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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동국대가 걸어온 길 上

기자명 법보신문

첫 근대교육기관… 한국불교사 전환점 마련

1906년 불교계 인재양성이라는 교계 선각자들의 발원으로 설립됐던 명진학교를 그 뿌리로 두고 있는 동국대가 올해로 개교 100주년을 맞는다.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민주화 등 근현대 격동기 속에서도 동국대는 ‘불교 정신을 사회에 회향하겠다’는 건학 이념을 바탕으로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했으며 우리 사회의 변화를 주도해왔다. 이에 법보신문은 동국대의 지난 100년을 되짚어 보고, 우리사회 각 분야에 동국대가 미친 영향과 향후 또 다른 100년의 향방을 제시하는 특별기획을 격주로 연재한다. 편집자

불교계 첫 근대 교육기관인 명진학교가 문을 연 것은 한국불교사에 있어 새로운 전환점을 의미했다. 이는 암울했던 조선 불교 500년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근대적 신학문을 통해 새로운 인재를 양성함으로써 불교가 한국 사상계의 기둥역할을 했던 옛 명성을 되찾겠다는 근대화의 첫 발을 내디딘 일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신불교 운동전개 ‘명진’ 개교

명진학교가 개교할 무렵인 1906년, 이미 불교계에도 일제의 검은 손길이 곳곳에 닿아 있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침투한 일본 불교는 전국 도처에 일본식 사원을 건립했고 조동종, 일련종 등 각 종파에서 파견한 승려들이 대거 상주하면서 한국불교의 근간을 흔들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한국불교계 내에서는 자성의 목소리와 흘러나왔고 원흥사 불교연구회를 이끌던 홍월초, 나청호 등 일부 선각자를 중심으로 신불교 운동이 전개됐다. 이들이 제일먼저 시작한 것은 근대적 교육기관을 설립하는 것. 기존의 전통강원 교육 방법으로는 급변하는 시대에 대처하지 못할 뿐 아니라 불교의 진흥을 꾀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뜻이 모여 마침내 1906년 5월 8일 교계 첫 근대식 교육기관인 명진학교를 열 수 있었다.

<사진설명>사진① 불교계몽 활동에 앞장섰던 순회강연단.
사진② 불교전수 학교 학생들의 등교모습.
사진③ 첫 전문교육기관으로 거듭난 혜화전문 전경.
사진④ 동국대학 1회 졸업생(1948년)


명진학교는 우선 신학문을 가르쳐 포교 인재를 양성한다는 목표 아래 그 교육과정도 불교관계 과목보다는 외국역사, 외국어, 농업, 이과, 수공 등 일반학과에 비중을 많이 뒀다. 이 같은 교육방법은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됐고, 신학문을 배우려는 학생들이 구름처럼 몰렸으며 학구열 또한 매우 뜨거웠다. 그 중 가장 두각을 보인 인물은 권상로와 한용운이었다. 특히 권상로는 학생자치모임인 광학회를 결성, 전국의 사찰과 불자들을 대상으로 계몽강연회와 토론회를 개최하면서 불교 근대화를 위한 초석을 다졌다. 또 한용운은 훗날 독립운동을 주도했을 뿐 아니라, 『조선불교유신론』을 통해 한국불교의 개혁을 주도했던 인물이었다. 이처럼 한국불교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던 명진학교는 그러나 설립 이후부터 수많은 장애를 겪어야만 했다.

개교 1개월만에 일부 보수 승려들의 신학문에 대한 불만들로 명진학교의 교육체계에 대해 늘 비판이 가해졌고, 또 원흥사 관리권을 둘러싸고 불교 내부 갈등의 소용돌이에서 흔들려야만했다. 하지만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불교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선각자들의 대의를 굽히게 할 수는 없었다.

