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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자유론-Ⅲ

기자명 법보신문

높은 법복 벗고 낮은 자리로 내려온 ‘小性居士’

삼승의 사람들 태워 일승 언덕 오르기 위해
승복마저 벗고 삼계의 옛 집으로 돌아왔네
세속서도 맑고 깨끗한 행은 결코 잃지 않아


<사진설명>이규보가 원효대사를 찬탄한 글. 일연 스님 작품.

한국불교에는 큰 병폐가 하나 있습니다. 불·법·승(佛法僧) 할 때 승가라는 것은 사부대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출가 남녀, 재가 남녀 모두가 해당됩니다. 그런데 이를 한국어로 번역할 때 거룩한 스님이라고 번역해, 30년간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한다고 노래로 불러왔습니다. 그 후로 스님들은 신도들을 저 밑바닥으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철저히 잘못된 것입니다. 언어가 사람을 규정해버린 것입니다.

원효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를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승복을 입고 있어 거추장스럽고 자유롭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출가와 재가, 그 어느 한 쪽에도 머무르지 않는 지혜로운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금강삼매경의 “비록 출가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재가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대목은 원효의 출가와 환속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이 구절에 대해 원효는 말했습니다.

“경전에서 이 두 모습에 있지 않으며 비록 출가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재가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한 것은 도속이변(道俗二邊)의 상에 떨어지지 않기에 변(邊)을 떠나는 훌륭한 이익이다.”

또한 그는, “비록 法服은 없더라도 聖果를 얻는다”고 한 경전의 구절을 “敎門에서 제정한 계율에 구애를 받지 않고 능히 제 마음으로 도리를 판단하고 소연히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지만 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自在의 훌륭한 이익”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출가와 재가, 혹은 道俗 두 가지 모습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원효의 이 말은 그의 還俗에 대한 그의 생각을 엿보게 해줍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에게 의미 있는 것입니다. 출가자나 재가자라는 구별 없이 붓다는 “가족생활을 이끌면서도 나의 가르침을 훌륭하게 실행하여 드높은 영적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수없이 많다”고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청정한 행은 산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세속에 살더라도 맑고 깨끗한 행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원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맑고 깨끗한 행(梵行)이라 함은 이 사람의 형상이 비록 세속의 모습을 해도 마음이 일미(一味:道俗을 합친 말)에 머물러, 이 일미로써 일체의 맛을 포함함에 비록 모든 맛, 즉, 풍진 세속의 더러움에 발 디디더라도 일미의 맑고 깨끗한 행을 잃지 않는다.

세속에 발붙이고 살면서도 청정함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마치 처염상정(處染常淨:더러운 곳에 처하되 항상 깨끗하다)하는 연꽃의 모습과도 같은 것입니다. 원효의 말처럼, “연꽃은 진흙물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원만히 향기롭고 초졸하여 온갖 아름다움을 두루 갖추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원효는 바람 부는 세상의 거리,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전개되는 삶의 현장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때 7세기 전쟁 통에 정신이 없을 때입니다. 그가 일찍이 벗어나고자 했던 삼계(三界)의 옛 세속으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佛性의 실현은 出世間을 통해서만 실현되지는 않습니다. 금욕적인 생활로 자기를 지키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이고 진취적이며 창조적인 삶을 통해, 세상 속에서, 현실 속에서 불성은 실현되는 것입니다.

“정계(正戒)에 머물면서 교만한 자는 소선(小善)에는 완전하지만 대금(大禁)을 범한 경우로 전복위화(轉福爲禍)가 된다”는 『보살계본지범요기(菩薩戒本持犯要記)』의 이야기처럼, 적은 善에 머물러 만족할 일이 아니라 우리들 가슴속 보배를 꺼내어 세상에 쏟아 놓는 적극적인 실천행이 중요한 것입니다.

원효는 비록 거사의 차림과 광대의 모습으로 돌아왔을망정 그는 이미 옛날의 그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일찍 속복을 벗어버리고 출가자의 길을 갔듯이 돌아올 때도 미련 없이 승복을 벗어버리고 왔습니다. 원효는 40대 초반에 이미 소성거사(小性居士)라고 하면서 높은 콧대를 스스로 꺾고 낮은 곳으로 임했던 것입니다. 황량한 세속의 거리로 되돌아온 소성거사, 그 모습은 밖으로 드러난 것일 뿐, 그는 이미 옛날의 원효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사람이 비록 외모가 못생겼더라도 만약 보배로운 영락으로 그 몸을 장식하면 모든 사람이 존경하고 부러워한다.”

