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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예석 철거 주장 이젠 재고해야”

기자명 법보신문
  • 기고
  • 입력 2006.01.02 12:00
  • 댓글 0

특별기고 - 석굴암 원형에 대하여

첨차석 홈 선명…“홍예석 위치 확인”
입술덧칠 흔적 없어…“채색설 근거 미약”


미술사학자 성낙주 씨는 최근 20세기 초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사진을 입수, 본지에 공개했다. 이 사진 엽서는 그 동안 석굴암 원형과 관련해 학계에서 논란이 돼 왔던 홍예석의 유무, 본존불 입술 채색 시기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료 평가되고 있다. 본지는 성낙주 씨가 공개한 석굴암 사진과 그의 주장을 특집으로 게재한다. 편집자주

석굴암에 귀 기울이면 하늘과 땅을 휘어잡는 무비의 교향악이 들려온다. 이 경이로운 석조사원에 구현된 통일적인 미의 율법을 발견할 때마다, 모두 서른여덟 분의 성상(聖像)의 손가락이나 지물(持物) 하나하나에 담긴 심오한 상징과 의미를 깨우칠 때마다 주체하기 어려운 감동과 전율이 온몸을 휩싸온다. 감히 말하건대, 석굴암의 그 우주적 울림을 듣는 일 이상의 황홀한 체험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석굴암이 창건된 지 새해로 1,255주년. 연화대좌 위의 부처님과 주벽 및 감실의 여러 성상(聖像)들은 그 유장한 세월을 진리와 자비와 미의 빛살을 베풀어 이 땅의 무명(無明)을 밝혀왔다. 그리고 지난 세기말에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공인되어 우리 겨레의 보배에서 전 인류의 보물로 격상되기도 했다.
그러나 석굴암은 여전히 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지금부터 1세기 전 도괴 직전의 피폐한 몰골로 재등장한 이래 연주자들의 부단한 연찬이 뒤따랐지만, 엇갈리는 주장으로 우리의 석굴암 이해에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켜온 면도 없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희망찬 병술년 새아침에 20세기 초의 빛바랜 사진 한 점〈사진1〉을「법보신문」에 공개한다. 석굴암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분들과 함께 석굴암의 진실을 한 톨이라도 더 건져내기 위함이다.

1차보수 공사 이전 사진

가로8.4cm×12.5cm의 이 작은 사진이 무엇보다 반가운 까닭은 초기 사진 가운데 조선인의 모습이 유일하게 포착된 점이다. 기존의 사진들에는 일본 관원(官員)만이 보일 뿐인데, 사진 속의 인물은 검은 도포에 갓을 쓰고 수염까지 기른 중년의 조선인 사내이다. 그래서 총독부 등의 관(官)이나 사진전문회사에서 대량 제작한 이전 사진들에 비해, 이 사진은 순수한 개인의 기념사진으로 이 한 장 외에는 없을 것이다.

강인한 인상의 이 인물이 누구인지 궁금한데, 일단 승려는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그 표정이나 당당한 자세에서 단순한 관광객으로도 보기 어려운데, 그렇다면 석굴암과 어떤 특별한 관계에 있는 인물은 아닐까. 이와 관련해 떠오르는 것이 그 즈음으로부터 약 20년 전에 해당하는 1891년의 중수기록을 담고 있는 〈토함산석굴중수상동문(吐含山石窟重修上棟文)〉이라는 편액이다. 현재 동국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 편액에는 조순상(趙巡相)이라는 인물이 주축이 되어 완전히 퇴락해 산짐승의 소굴이 되다시피 한 전각을 일으켜 세웠다고 되어 있다. 또한 그 무렵 석굴암이 ‘조(趙)가네 절’로 불렸다는 자료도 있고 보면, 구한말 혼란기에 석굴암은 조씨 집안의 원찰로 보살핌을 받고 있었을 것이다. 구한말 의병들의 활동 등으로 승려들이 불국사 등지로 피신해 석굴암이 비어 있었다는 말이 있지만, 당시의 사진들을 비교해 보면 연화대좌까지 차 있던 흙더미와 기왓장들을 치우거나 눈덩이를 쓸고, 또 쓰러지려는 판석들 위에 묵중한 돌덩이로 지질러놓아 붕괴를 방지하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누군가의 지속적인 관리가 따랐음을 알 수 있는데, 그렇게 볼 때 사진 속의 주인공은, 무너져 가는 석굴암을 안타깝게 지키던 ‘조순상’의 후손 등 그 집안사람일 개연성도 아주 없지 않다.

