는 초기대승불교의 가르침은 이 같은 정황에서 출현하고 있다. 따라서 초기반야사상의 출현은 불교사에 있어서도 그 의의가 매우 새롭고 크다. 대승불교의 출현에 앞서, 부파불교는 더 이상 붓다의 복된 가르침을 전하는 행복의 나침반은 아니었다. 곧, 그들이 대중을 안주에 두지 않고 자신들만의 깨달음을 향해 완고히 나아가고 있을 때, 이들의 이기적인 모순을 과감히 비판하면서 원초의 붓다의 구원을 보여주고자 했던 초기대승불교는 스스로 삶의 고통을 여의지 못하는 범부들에게는 새로운 희망의 제시였다고나 할 것이다.

팔천송반야에 있어서 초기·부파불교에서 정립된 대부분의 불도수행의 이론들은 그 한계를 선언당하기에 이른다. 한마디로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초기·부파불교의 이상이 고제[苦諦]로 표현되는 이 현실의 삶을 여의고 홀로 가는 수행완성자의 길이었다면, 초기반야사상에서의 이상은 이 고통의 현실을 행복의 장으로 바꾸고자 하는 의지, 곧 ‘이 삶을 사랑하고’ ‘삶을 완성하고’ ‘삶의 근거로서의 세상을 사랑하는’ 노력으로 드러난다. 여기에서 반야는 행복의 지렛대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반야는 이미 초기불교에서부터 보편적으로 쓰이던 용어로, 통상 ‘지혜’로 번역된다. 하지만, 대승의 입장에 서면 지혜 정도로는 실상 그 뜻하는 바를 제대로 전하지는 못한다. 대승에서 쓰이는 반야는 그 이전의 반야와는 의도하는 바가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곧 소승에서의 반야가 불도수행자의 명철한 도력(道力)을 상징한다면, 대승의 반야란 범부가 알아 챈 ‘실존에 대한 자각’이자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의 한 모습일 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해 본다면, 대승에서 언급되는 반야란 삶에 허우적대는 뭇 중생들이 비로소 자신의 처한 상황을 눈치 채기 시작한데서 드러나는 마음의 빛이다. 그래서인지 팔천송반야에서 드러나는 반야는 매우 정서적이고도 역동적인 의식의 흐름 그 자체이다.

이처럼 대승의 반야란 모순을 ‘눈치챔[悟]’을 전제로 일어나는 ‘의식의 빛남’이다. 곧, 오온의 부조화가 일으키는 모순[苦]에 대해 되돌아봄으로써 일으키고, 뉘우침으로써 일으키며, 나를 둘러싼 모든 것(一切法)들에 대해 연민함으로써 일으키는 의식의 빛이 바로 반야이다. 따라서 이러한 대승의 반야는 미혹한 범부의 특권이기도 한 것이다.

이 같은 속성의 반야를 기조로 전개되는 반야사상이 건조하고 형식적인 부파불교의 수행주의·교리주의를 거부하게 됨은 당연한 현상이다. 또한 미혹한 범부의 인식능력을 초과하는 교설이나 이론도 과감히 거부당하며, 존재의 행복이 결코 멀리 여의는 일[遠離]에 있지 않다고 선언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소승의 완고한 수행주의를 버린다는 것도 아니니, 저들조차도 함께 타고 나아가자고 일승을 주창함도 또한 반야의 입장이다. 그러니 위대할 수밖에 없다.


김 형 준 박사
경전연구소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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