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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용가위 하나로[br]‘걸망의 자유’ 얻었죠

기자명 법보신문

10여년간 9000시간 봉사
자비의 가위손 박 순 희 씨

<사진설명>한 달에 20일 이상 자원봉사를 하는 박 씨는 ‘봉사란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단순한 보람을 넘어 자신의 참다운 가치를 찾는 일’이라고 말한다.

“할배요, 머리 다 짤랐심더. 어떤니껴?”
“음! 내 맘에 쏙 들어. 10년은 더 젊어진 것 같구먼. 동네 할머니들이 나 좋다고 졸졸 따라다니면 어떻게 하지? 허허허.”
“할배가 좋다니까, 지도 참말 좋심더.”

1월 3일 서울 송파구 인성장애인복지관 3층 집단프로그램실. 막 머리를 다듬은 노인 한 분이 흐뭇해하며 미용봉사자 박순희(57) 씨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15평 남짓한 공간, 박 씨를 비롯한 미용사들의 분주한 손놀림과는 달리 파마를 말은 뒤 전기헤어캡을 쓰고 있거나 가만히 순번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표정이 여유롭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어디에선가 우스개 소리라도 나오면 싸한 파마약 냄새보다 진한 웃음꽃이 번져나고는 했다.

9년 전 이곳에서 처음 미용 자원봉사를 시작한 박 씨.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동안 단 한 차례도 빠지지 않았기 때문인지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따뜻함과 신뢰가 묻어나고, 굳이 그에게 머리를 맡기려고 하는 단골손님도 여럿이다. 다소 내성적인 탓에 말수는 그리 많지 않더라도 오랜 세월 보여준 그의 한결같음 때문이다.

장애인 등 찾아다니며 매일 봉사

박 씨의 수첩은 이런저런 간단한 메모들을 비롯해 한 달 동안의 자원봉사 스케줄로 빽빽하다. ‘나눔의 집, 심장요양원, 인성복지관, 삼전복지관, 강동구민회관, 강동성심병원, 영락요양원, 영락노인복지관, 영락베스코아, 암사새누리, 성내복지관, 성내참사람, 방이장애인복지관…’ 거기에 장애인인 사촌 시누이네 집까지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는 박 씨. 대부분 머리를 깎아주는 미용봉사지만 정신지체 아이들을 먹이고 씻기는 봉사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한 달에 20일 이상은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늘 봉사활동으로 이뤄진다.

지난해 10월 서울시가 주관한 제4회 서울사랑시민상 봉사부분에서 장려상을 받기도 한 박 씨가 봉사를 시작한 것은 힘겨웠던 그의 삶의 이력에서 비롯됐다. 경북 의성이 고향인 그는 어른들 뜻에 따라 당시 군생활을 하던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다. 간단한 예식만 올린 채 시댁에서 생활하던 그는 남편의 제대와 함께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손바닥만한 방에 선물로 들어온 바둑판을 밥상으로 삼아야 할 정도로 궁핍한 나날들. 그런 상황임에도 막내아들인 남편은 시골의 부모님을 서울로 모셔야겠다고 했다. 남편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라야 한다고 믿으며 살아왔던 박 씨는 이번에도 여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시작된 시부모님과의 생활. 어른들과 아이들 뒷바라지에 하루가 어떻게 흘렀는지 모를 정도의 숨 가쁜 날들이 이어졌고, 한 해 두 해 세월도 시위 떠난 화살처럼 마냥 흘러갔다. 그러던 지난 89년 시아버님이 돌아가시자 치매끼가 있던 시어머니의 증세는 급격히 악화됐다. 식사를 하고 바로 돌아서서는 밥 안준다고 호통 치거나 작은 일에도 버럭버럭 화를 내기 일쑤였다. 거기에 대소변마저 못 가리게 돼 하루 5~6번씩 목욕을 시켜드려야 했다.

하지만 91년 11월,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박 씨는 해방감은커녕 깊은 상실감에 젖어들었다. 정성을 다해 모신다고 생각했건만 그 밑바닥에 자신도 모르는 원망과 미움이 있었던 것일까? 한없는 죄책감이 생살을 파고드는 듯 아팠고 훌쩍 커버린 아이들도 더 이상 박 씨를 필요치 않아 보였다. 갑작스레 많아진 시간들은 오히려 그를 끊임없는 절망의 밑바닥으로 끌어내렸다. 밤새 눈물이 그치지 않았고 한숨은 하루하루 늘어만 갔다. 더 이상 산다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보였다.