보살들의 영락은 공덕의 상징입니다. 보살은 고해의 뗏목이자 어두운 거리의 등불이며, 험한 세상의 다리입니다. 그리고 보살은 커다란 수레(大乘)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그 수레에 태우고 거친 광야를 지나 저 피안의 언덕으로 실어다 주기 때문입니다.

원효는 말했습니다. “삼승의 사람들을 태우고 일승의 저쪽 언덕에 이르게 하기 때문에 큰 다리라고 한다.” 이를 두고 만해(萬海)는 “당신은 행인, 나는 나룻배”라고 노래했습니다. 이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기 위해 오는 사람들을 우리는 보살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큰 다리도 있고 외나무 다리도 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다리입니다. 한 선생으로서 다리가 돼야 합니다. 강단에 서서 돌아서서 학생들이 비난한다면 그것은 형편없는 다리입니다. 아니 다리가 아니고 그 다리 때문에 학생들이 모두 빠져죽습니다.

부모 또한 다리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부모를 통해 저 곳으로 건너갈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는 다리이기도 하고, 수레이기도 하고, 배이기도 합니다.

원효는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다니면서 「금강삼매경론」을 저술했다고 전합니다. 이것은 매우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그래서 그를 불러 각승(角乘)이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저술에는 수레라는 표현이 가끔 보입니다. 보살은 “일체의 지혜를 가득 실은 보배로운 수레를 타고 삼계의 옛집으로 돌아오고”, “신통한 보배 수레를 타고 더 넓은 광야에 노닌다”고 했던 등이 그 예입니다. 또한 원효는 수레에 대해서 『허공장경(虛空藏經)』을 인용하여 설명한 바 있습니다. 대중을 피안의 세계로 실어 나르고자 하는 보살은 먼저 수레에 이상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수레는 튼튼한가? 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同事)의 사섭법이 곧 네 개의 바퀴에 해당합니다.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 불사음(不邪淫), 불망어(不妄語), 불양설(不兩舌), 불악구(不惡口), 불기어(不綺語), 불탐욕(不貪慾), 부진에(不瞋), 불사견(不邪見) 등의 열 가지 착한 행은 바퀴살입니다. 수레의 네 바퀴는 말할 것도 없지만, 바퀴살 하나라도 완전하지 못하면 수레는 피안에 이르기 전에 고장 날 것입니다.

견고한 마음이자 변함없는 마음인 굴데빗장은 이상이 없는가? 수레를 끌고 갈 마소는 자애로운 마음〔慈〕, 남의 고통을 제거해 주려는 마음〔悲〕, 남의 기쁨을 함께 하려는 마음〔喜〕, 집착을 버린 평등한 마음〔捨〕등의 사무량심을 갖추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수레는 누가 몰 것인가? 그는 참다운 선지식인가? 참다운 인생의 스승이 아니고서 어떻게 대승이라는 수레를 몰고 갈 수 있다는 말인가? 수레를 언제 출발시킬 것인가? 철모르는 사람이 그 때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철든 사람은 계절을 아는 사람이고, 기후를 아는 사람이며, 출발의 시간을 아는 사람입니다.

피안으로 향해 가는 방향은 정확한가? 바른 견해[正見], 바른 생각[正思], 바른 말[正語], 바른 행동[正業], 바른 생활[正命], 바른 노력[正勤], 바른 마음 수행[正念], 바른 집중[正定]의 팔정도에 의지하지 않고는 피안으로 가는 바른 길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수많은 대중을 실어 나를 수레는 튼튼해야 하고, 그 수레를 끌고 갈 마소는 잘 길들여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수레를 몰고 갈 이는 지혜로워야 하고 현명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많은 사람들을 안전하고 확실하게 피안으로 싣고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레를 끌고 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사진설명>원효의 「금강삼매경론」.

그러나 원효는 말했습니다. “본각(本覺) 중에는 세속을 비치는 지혜가 있고, 모든 착한 일을 생길 수 있게 한다”고. 그것은 마치 자석이 바늘을 끌어당기듯, 일부러 생각을 내지 않더라도 힘과 쓸모가 있다고도 했습니다. 원효, 그는 분명 수레를 몰만한 선지식, 많은 사람들의 스승이었습니다.

정리=탁효정 기자 takhj@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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