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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라오스 루앙 쁘라방

기자명 법보신문

식민-사회주의에 얼룩진 ‘살아있는’ 불교박물관

‘식민주의’ ‘사회주의’ ‘불교’, 이 셋은 단어만 놓고 봐도 공존하기 힘든 거북한 관계임을 누구나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이 셋이 유네스코(UNESCO.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지휘감독 아래 ‘동침’하고 있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철지난 이념타령이라고 타박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 셋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어색한 구석이 많다. 서로 부정해 왔고, 서로 타도 대상으로 삼았던 역사적 경험뿐만 아니라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서로가 지닌 ‘구원’을 떨쳐버렸다고 볼만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비록 정치 체제로써 사회주의가 지녔던 날카로운 각이 무뎌진 건 사실이라 하더라도,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은 수많은 사회주의자들에게 식민주의와 종교는 경계 대상임에 틀림없다. 반대쪽을 보자. 자유주의로 무장하고 새롭게 나타난 식민주의자들에게는 사회주의라는 이름 자체가 여전히 공존할 수 없는 악마들로 각인되어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불교는 어떤가? 때론 민족주의의 얼굴로 식민주의에 저항했고, 때론 식민주의자들과 손잡고 사회주의를 공격했던 다양한 모습을 지닌 불교는 정체성 자체가 희미해 그 둘 모두로부터 환영받기는 글렀지 않나 싶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는데, 사실은 라오스의 루앙 쁘라방(Luang Prabang)을 말하고자 한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왓, 버마의 파간과 함께 동남아시아 불교유적지를 대표하는 루앙 쁘라방은 말 그대로 세계에서 절이 가장 밀집된 지역이라 불러도 전혀 지나침이 없는 곳이다.

물론 파간과 앙코르왓을 그 거대한 덩치로 놓고 보면 루앙 쁘라방은 별로 할 말이 없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파간이나 앙코르왓의 절들이 거의 허물어진 박물관 상태라면 루앙 쁘라방은 승려와 주민이 일상을 닦고 있는, 살아 움직이는 절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난다.

인구라 해야 기껏 20,000여명뿐인 산골마을에 절이 자그마치 32개나 되는데, 이걸 주민 수와 비교해 보면 625명 당 절이 하나라는 뜻이 된다. 이것도 본디는 절이 67개였으나, 1975년 빠텟 라오(Pathet Lao)가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하면서 반으로 준 숫자라고 한다.

그렇게 사오백년 묵은 절들이 즐비한 루앙 쁘라방은 빼어난 풍광과 어울려 오늘날 관광단지로 둔갑했다. 라오스 북부를 타고 내리는 메콩강과 칸강의 합류지에 자리 잡은 해발 700미터 루앙 쁘라방, 이 아담한 산골마을에는 수도 위엥띠안으로부터 하루 세 차례나 비행기가 날아들고, 이웃 타이와 캄보디아로부터 국제선이 들락거린다. 특히, 1995년 유네스코가 이 루앙 쁘라방을 인류 문화유산으로 선정하고부터 관광객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고들 한다.

아무튼, 산골마을과는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고급 카페와 식당들이 줄지어 늘어선 루앙 쁘라방을 큰 그림으로 그리자면 그야말로 ‘절 반 호텔 반’이 나온다. 이 루앙 쁘라방을 조금 세밀하게 그려보면, 고색창연한 절들 사이사이에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의 유산인 유럽풍 건물들이 촘촘히 드러난다. 그 그림들 위로 노란 ‘망치와 낫’이 선명하게 찍힌 붉은 깃발, 사회주의 영혼이 휘날리고 있다.
절과 식민주의자의 유산을 뒤덮은 붉은 깃발, 그리하여 루앙 쁘라방을 거니노라면 정치나 이념 같은 것들이 심각한 마비증상을 일으키고 만다. 특히, 붉은 깃발이 걸린 식민풍 건물 앞을 지나는 200여 탁발승들의 새벽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아찔한 현기증마저 들 정도다.

‘개와 원숭이 관계’라고 했던가? 사회주의와 불교, 사회주의와 식민주의, 불교와 식민주의가 한 마을에서 충돌 없이 잘 살아간다는 건 참으로 상상하기 힘든 그림이었던 탓이다.

관용인가, 타협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혼란인가?
어쨌든 이 가당찮은 루앙 쁘라방의 배후를 한번 들쳐보자. 루앙 쁘라방은 최초의 라오스 왕국으로 꼽는 란상(Lan Xang)의 수도였던 곳이다. 1353년 화 응움왕(King Fa Ngum)이 크메르제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당시 무앙 사와(Muang Sawa)라 부르던 이 루앙 쁘라방 자리에 왕국을 건설한 뒤, 1357년 지명을 무앙 시엥 통(Muang Xieng Thong)으로 불렀다가 다시 얼마 뒤 크메르 왕실로부터 파 방(Pha Bang)이라는 불상을 선물로 받고는 루앙 쁘라방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루앙 쁘라방은 1545년 포티사랏왕(King Phothisarat)이 수도를 위엥띠안으로 옮겨가면서 역사로부터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694년 수린야 옹사왕(King Sulinya Vongsa)이 사망하자 그이의 손자들이 위엥띠안의 란 상왕국에 맞서 루앙 쁘라방 독립왕국을 선포했으나 대세를 얻는데 실패하고 이웃 사이암(타이), 베트남, 버마에 조공을 바치며 겨우 명맥을 이어갔다.

