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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도코지(東光寺)

기자명 법보신문

충절 맹서 서린 석등 위엔
형제의 검은 피그림자 뿐

<사진설명>검은 그림자 속으로 모리 집안의 가묘가 보인다. 비석 아래 500기의 석등은 이 집안의 가신들이 주군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바친 것이다.

야마구치현 하기시 북쪽에 위치한 도코지(東光寺)는 그림자가 무척 아름다운 사찰이다.

절에 들어서는 순간 일주문 그림자 속으로 도코지 단풍길이 환하게 비춰지고, 낙엽 덮인 오솔길을 한참 걸어가다 보면 짙은 소나무 그림자 사이로 ‘우수에 찬’ 대웅보전이 드러난다. 다시 대웅전을 지나 뒤편 언덕을 오르면 또다시 검은 계단의 그림자 속으로 모리 집안의 가묘가 등장한다.

빛과 어둠의 대비는 빛 속에 드러난 사물을 더욱 또렷이 보이게 한다. 때론 그 어둠의 그림자가 빛보다 더욱 아름답게 느껴질 때도 있다. 마치 삶의 애환이 드리워진 얼굴 속에서 더 깊은 인간미가 느껴지듯이.

도코지는 전국시대의 영웅 모리 모토나리 집안의 원찰[菩提寺]이다. 여기에는 모리 집안의 3대 한주부터 11대 한주까지 홀수대 한주와 부인들의 묘소가 있고, 그 아래로 500여기의 석등이 줄을 지어 서있다. 이 500여 석등은 모리 집안의 가신으로 활동한 사무라이들이 주군이 죽은 다음에도 그에게 충절을 맹세한다는 의미로 바쳐진 것이라고 한다.

모리 집안을 주고쿠(中國)의 패자로 일군 1대 한주 모리 모토나리를 비롯해 2대부터 12대까지 짝수대의 한주들은 임제종 사원인 다이쇼인에 모셔져 있다. 이곳에도 마찬가지로 600기 정도의 석등롱이 줄을 지어 서있다.

그런데 모리 집안 한주들을 기리는 비석이 우리의 그것과는 모양새가 퍽 다르다. 한국의 비석들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머리에 거북의 등 위로 길죽한 탑신이 올라가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 집안 비석들은 몸은 거북이가 확실한데, 머리 부분은 돼지부터 개, 양, 호랑이 등 각양각색이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그 사람의 띠에 따라 머리 부분을 다르게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사진설명>모리 집안 한주의 비석은 머리 부분을 십이지의 동물로 조각했다. 이 비석 주인은 아마 돼지해에 태어난 듯 하다.

모리 집안 가묘의 석등들은 1년에 딱 한번 오봉 축제 때마다 불이 켜지는데 그 모습이 가히 장관이다.

석등 지붕에는 수백년간 피고 지기를 거듭했을 돌이끼들이 꽃처럼 듬성듬성 피어있다. 저 석등을 바친 사무라이들은 그의 다이묘가 그러했듯이, 저 돌꽃이 채 내려앉기도 전에 배신과 모략을 거듭했으리라.

모리 가는 오우치 가에 이어 16세기 일본 혼슈 서부를 장악한 다이묘 집안이다.
온라인 게임의 개념도 없이 20대를 훌쩍 보냈을 상당수의 독자들은 생소하게 들리겠지만, 사실 모리 모토나리는 한국을 비롯한 세계 청소년들에게 상당히 친숙한 이름이다. 삼국지 게임 제작사인 코에이 게임이 만든 영걸전 중 하나가 모리 모토나리 편[신장의 야망]이기 때문이다. 아키의 소영주에서 일본 서부 지역의 패권을 장악, 전국시대를 주름잡은 다이묘가 된 모리 모토나리의 생애는 게임의 스토리가 될 만큼 드라마틱했다.

