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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용주사 대웅전 후불탱화 누가 그렸나

기자명 법보신문
“인물묘사 김홍도 수법과 유사” 주장에
“ 25 화승설” - “20세기초 제작설” 반박


용주사 대웅전 후불탱화. 이 불화는 용주사 창건 시 그려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이 불화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불화가 명암법을 쓰지 않는 것에 비해 서양 명암기법을 전 화면에 사용한 실험적인 그림으로 18세기 한국불화 양식의 특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돼 왔다.

그러나 이 불화는 대부분의 불화와는 달리, ‘누가 언제 어떤 발원으로 그렸다’는 화기(畵記)가 없어 제작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로 인해 학계에서는 이 불화가 이 시기 대표적인 화가였던 ‘김홍도에 그려졌다는 설’과 같은 시기 ‘25인의 화승들에 의해 그려졌다는 설’, ‘19세기 말 또는 20세기 초에 그려졌다는 설’이 팽팽히 맞서 오랫동안 논쟁을 펼쳐왔다.

학계에서 용주사 대웅전 후불탱화의 제작자가 김홍도라는 주장을 제일 먼저 제기한 인물은 최순우 박사였다. 최순우 박사는 1965년 「풍속과 세태의 증인-김홍도」라는 논문을 통해 “용주사 대웅전 후불탱화의 제작자는 김홍도”라고 주장했다. 그는 논문에서 “단원의 ‘해상군선도(海上群仙圖)’에 나오는 신선들의 모습과 비슷한 인상이 있고, 긴 손가락과 손 등을 풍만하게 표현한 점이 너무나 닮아 있다”며 “따라서 이 불화의 제작자는 김홍도”라고 주장했다. 이후 1969년 이동주 박사도 이 같은 견해에 뜻을 같이 했고, 이로 인해 학계에서는 통설로 굳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1970년대 용주사 대웅보전 닫집에서 ‘삼세상원문(三世像願文)’이 발견되면서 이 같은 통설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원문은 용주사 창건의 배경과 불사의 참여자들을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현재의 ‘삼장보살도’나 ‘감로왕도’의 화기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다. 즉 ‘삼장보살도’와 ‘감로왕도’가 당시 25인의 화승들이 조성했다는 점을 미뤄 ‘후불탱화’ 역시 이들 25인의 화승들이 조성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 같은 자료를 근거로 1976년 문복선 씨를 비롯해 80년 홍윤식 교수가 이에 동조했다. 하지만 이 주장도 후불탱화가 삼장보살도나 감로왕도의 채색법과 양식이 달라 18세기말 동일 양식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반론이 잇따랐다.

이후 1990년대 들어 기존의 김홍도 제작설과 김홍도의 지휘아래 25인의 화승들이 공동으로 제작했다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이 또한 학계에 그대로 수용되지는 못했다.

1999년 동국대박물관 김경섭 연구원은 「용주사 삼불회정의 연구-김홍도 작설에 대한 재고」라는 논문을 통해 기존의 주장은 조목조목 반박했다. 김 연구원은 논문에서 “김홍도 제작설은 문헌적 자료보다는 불화의 형태적인 분석에 근거한 것일 뿐 그 근거는 미약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삼불회와 칠성도는 구도, 형태, 채색법 등이 서로 일치하고 있어 동일 화사에 의해 그려졌다는 점은 별 이의가 없지만 이들 불화가 삼장보살도나 감로왕도의 화사들과 합작으로 조성됐다는 절충적인 결론도 무리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 연구원에 따르면 불화에서는 보기 드물게 복숭아를 든 인물 등에 대한 묘사를 통해 김홍도 제작설을 주장하지만, 이는 19세기∼20세기 불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으로 범어사 팔상전 영산회상도가 그 대표적 작품이라는 것이다. 또 김 연구원은 이 불화의 전체적인 양식을 검토하면 이 불화가 19세기 말 또는 20세기 초에 나타난 조선불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김 연구원은 “현재 용주사 대웅전에 조성된 후불탱화는 창건 당시 제작된 불화가 아니라 여러 번의 중창 불사를 통해 20세기 새롭게 조성된 불화”라고 강조하면서 이에 대한 증거로 “불화에 ▲20세기초 유행했던 현실주의 양식이 반영된 점, ▲20세기 초 불화에 도입되기 시작했던 서양 명암법이 반영된 점, ▲1911년 용주사가 경기 이남의 총본산으로 되면서 대대적인 중수불사가 이뤄진 점 등”을 제시했다.

아직까지 용주사 대웅전 후불탱화에 대해 김홍도의 지휘아래 25인의 화승들이 조성했다는 주장이 다소 앞서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재고해야 한다는 주장도 학계에서는 만만치 않게 제기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권오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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