아무튼 이 사진에는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이 숨어 있는데, 첫 번째는 이른바 ‘석굴암원형논쟁’의 핵심 논란거리인 홍예석(虹霓石)에 관해 보다 명확한 해석이 가능해진 것이다. 알다시피 기존 사진들은 본존불의 정면상을 촬영한 경우가 전부인데 비해, 이 사진은 전실의 남쪽 석축 바깥에서 위의 인물에 카메라 앵글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이전의 사진들에서는 사각지대(死角地帶)에 숨어 있던 부분이 일부 드러났는데, 특히 우측 돌기둥 위의 첨차석이 눈길을 끈다. 〈사진2〉에 보이는 무지개돌은 그동안 학계 일각의 힐난을 한 몸에 받아왔는데, 요지는 일제가 1차 보수공사 때 본존불의 시야(視野)를 가리려는 악의에서 얹은 것으로 우리 손에 의한 1960년대 보수공사에서 그대로 존치해 두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사진3〉과 같은 일본 신사(神社)의 입구를 지키는 도리이의 누끼를 모방했다는 주장까지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사진의 우측 첨차석의 단면을 보면, 양끝이 귀처럼 뾰족이 솟아 있는 대신 중앙부위는 낮게 깎여 홈을 이루고 있는데, 바로 그 부분이 홍예석이 걸쳤던 자리로 추정된다. 마침 주실 돔 지붕의 함몰된 구멍[穴]을 통해 햇빛이 내리 꽂혀 그 부분이 더욱 생생한데, 기존의 사진들은 정면에서 촬영한 탓에 그 부분은 희미한 흔적만이 비치는 정도였다. 아마도 최초의 보수책임자는 바닥에 퇴적된 흙더미 속에 깨진 채로 파묻혀 있던 원래의 홍예석을 발굴해서 그 모양대로 다시 깎아 시설했을 것이다. 그때 불국사 연화교와 칠보교 사이를 잇는 무지개다리의 석재는 큰 참고가 되었을 것으로 짐작되거니와, 만약 홍예석 자리가 아니라면, 거기에 그런 홈을 파낸 데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이 따라야 한다.

또 한 가지, 이 사진을 통해 답을 찾을 수 있는 것으로 이른바 채색설(彩色說)의 타당성 문제이다. 수년 전 KBS의 〈역사스페셜〉에서 상세하게 다룬 바 있지만, 20세기 초의 여러 사진들에는 특히 본존불의 입술에 짙은 물감이 칠해져 거의 시커멓다. 그런 사진들을 증거로 원래부터 본존불이나 전체 성상이 단청처럼 화려한 칠을 입고 있었으리라는 주장이 비등했던 것이다. 사실, 채색설은 돈황 등 중국의 많은 석굴사원에도 불상들에 원색의 향연이 베풀어져 있어 아주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지만 이 사진을 보면, 본존불의 입술에 물감 흔적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한편 늦은 시기의 사진들 대개가, 돌기둥과 주벽의 판석들이 빈틈이란 없을 정도로 낙서로 가득 차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사진들의 본존불은 어김없이 입술이 짙게 칠해져 있다. 따라서 본존불의 입술은 재발견 당초에는 깨끗했으나, 호사가며 관광객이 한창 불어나던 와중에 덧칠된 것이라는 이야기가 성립된다. 창건 때부터 그러했다는 게 아니라, 적어도 1910년경 석굴암이 재발견된 시점에는 채색이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이 사진의 촬영 연대는 언제쯤일까. 대략은 일제가 1913년부터 착수한 제1차 보수공사로부터 훨씬 앞선 시점, 곧 1910년경으로 추정된다. 그 증거는 깨끗한 상태의 쌍석주와 판석들이다. 기존사진들에는 거기에 수학여행단 등의 낙서가 온통 새카맣게 뒤덮여 있으며, 나중에 낙서를 지워내고 흔적만 남은 사진들도 여러 장 전한다. 다만, 오른쪽 하단에 ‘石窟庵(석굴암)의 舊態(구태)’라는 글자는 훗날 다시 인화하는 과정에서 유리 원판에 새긴 추기로 보인다.

사진 속 조선인 관리인으로 추정

예토(穢土)를 정토(淨土)로 가꾸려 애쓴 우리 고대인들. 그들은 뭇 목숨을 사랑했고, 아름다움을 사랑했다. 현실의 영역에서, 혹은 미의 영역에서 가없는 사랑과 헌신을 실천했다. 원효는 그러한 삶의 태도를 ‘화쟁(和諍)’이라는 말로 표현했거니와, 잘남과 못남을 떠나 모두가 고유의 제 목소리를 잃지 않고 더 큰 하나로 어우러지는 대동세상이 그의 꿈이었다. 그리고 그의 화쟁사상은 마침내 경주 토함산 자락에 불멸의 돌꽃 한 송이로 새롭게 태어난다. 신라 경덕왕대의 위대한 건축가 김대성이 원효의 화쟁사상을 한낱 돌덩어리들에 불어넣어 석굴암이라는 〈미의 천체도〉를 완성한 것이다.

새해 아침, 토함산 석굴암 앞에는 무변무제의 겨울 하늘 아래 동해바다가 출렁거린다. 돌아서 부처님께 오체투지를 올리나니, 부처님이시여. 새해에는 이 민족과 이 나라에 지혜와 용기와 축복의 감로(甘露)를 내려주소서.

미술사학자 성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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