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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천송반야경』 ②

기자명 법보신문

반야란 행복으로 이끄는 지혜의 등불

믿음의 행복지수. 여전히 불교인들에게는 생소한 말일까? 세간의 삶은 행복을 조건으로 이루어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행복해지기를 원한다. 행복이 아닌 것은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행복이 없이는 힘을 낼 수 없다고들 한다. 행복을 전제로 해야 감동도 있고 노력도 있는 법이다. 우리는 행복이 아닌 길에 본능적으로 몰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불교신앙이라고 예외는 아닐 것이다.

이같은 양상은 전도라는 측면에서 극명히 드러나는 일이다. 불교 외의 종교인들이 자신의 믿음을 남에게 전할 때는 예외 없이 ‘얼마나 행복해 지는지’를 강조하며 또한 그 행복의 길에 동참하기를 권함을 본다. 반면에 대개의 불교인들은 그런 말을 하기를 꺼려한다. 습관처럼 고를 얘기하고 무상을 얘기하고 공을 얘기하고 업보를 얘기해 주는데 익숙할 따름이다. 온통 숙세의 무거운 짐에 짓눌린 듯한 그런 태도를 사람들이 좋아하고 따를 리 없는데도 말이다. 이런 모습의 불교를 보고 불교에 익숙하지 못한 이들은 염세주의라고 불렀겠지만.

왜 불교는 적극적으로 행복을 얘기하지 않을까? 부처님이란 최상의 행복한 삶을 실현한 분이라고, 그래서 그 분처럼 행복해지기 위해 불교의 길을 가야한다고 얘기해 주지 못하는 것일까?

초기대승불교의 출현은 바로 불교의 행복선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초기불교에서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교리상의 외형적 변화는 없다. 초기불교에서 언급되던 대부분의 기본교리체계는 부파를 거쳐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유효하다. 하지만, 다른 것이 있다면 교리사상을 적용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목표가 더욱더 적극적으로 수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곧, 그것은 적당히 기본교리를 재해석하는 정도가 아니라, 불교는 곧 환희이고 희망이라고 선언해 주는 대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초기반야사상에 있어서 드러나는 그 첫 번째 선언이 바로 ‘자아(我)의 청정선언’이다.
“세존이시여, 자아가 청정하기에 색이 청정하고, 수·상·행·식이 청정하옵니다.”

이는 청정바라밀을 설하는 사리불의 얘기이다. 참으로 시원한 선언이다. 색·수·상·행·식, 곧 오온은 나를 구성하는 물질적·정신적 요소를 표현한 개념으로, 초기반야경전에서 이처럼 선언되기 전까지는 오로지 덧없고 실체 없는 속성으로만 간주되어 왔다.

무아나 공을 귀가 닳도록 들어온 사람이라면 의아해 할 것이다. 마치 무아가 불도수행의 근간인 듯 여겨왔거늘 어찌 ‘아’를 인정한다는 말인가! 불교사상에 있어서 ‘나’는 어디까지나 여읨의 대상일 뿐이다. ‘고’라는 진리체계는 바로 나라는 존재가 일으키는 집착의 결과이고, 따라서 그러한 고의 직접적 원인인 나를 부정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한 수순인 것이다. 하지만, 단언하건대, 불교가 종교라고 여겨지는 한 무아사상이 됐건 삼법인이 됐건 그러한 가르침의 최종목표는 역시 ‘행복한 나’ ‘행복한 세상’을 실현시켜 주는 데 있어야 한다. 곧, 무아란 절대적 행복으로 가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니, 저 피안의 행복을 이룬 뒤에는 마치 뗏목을 버리듯이 무아라는 개념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무아가 버려질 때 남는 건 오직 청정하고 행복한 나뿐이다.

여전히 바깥에서 보는 불교신앙의 특징은 부정적이고 염세적이다. 기회 있을 때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설명을 하지만, 여실지견하건데 그렇게 비추어 지는 것도 또한 사실인 듯하다. 하지만, 부정적인 태도를 통해서 얻어지는 행복지수는 결코 높을 수가 없다. 이는 부파불교의 수행자들도 잘 알고 있었으니, 청정도론에서는 선(禪)의 네 단계의 경지에 도달하는 수행법을 분류하면서 부정관(不淨觀)으로는 초선(初禪)에 이를 뿐이라고 했다. 존재를 부정하다고 관찰하는 소극적인 태도로는 완전한 행복감(禪)을 맛볼 수 없기 때문이다.

반야란 ‘내 처한 상황을 눈치 채는 일’에서 드러나는 ‘지혜의 빛’이다. 나라는 존재가 괴롭고 덧없는 삶 속에 처해 있음을 눈치 챘다면, 이제는 그런 삶 속에서 행복을 실현시키려는 값진 노력이 필요할 뿐이다. 내가 행복해야 남을 행복으로 이끌리라. 붓다께서 제자들에게 전도를 명하심은 바로 그런 뜻이 아니었을까. 이제 그대들은 행복해졌으니, 이제 남을 행복으로 이끌라! 반야란 그러한 노력을 이끌어 가는 지혜의 등불인 셈이다.

김형준 박사(경전연구소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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