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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천송반야경』 ⑥

기자명 법보신문

비어있음 아는 집착 없는 사랑이 반야

위대한 보살들을 체험한 일본 교토 유학시절의 일이다. 한 때 나는 교토의 가모가와라는 강 옆에 산 적이 있다. 여름날이었던가, 바람도 쐴 겸 자전거를 타고 강가로 나갔다. 좁은 길이었지만 자동차도 다니고 자전거도 달리는 그런 길이었는데, 그날따라 한적했다.

얼마 달리지 않아 나는 눈앞에 웬 물체가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 자전거를 급히 멈췄다. 내려서 들여다보니 이름 모를 작은 새가 피를 흘린 채 퍼덕거리고 있었다. 날개가 부러진 모양이었다. 순간 난감해졌다. 이렇게 내 눈에 띈 이상, 이것도 인연인데 어찌 모른 체 갈 수 있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궁리를 해도 별 묘책이 없었다.

손을 대지도 어쩌지도 못한 채 그만 집으로 돌아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순간, 파출소에 신고하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주저함도 없이 전화기를 들어 동네 파출소에 연락을 했다.

“저, 길에 새가 피를 흘리고 있는데 어떻게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엉뚱한 전화에 황당해 하리라고 짐작하면서 가슴 조이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자, 전화를 받은 경찰은 말했다. “아~ 혹시 가모가와에서 보셨습니까? 그러잖아도 전화가 자꾸 걸려 와서 저희도 고민 중입니다. 조금 전에 동물원에 연락했으니 아마 동물구급대가 곧 도착 할 겁니다.”

순간 가슴 가득히 뿌듯한 느낌이 밀려왔다. 가난하고 고된 유학생활에 지쳐가던 내가 맛본 우연한 환희였다. 여전히 세상에는 위대한 유정들이 붓다의 길을 가고 있구나!

후에 나는 반야경을 독송하면서 아마도 이런 것이 일종의 삼매일 거라고 확신을 하게 됐다. 뿌듯하고 성스러운 그런 삼매. 붓다의 나라란 이렇게 해서 드러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확신하건데 이 순간의 환희는 이후의 그 어떤 학문적 탐구나 수행체험에서 얻은 기쁨을 능가했다. 또한 결코 망각되는 일도 없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내가 세상의 유정들을 신뢰하는 커다란 이유가 되고 있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그날 여러 사람에게서 반야가 일어난 듯하다.
사람들이 쯧쯧! 하고 혀만 차고 지나갔다면, 그건 그저 흔한 측은지심이다. 또한 죽어가는 새를 통해 원인과 결과를 알아챘다면, 그건 단지 메마른 헤아림일 뿐이다. 팔천송반야경에서 그토록 경계하는 성문과 벽지불의 마른 지혜.

반야란 헤아림을 세우기 이전에 저절로 드러나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그런 반야가 있고 나서 행해지는 노력이야 말로 완전한 삶(바라밀)의 시작이다. 그래서 팔천송반야경에서는 반야바라밀에 의지해 비로소 다섯 바라밀이 완성된다고 설하는 것이다.

어쨌든 팔천송반야경을 통해 본다면 보살이 무상정등각을 얻으려는 확고한 이유가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그가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고 연민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오직 저들 생존에 허덕이는 유정들을 위한 한 줄기 완전한 빛이 되어 주고자 붓다의 능력을 사모하게 되는 것이다.

유정을 사랑하고 연민하는 자의 힘은 너무도 위대하기에 그 밖의 어떤 노력도 초월해 진정한 깨달음에 도달케 하니,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수부띠여, 보살마하살이 일체의 유정을 접해 그들을 깊은 사랑의 마음으로 포용한다면, 저때 보살마하살은 번뇌에 속하는 것과 마라에 속하는 것을 초월하고 성문의 계위와 벽지불의 계위를 초월해 삼매에 들게 되느니라. 게다가 그는 번뇌의 멸진에 도달해 버리는 일도 없이 위없는 완성인 공성을 숙지하게 되느니라.(팔천송반야경, 제20장)

반야가 오직 번득이는 지혜만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큰 착각이다.
반야지혜를 얻어 세상을 압도하고 윤회를 넘어 저 높은 경지에 오른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소승의 목표일 따름이다. 반야는 결코 지적인 능력의 부림이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아름답고도 성스러운 마음의 현현이다. 다시 그것은 일체유정을 버리지 않겠다는 마음이요, 그러면서도 일체법이 비어있음을 잘 알아 집착 없이 사랑하겠다는 마음인 것이다.

김형준 박사(경전연구소 상임연구원)
jhanakim@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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