그 무렵 친구의 권유로 알게 된 불교는 박 씨의 유일한 위안처가 되어주었다. 집착과 욕망을 모두 떨쳐버리고 걸림 없이 살았던 수많은 고승들. 걸망하나 짊어지고 산천을 구름처럼 떠도는 그분들의 삶이 한없이 부러웠다. 박 씨는 고승들의 책을 닥치는 대로 읽어나갔다. 스님들의 세상을 바라보는 깊은 통찰과 깃털처럼 가벼운 자유로움이 박 씨의 숨통을 틔어주었다. 박 씨도 무엇인가를 찾고 싶었고, 오랜 고민 끝에 선택한 것이 바로 미용사. 가위 하나 배낭에 넣고 세상천지를 떠돌며 그동안 쩔을 대로 쩐 마음의 때를 깨끗이 씻고 싶었다.

서울시민상 봉사부문 수상도

96년 6월, 박 씨는 용기를 내 남편에게 ‘휴가’를 달라고 요청했고 남편도 선뜻 이에 동의했다. 그렇게 해서 다니게 된 복지관 미용기술강좌, 박 씨는 날마다 도시락을 싸들고 복지관으로 향했다. 몇 달을 결석 한 번 않고 다니는 그에게 젊은 강사는 미용사 자격증을 따볼 것을 권유했고 박 씨는 ‘내가 어떻게…’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침내 도전장을 던졌다. 그러나 기술도 기술이지만 40대 중반을 훌쩍 넘긴 박 씨에게 필기시험은 거대한 장벽이었다. 외국어로 된 생소한 언어들은 아무리 외우려 해도 맨 손으로 물을 움켜지듯 주르륵 새나갔다. 첫 번 시험에서의 탈락, 그러나 박 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낮에는 복지관에서 실기준비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밤늦도록 이론공부를 했다. 그렇게 해서 97년 2월 필기시험에 마침내 합격할 수 있었고, 두 달 뒤 실시된 실기시험에는 단번에 합격했다.

난생 처음 ‘자격증’이란 걸 갖게 된 박 씨. 그는 가정주부인 이상 세상을 떠돌 수는 없겠지만 이 자격증으로 무언가 새로운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때마침 주변의 요청으로 봉사활동을 시작한 박 씨는 이게 바로 내가 가야할 길이라고 확신했다. 자신이 누군가를 위해 베풀 수 있다는 사실이 한없이 감사했기 때문이다.

장애-노인들은 또 다른 내모습

박 씨는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머리를 깎아주고 파마를 해주었다. 그러면서 박 씨는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자신의 가녀린 몸조차 가눌 수 없는 이들이 있었고, 평생 땀 흘리며 살아왔건만 여전히 끼니 걱정을 하며 살아야 하는 노인들도 많았다. 박 씨는 그동안 자신을 괴롭혀왔던 일들이 한순간 부질없이 느껴졌다. 또 처음 봉사를 할 무렵 느꼈던 ‘나는 괜찮고 우리 아이는 저러지 않으니 다행이다’라는 상대적인 만족감을 넘어, ‘나는 지금까지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고 아파했는가? 나는 또 얼마나 많이 남들과 비교하며 스스로를 상처 입혀왔던가?’하는 참회의 눈물이 흘렀다. 자신이 깎아드리고 파마를 해 드리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내 부모님이고, 몸이 불편해 밥 한 숟가락 입에 떠 넣지 못한 아이들이 바로 내 자식이자 또 다른 내 모습이었던 것이다.

처음 인성장애인복지회관에서 시작한 봉사활동은 날을 거듭할수록 늘어나 경기도 광주와 하남 일대까지 넓혀졌다. 가위, 빗, 앞치마, 토시 등 미용도구가 담긴 배낭을 짊어지고, 1시간 이내는 늘 걸어 다니는 박 씨. 두 발로 걸어 다닐 수 있는 힘이 남아있는 한 미용가위를 계속 잡겠다는 박 씨는 ‘봉사란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단순한 보람을 넘어 자신의 참다운 가치를 찾는 일’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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