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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해원 황의돈(1890∼1964)

기자명 법보신문

한국 근·현대 사학 개척자

해원 황의돈 거사는 교육자이자 사학자로 활동하며 한국 근·현대사학을 개척한 인물이다.

일제시대 보성고등보통학교, 중동학교 등지에서 후학들에게 한국사를 지도하면서 민족주의 사관을 심어줬을 뿐 아니라 『조선통사』등 수많은 저술활동을 통해 비뚤어진 한국사를 올곧게 복원하려 노력했다.

1890년 음력 9월 충남 서천에서 태어난 황의돈 거사는 가까운 인척이 한말의 문인 황현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전통적인 유학자의 가문에서 성장했다.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을 배워 4살 때부터 『천자문』, 『소학』,『동몽선습』등을 두루 섭렵했으며, 16세에 이르러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모두 익힐 정도로 한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습득했다.

17세 되던 해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군산공립보통학교 보습과에 입학해 1년 간 수료한 이후 황 거사는 서울과 일본을 오가며 동서양에 걸친 고전과 근대식 학문을 두루 접했다. 그러나 1907년 한일신협약에 의해 국가가 일제의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자 그는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우선적으로 국사연구와 민족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리곤 1909년 중국 북간도 중영촌에서 이상설 등이 경영하던 서전서숙의 후신인 명동학교를 김약연 등과 함께 창설하고 후학들에게 민족사 교육을 통해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을 상실하자, 이에 분개한 황 거사는 항일독립투쟁을 위해 중국망명에 나섰지만, 평안도 인근에서 독립운동가 안석, 이승훈 등이 “국내에서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 독립의 기반을 마련해 달라”고 권유해 국내에 남을 것을 결심하고 민족사 교육에 전담했다. 이후 황 거사는 평양대성학교, 서울 휘문의숙, 보성고등보통학교, 중동학교 등지에서 한국사를 가르치며 한국 민족사의 중요성을 일깨우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1940년대 들어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극에 달했고, 이후 황 거사는 더 이상 민족사 교육에 나설 수 없게 됐다. 이 당시 유일하게 그의 마음에 안정을 취할 수 있게 해 줬던 것은 불교였다. 1942년 그의 나이 52세 되던 해 황 거사는 당시 강원도 오대산에 주석하고 있던 한암 스님으로부터 참선 수행을 배우면서 불교에 귀의하게 됐다. 이후 불교에 심취했고, 그의 학문과 사상에도 불교의 영향을 깊이 받게 됐다. 한국사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불교사를 새롭게 연구하려는 시도가 바로 그것이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황의돈 거사는 문교부 편수관의 직책을 맡아 국사 교과서를 편수했고, 51년∼62년까지 동국대 교수로 활동하며 「역사적 대국의 동향과 불교」, 「원측대사와 원효대사」등 수많은 저술과 논문을 남기기도 했다.

평생을 한국사 연구에 매진했던, 특히 민족주의적 사관에서 우리민족의 정통성을 강조하려 노력했던 황의돈 거사는 1964년 11월 23일 74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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