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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의 本來無一物이[br]참선으로 이끌었죠

기자명 법보신문

광주 참선모임 이끄는 조선대 김 인 경 교수

<사진설명>1982년 오랜 방황을 하고 있던 김인경 교수는 우연히 친구를 따라 간 선방에서 평생의 스승인 종달 이희익 선사를 만났고, 그의 푸른 안광은 김 교수로 하여금 평생 참선수행자의 길을 걷도록 했다.

조선대 미술대학 김인경(慧頂, 53) 교수는 미술계의 주목받는 중견 조각가다. 해남 대흥사의 초의 스님 동상도 그의 작품이며 특히 지난해에는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선정하는 2004 올해의 예술상 시각예술부문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그가 개인 선원까지 마련해가며 20년 넘게 참선정진을 하고 있는 선객임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특히 『무문관』 48관문을 모두 투과한 참선의 ‘고수’라는 사실은 더욱 그러하다.

중견작가이자 참선 ‘고수’

김 교수가 수행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지난 82년, 대학 때 친구를 따라 처음 선방을 찾으면서부터다. 당시 무종교였던 그가 선뜻 친구를 따라 나선 건 암울하고 황량했던 시절 술과 온갖 시름으로 오랫동안 방황하고 있던 탓도 있었지만 대학시절 선배와의 도시탈출 여행 중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 들었던 육조 혜능 스님의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의 충격 때문인지도 몰랐다. 본래 한 물건도 없다는 구절은 70년대 초 휴교령이 반복되던 압제의 시대 패배감에 가득한 그에게 희열에 가까운 후련함과 수행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심어주었던 까닭이다.

대학친구가 김 교수를 데리고 간 곳은 서울 목동의 한 재가선방이었다. 어두컴컴한 실내, 한 노인이 나오며 그를 쳐다보았다. 김 교수는 그 순간 정신이 확 나갈 것 같은 깊은 충격을 받았다. 그 노인의 눈에서 내뿜는 푸른 코발트빛 안광이 자신을 향해 내리꽂혔기 때문이었다.

종달 이희익 선생. 일본에서 오랜 세월 뼈를 깎는 수행정진으로 임제종 법통을 이은 그는 1965년 선도회(禪道會)를 조직해 입실지도하는 등 재가의 간화선풍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선사였다. 이후 김 교수는 그곳에서 좌선하다가 자신의 차례가 되면 입실을 하고는 했는데 그에게 스승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입실 방에만 들어서면 진땀이 흐르고 입이 딱 붙어버렸으며, 마치 발가벗겨진 채로 끌려와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김 교수는 결국 ‘단념 잘하는 내 성격에 뭐 그렇지’라며 두 달만에 포기하고 말았다. 그렇게 한 동안을 보냈는데도 불쑥불쑥 선방의 모습이 떠오르고는 했고, 가끔 꿈에서도 스승이 나타나 아무런 말없이 바라보기도 했다.

84년 겨울, 그는 마침내 이번에는 절대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각오로 다시 목동선방을 찾았다. 그러나 역시 스승은 무섭게 느껴졌다. 그러나 화두에 집중하면 할수록 그 역시 조금씩 바뀌어갔다. 마치 앓던 이가 쏙 빠지는 기분, 그를 옭죄던 세상이 부드럽게 풀어지고 장작개비처럼 뻣뻣하던 마음이 아늑히 풀려옴을 느꼈다. 또 든든해지는 아랫배의 힘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토록 두려웠던 스승의 멱살마저 잡아 집어 던져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었다.

이희익 선사 만나 인생 전환

끝이 보일 것 같지 않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선은 그에게 한 줄기 빛이었다. ‘위없는 깊고 깊은 미묘한 법, 백천만겁 오랜 세월 만나기 어려워라(無上甚深微妙法 百千萬劫難遭遇)’라는 경전 구절보다 김 교수의 마음을 더 적절히 표현하는 말이 있을까? 그토록 엄격하게만 보이던 스승에게서 한없이 깊은 자비가 느껴져 왔다. 오로지 스승 한 분만 믿고 대들고 물러서고 했으며, 참선 중에 너무 좋아 킥킥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스승 앞에서는 모든 게 안심이었다. 스승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것이며, 행여 스승이 죽으라고 한다면 당장 그 자리에서 머리를 돌바닥에 내칠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스승으로부터 무문관 48개 공안 하나하나를 점검 받고 있던 김 교수는 그 무렵 광주에 있는 조선대에 자리를 잡게 됐다. 무문관은 그 공안을 모두 투과할 경우 옛 조사들의 뱃속을 훤히 들여다보게 될 뿐 아니라 1701가지의 공안을 하나로 꿰뚫을 수 있는 안목을 갖추게 된다고 일컬어지는 만큼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검수도산(劍樹刀山)’의 난관들이었다.

<사진설명>김교수는 참선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참선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이런 까닭에 스승은 늘 화두참구가 마치 빨갛게 달군 쇠구슬을 삼킨 것과 같아서 토해 내려 해도 토해낼 수 없는 경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는 매일 새벽 다섯 시 참선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을 비롯해 밥을 먹을 때나 길을 걸을 때나 조각을 할 때나 잠자리에 들 때조차 머리 속에서는 화두가 떠나질 않았다.

그런 김 교수가 스승으로부터 점검을 받기 위해 매주 토요일마다 서울로 향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심지어 차표가 없을 때는 이른 새벽 서울로 향하는 시장상인의 차를 얻어 타고 가기도 했다. 가족이나 동료교수들도 토요일이면 으레 그가 서울 가는 날로 여겼다. 그렇게 몇 해 동안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노력한 결과 마침내 그는 스승으로부터 무문관을 모두 통과했다는 인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이제 김 교수 홀로 나아갈 수 있을 만큼 공부가 됐다는 그에 대한 스승의 믿음이었다.

그러던 1990년 6월 6일, 제자들의 공부를 위해 전심전력을 기울이던 스승이 마침내 입적했다. 김 교수는 자신을 떠받치던 큰 기둥이 일시에 무너지는 듯 했고 하루아침에 어미 잃는 망아지가 된 것 같았다. 그러나 하염없이 슬퍼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입적하기 1년 전 스승이 그에게 광주에서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참선 지도를 해보라는 마지막 당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좁은 연구실에서 대학원생에게 참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특히 94년 지금 살고 있는 담양군 장산리 대나무 숲속에 작업실과 함께 선원을 짓고 나서는 이곳에서 토요철야정진 등 대학생들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꾸준히 참선을 지도해오고 있다.

선방 마련해 일반인 지도

모든 이들이 서로 도반이 되어 이끌어주고, 끝없이 맑은 강물처럼 열반의 바다로 흐를 날을 꿈꾸는 김 교수. 선도회 광주지부 지도법사로 죽는 날까지 초발심으로 정진해나가겠다는 그는 오늘도 진리에 목말라 하는 이들의 도반이 되어 ‘선이란 일상을 떠나지 않고 나를 지극히 보고 나를 잊는 일’임을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담양=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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