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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래리 로젠버그〈하〉

기자명 법보신문

불교의례 배제… 위빠사나 핵심만 지도

래리가 접한 위빠사나 수행은 좌선과 걷기 수행(행선)만 하면서 오직 호흡을 알아차리는 수행이었다. 독경의례도 없었고, 마음챙김을 놓치지 않는 것을 제외하고 식사하는 특별한 방법도 없었다. 수행의 핵심은 지적인 이해가 아니라 자신을 깊이 관찰해서 얻는 지혜였다. 래리는 숭산스님이 지도하는 방식의 독경과 절하는 의식을 통해서 어느 정도 집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위빠사나의 통찰에는 비견할 수 없었다. 그것은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어 내는 방식, 그 괴로움을 꿰뚫어 보는 방법, 그리고 그것을 내려놓는 방법에 대한 통찰이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깨어있는 삶 그 자체였다.

<사진설명>래리 로젠버그가 수행을 주도하고 있는 캠브릿지 위빠사나 수행센터 전경.

선불교에도 이처럼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리라는 전통이 있다. 바로 묵조선을 가르치는 조동종이었다. 지관타좌, 그저 묵묵히 깨어서 앉아 있으라는 가르침이었다. 그저 앉아서 완전하게 있는 그대로 깨어있으면 되었다.

서양의 자비-지혜 발견

래리는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입출식념, 수식관)을 가르칠 때, 이처럼 단순한 방법을 사용한다. 아무런 기법이나 방법도 필요 없고 심지어는 호흡조차 필요 없어진다.

실제로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 수행에서는 호흡이 집중력을 기르는 유일한 대상이 된다. 그러면 호흡에 뿌리를 둔 알아차림은 분명하게 조건에 의해 생겨난 모든 현상들(諸行)이 무상하고 실체가 없는 것임을 분명하게 보게 된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통찰에 의한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입출식념경』에 설해져 있는 가르침이다.

하지만 래리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방식을 강요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그러한 경험을 하도록 내버려둔다. 래리 자신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 그저 깨어있음에 더 끌린다고 한다. 래리는 크리슈나무르티의 가르침은 붓다의 마음챙김에 대한 가르침을 멋지게 현대적으로 해석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시작한 곳인 크리슈나무르티의 가르침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하버드 대학 근처에 캠브릿지 위빠사나 수행센터(the Cambridge Insight Meditation Center, CIMC)를 설립한 이유에 대해서는 도시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항상 가까운 곳에서 수행할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래리가 수행을 지도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일주일에 두 번씩 책방에서 가르쳤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함께 수행할 공간의 필요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래리는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는 삶에서 어떤 책임을 떠 맡는 것을 피해왔다. 이렇게 몇 년이 지나갔고, 래리는 통찰수행회 IMS와 같이 교외의 한적한 수행처가 필요한 만큼 도시의 수행처가 있으면 정말 좋겠다고 느끼게 되었다. 장기간의 집중수행을 하기에는 IMS와 같은 수행처가 적합했지만, 집중수행에서 돌아와서 수행할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래리는 일상생활을 아주 진지하게 살아가는 방식을 가르칠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일정한 공간에서 주어진 시간동안 집중수행을 하고 난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하면서 계속 수행을 이어나갈 공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가족, 학교, 직장으로 돌아가 생활 속에서 수행하는 법을 가르쳤다. 래리는 심리치료사가 아니라 법의 관점에서 사람들을 지도했다. 이러한 수행이 일과 결혼생활과 학교에서도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확실히 하나의 도전이었다. 이 가르침은 세상살이에 어떻게 도움이 되어야 하는가라고 반문하였다.

래리가 가르침을 받은 대부분의 스승들은 아시아에서 온 독신 스님들이었다. 여성에 대해서 거의 직접적인 관계를 맺은 경험이 없고 직업을 가져본 적도 없었으며, 어떤 분들은 돈을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런 분들이 일상생활에 대해 해주는 조언은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다고 래리는 말한다.

그 스승들은 남자들에게 여성에 대해서 가르쳤다. 래리는 자신의 스승에게서 들은 가르침을 농담 삼아 이렇게 말한다. “부인과 아이들을 잘 돌보세요. 잘 부양하고 집안을 돌보며 학교교육을 시키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좌선하는 일을 주된 일과로 삼는다면, 실제로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결혼생활이나 아이들 양육이나 일이 그다지 역동적인 상황으로 보이지 않게 된다. 이런 가르침을 받으며, 앉아서 수행하는 것보다 일상생활을 통해서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길을 찾는 것이 결코 열등한 일이 아니라고 보는 것은 엄청난 도전이었다다.

래리는 이것이 바로 불법이 서양화되는 과정이었다고 한다. 래리는 서양인들이 자신들의 고유한 방식에 의한 정신적 성숙에 대해서 존경하는 마음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영적인 가르침은 아시아에 있고, 자신들은 영적인 문화의 야만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스님을 보면, “스님, 저희들에게 오셔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주세요”라고 말한다. 하지만 래리는 아시아에 가서 아시아 사람들도 서양인들처럼 혼돈에 빠져있음을 보았다. 그리고는 서양에도 동양처럼 자비와 지혜의 전통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자비와 지혜는 종교적이지 않은 사람에게도 있었다. 래리는 아시아에서 아시아의 불교도들이 하는 것과 똑 같이 행동했다. 그리고 이 전통에 깊은 존경심을 보였다. 하지만 아시아 사람만이 친절함을 독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시아에서는 수행의 관점에서 볼 때 재가자의 삶은 한 단계 낮게 평가되었다. 개인적으로 래리도 절에서 사는 것이 깨달음을 얻는 가장 높은 가능성을 제공해 준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출가가 반드시 깨달음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 많은 절은 거의 없었다고 회고한다.

재가자 일상수행 강조

서양인들에게는 실제 생활을 살아갈 수 있는 가르침 즉, 돈을 다루고, 관계를 맺고, 하루 한 끼 이상의 식사를 해야 하는 삶에 필요한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문제는 먹는 것이나 성생활이나 돈이 아니라, 이러한 에너지를 사용하는 방식을 모른다는 것이다. 절에서 가르치는 방식은 이렇다. “만지지마라. 위험하니까.” 하지만, 재가자의 삶은 절에서의 생활과 다르다. 돈을 쓰는 법, 먹을 것을 얻는 법, 바른 관계를 하는 법을 배우면서 그 생활에서 더럽혀지지 않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것이 재가자들의 도전이다. 일상생활에서 한 발은 풍진 속에 둔 채로 때 묻지 않게 살아가는 법, 래리는 불교를 배우면서 이러한 길을 스스로 찾았다. 많은 불교전통을 배운 래리는 두 가지 중요한 수행법을 선택했다. 호흡과 함께 사는 법과 일상적인 마음의 힘이다. 즉 단지 알아차리는 것 그 자체이다. 이 둘은 크리슈나무르티를 통해 처음 접했고,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호흡을 통해 지금 이 순간 깨어있는 것. 이것이 래리가 배우고, 살고 있고, 가르치는 것이다.
김재성(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교수)
metta4u@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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