이어 1887년 루앙 쁘라방은 중국계 호족(Haw)의 침략을 받자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을 받아들이면서 다시 한번 라오스왕국의 수도가 되어 현대사에 등장했다. 그 과정에서 루앙 쁘라방 왕실은 식민주의와 사회주의를 오가며 생존을 위해 몸부림 쳤으나, 결국 1975년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한 파텟 라오가 왕실을 해체시키면서 운명을 다했다.

이처럼 루앙 쁘라방은 라오스 역사를 상징하는 핵심 공간이자 시간이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서 루앙 쁘라방을 낀 ‘불교가 어떻게 사회주의 혁명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라는 의문이 남는다. 예컨대 사회주의 혁명이 불교나 여타 종교를 부정했던 역사는 중국이 좋은 본보기거리를 제공한다.

그러나 라오스는 같은 시기인 1975년 민주캄푸치아(크메르 루즈)가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하면서 불교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던 캄보디아 상황과도 큰 차이를 보였다. 물론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한 라오스에서 불교가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경미했던 게 사실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라오스 현대사에서 불교는 처음부터 사회주의 혁명과 공존방식을 도모해 왔기 때문에 몰살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1946년 다시 인도차이나반도로 되돌아 온 식민주의자 프랑스에 맞서 베트남의 호치민이 주도한 인도차이나공산당은 전면적인 독립투쟁에 돌입했고, 그 결과 1954년 프랑스 식민통치가 붕괴된 라오스에서는 왕당파와 공산당이 연립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나 연립정부는 곧 무너지고 1960년대 들어 미국의 지원을 받은 친 서방 정파와 파텟 라오 사이에는 내전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러다가 결국 1975년 미국이 베트남에서 패주하자 라오스에서는 파텟 라오가 집권하게 되었다.

이런 라오스 혁명 과정 속에서 왕실을 비롯한 친 서방 정파뿐만 아니라 파텟 라오도 적극적으로 불교를 끌어들였다. 특히 혁명을 주도한 빠텟 라오는 ‘공산주의와 불교의 친화성’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면서 승려들의 지원을 얻어냈다. 바꿔 말하면, 라오스 불교는 사회주의 혁명을 지원한 대가로 목숨을 건졌던 셈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친 서방 정파를 지원하며 반혁명 전선에 섰던 승려들도 적지 않았지만, 그이들이 대세를 바꿀만한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라오스의 혁명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했던 불교는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면서부터 또 다른 생존법을 익혀가야 했다. 불교가 비록 전면적인 탄압을 받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더 이상 대접만 받는 순탄한 길을 걷을 수는 없었다.

라오스 정부는 승려들을 위한 보시를 금지시키며 대신 정부가 관장하는 정량 쌀만을 제공했고, 부족한 부분은 승려들이 스스로 생산해서 보충토록 했다. 그로부터 승려들은 공동체 내에서 신도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또 애국심과 공산주의 역사를 전파하는 사회주의 교사 노릇을 하거나, 전통 약초로 환자를 돌보는 약사 노릇을 하며 자신들의 노동을 통해 밥을 얻게 되었다.

승려들의 노동은 종교부가 감독하고 교육부가 관리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승려들의 도구였던 모든 요술과 부적 사용을 금지시켰고 또 액막이와 복채를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말하자면, 전통적으로 승려와 신도 사이를 연결해 왔던 모든 기술적인 수단을 제압당한 라오스 불교는 ‘일해야 밥이 나온다’는 사회주의 철학을 받아들이면서 생존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렇게, 라오스 불교가 거쳐 온 역사와 현실을 압축해 놓은, 살아있는 박물관이 바로 루앙 쁘라방인 셈이다. 그 동안 자폐증세를 보여 왔던 라오스 정부도 더 이상 도도한 자본주의 압박을 견뎌내지 못한 듯, 최근 들어 급격히 개방이라는 새로운 물살을 타고 있다. 그리고 그 물살은 루앙 쁘라방을 휩쓸고 있다. 얼굴만 바꾼 식민주의와 혁명의 추억만을 간직한 사회주의, 그 틈새를 오가는 불교, 그렇게 셋이 ‘조화’라는 이름 아래 함께 살아가고 있다.
바로 루앙 쁘라방의 오늘이다.

한겨레21 아시아네트워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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