이후 명진학교는 3년제의 불교사범학교로 전환했다. 그러나 이시기 일제는 사립학교령을 반포하고 한국불교 내부의 분열을 유도해 원종 종무원의 분단을 촉발시켰다. 이로 인해 불교사범학교는 개교 이후 처음으로 휴교를 맞는 비운을 겪게 됐다. 더욱이 불교사범학교는 이후 일제에 의해 고등학교 수준의 교육기관인 불교고등강숙으로 격하되는 치욕을 겪게 됐다. 이후 불교계 젊은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불교고등강숙을 다시 전문교육기관으로 격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세게 제기됐지만, 당시 일제에 눈치를 보던 보수 승려들은 이를 철저히 묵살했고, 오히려 불교고등강숙을 폐교 조치했다. 그러나 불교혁신운동을 펼치던 젊은 엘리트들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1915년 불교계는 다시 불교중앙학림을 설립하고 불교 근대교육기관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한용운 등 선각자 배출

한용운 등 불교계 선각자들의 개혁정신과 민족의식에 영향을 받은 중앙학림 학생들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끊임없이 일제에 항거하며 한국불교 전통에 내려오는 호국불교의 정신을 대외에 선양했다. 하지만 불교중앙학림도 전문교육기관은 아니었다. 일제의 끊임없는 방해와 이에 눈치를 보던 불교종단의 나약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앙학림의 젊은 학생들은 동맹휴교를 강행하며 자신들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처럼 청년 불교도의 끊임없는 요구와 투쟁이 계속되자 불교종단도 결국 전문교육기관을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1930년 혜화동에 중앙불교전문학교를 개교했다. 이로써 불교전문학교는 당시 연희, 보성 전문과 함께 명실상부 3대 사학으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불교전문학교의 개교는 학문에 있어서도 괄목성대한 성과를 이뤘다. 학생회를 중심으로 불교관련 각종 학술대회가 개최됐으며, 불교종합잡지인「일광(一光)」을 통해 철학, 문학, 불교와 관련된 왕성한 논문들이 속속 발표되기도 했다. 이후 1940년 불교전문학교는 혜화전문으로 개명하고 그 명성을 이어갔지만, 1944년 5월 일제에 의해 강제 폐쇄됨으로써 불교활동도 그 운명을 같이 하는 듯 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독립운동가-문학가 등 저명인사


역대 이사장은


명진학교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동국대를 이끈 역대 이사장들은 불교개혁가를 비롯해, 독립운동가, 문학가, 정치가 출신의 교계의 덕망 있는 인물들이었다.

초대 이사장으로 선임된 월초 스님은 1905년 원흥사에서 불교연구회를 조직, 신불교 운동을 펼치며 명진학교 개교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었다. 또 광복 직후 혼란한 시기에 혜화전문학교 이사장에 오른 김법린 이사장은 중국 남경대와 프랑스 파리대학 등지에서 철학을 전공한 근대 대표적 학자로 유명하다. 독립운동가이자, 학자, 정치가로 명성을 드높였던 백성욱 박사도 1954년부터 1961년까지 동국대를 이끌었던 이사장이었다. 이와 함께 국내 대표적 국어학자이자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과 한글대사전 등을 발간한 바 있는 이희승 박사도 동국대 이사장을 역임한 바 있다.

다음은 역대 이사장 명단
△1대 월초 스님 △2대 회광 스님 △3대 호암 스님 △4대 혼성 스님 △5대 김상호 △6대 류재환 △7대 지암 스님 △8대 허윤 △9대 원찬 스님 △10대 김법린 △11대 원찬 스님 △12대 김재선 △13대 지암 스님 △14대 박성하 △15대 백성욱 △16대 석진 스님 △17대 이희승 △18대 희진 스님 △19대 서운 스님 △20대 영암 스님 △21대 벽암 스님 △22대 벽안 스님 △23대 김갑수 △24대 월하 스님 △25대 영암 스님 △26대 녹원 스님 △27대 진경 스님 △28대 녹원 스님 △29대 정대 스님 △30대 현해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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