모토나리는 코오리야마(郡山)성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지만 7살 때부터 코오리야마의 서쪽에 있는 타지히(多治比)의 사루카케(猿掛)성에 맡겨졌다. 그의 부모는 이미 어렸을 때 죽었고, 형마저 몇년뒤 잃은 터라 비록 가신의 집이었지만 모토나리의 어린 시절은 거의 더부살이에 가까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가 27살이 되던 해 모토나리의 인생에 첫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그래 여름 모리 종가의 당주 오키모토가 병으로 죽고 그의 조카마저 9살의 나이로 급사했던 것이다. 종가에 대가 끊어지자 결국 모토나리와 그의 배다른 동생 모토츠나 사이에 후계자 자리를 놓고 싸움이 일어났다. 결과는 모토나리의 승리였다. 이노우에(井上) 일족의 추대를 받은 모토나리가 상속자가 되었고, 모토나리는 그에게 대항한 모토츠나를 죽였다. 이때 주고쿠를 주름잡던 아마코 가는 모토츠나를 지지했다. 당시 모토나리의 가슴 속에 쌓인 원한은 이후 아마코 가의 멸문지화로 이어진다.

<사진설명>도코지 대웅보전 전경.

모토나리는 이노우에 가의 도움으로 모리가의 당주가 되었지만, 결코 이노우에 가에 대해 충성이나 의리 같은 것을 느끼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이노우에 집안도 아마코 집안도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그를 삼키고 뱉는 이해 집단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가문을 잘 되라고 하는 자는 다른 나라에는 있을 지 모르지만, 우리나라에는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 모토나리의 기본적인 마인드였다. 그리고 전국시대를 살아가는 일본 무장들 또한 이와 비슷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

이때까지만 해도 모리 집안은 일본 서부의 작은 성 아키(安藝)를 지배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15세기경 주고쿠는 양대 패자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산인(山陰)지방에서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아마코(尼子) 집안이었고, 다른 하나는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에서부터 북규슈에 걸쳐 세력을 떨치던 오우치(大內) 집안이었다. 두 대국에 사이에 끼인 소영주 모리 모토나리가 살아 남기 위해서는 고도의 외교적 수완이 필요했다.

1531년에는 아마코 하루히사(尼子晴久)와 형제의 맹약을 맺었지만 1537년에는 돌연 손을 끊는다. 그리고 반대편인 오우치 요시타카(大內義隆)에게 큰아들 타카모토를 인질로 바치고 그 휘하에 들어갔다. 아마코 집안이 모토나리의 배신에 치를 떨며 보복을 결심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결국 1541년 가을 아마코 집안은 3만 대군을 이끌고 모리 집안의 본거지 코오리야마에 쳐들어갔다. 그러자 오우치 집안의 다이묘 요시타카가 그의 부하 스에 하루카타(陶晴賢)에게 1만의 군사를 주고 모리 가를 돕도록 했다.

그런데 하늘이 모토나리를 도운 것인지 아니면 모토나리가 하늘의 뜻을 읽은 것인지, 아마코세 군대는 큰 눈을 맞아 보급로를 끊겼고, 결국 모토나리의 계략에 빠져 참패했다.

이것을 호기로 생각한 오우치 가는 아마코 가의 본거지인 이즈모(出雲)로 너무 깊게 추격했다가 함정에 걸려 대패를 한다. 모리 집안을 사이에 두고 벌인 전투는 주고쿠 양대 패자들이 모두 약화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 기회를 틈타 모토나리는 곧바로 타케다 씨를 멸망시키고 아키 지방을 장악했다.

이후 모토나리는 점점 더 그 세력을 넓혀나가 서국의 나가토(長門), 스오(周防), 이와미(石見), 아키(安藝), 이즈모(出雲), 빙고(備後), 빗츄(備中), 비젠(備前), 미마자키(美作), 오키, 호우키, 다지마(坍磨), 이요 등 13개국을 수하에 둘 정도로 그 세력이 확대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우치 집안의 근거지인 야마구치를 공격해 결국 오우치 집안을 멸망시켰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을 모리 집안의 당주로 세웠던 이노우에 집안을 제거하고, 자신과 의형제를 맺었던 아마코 집안을 배신했으며, 자신이 다이묘로 섬긴 오우치 집안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들 또한 망설임 없이 정략의 도구로 삼았다.

절대 권력의 가신이 되거나, 혹은 끊임없이 모략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고독한 패자’ 모리 모토나리가 선택한 생존 방식이었던 것이다.

takhj@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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