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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선생님’ 공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기자명 법보신문

정년퇴임 후 수행길 오른 진 정 순 교장

“바깥으로만 향하던 마음의 화살을 이제는 안으로, 안으로 다잡아 넣고자 합니다. 청산처럼 말없이, 창공처럼 티 없이, 탐욕도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고자 합니다.”

한 사람의 스승을 떠나보내는 자리, 아쉬움과 고마움, 추억과 그리움이 가득한 자리에서 연분홍 꽃수가 놓아진 고운 한복 차림의 스승은 헤어짐의 인사말 대신 나옹 스님의 가사를 화두처럼 던졌다. 2월 14일 관악구 봉천동의 작은 연회장에서는 강산이 네 번 바뀌고도 남을 44년의 세월을 교육자로 살아온 진정순 교장(63·당곡초등학교) 선생님의 퇴임식이 열렸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아이들의 모습과 생각 속에 젊음을 묻고 물과 거름을 주는 농부처럼 학교와 교육을 가꾸어 온 스승의 퇴임식은 44년의 세월을 함께 지켜본 동료 선생님들과 진 교장을 ‘스승’이라 부르는 젊은 선생님들, 그리고 스승의 퇴임을 아쉬움 속에 지켜보는 제자들로 발 딛을 틈 없이 가득 찼다.

아쉬움 속에 옛 추억을 이야기하는 친구, 자식을 가르쳐준 선생님에 대한 감사의 말을 전하는 학부모, 교장선생님과의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선생님들. 진 교장을 보내는 이들의 소외는 제각각이었지만 참석자들은 교단을 떠나는 그를 향해 한결같은 그리움을 전했다. 하지만 정작 헤어짐의 주인공인 진 교장의 얼굴에서는 ‘떠날 때 다시 만날 것을 믿는’ 듯 엷은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진 교장을 오랫동안 지켜본 이들은 한결같이 그가 이제는 편안한 휴식과 함께하며 노년에 접어든 인생을 좀 더 즐기길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숨 돌릴 틈 없는 긴장과 잰걸음이 그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진 교장을 소개하는 가장 흔한 수식어 가운데 하나는 ‘고 조태일 시인의 부인’이다. 군사정권의 서슬이 숨통을 조이고 광주의 통곡마저 속으로 삼켜야했던 시대를 숨죽이는 침묵대식 저항의 시로 살았던 조태일 시인의 곁이 그의 자리였다.

조태일 시인의 아내…숨가쁜 삶

다섯 번의 투옥과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남편을 대신해 생계를 꾸리고 세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오롯이 그의 몫이었다. 세월이 바뀌어 비로소 조태일 시인은 저항시인, 민주투사로 평가되었지만 “그때 죽은 사람도 있다”며 살아생전 끝끝내 5·18 유공자 신청을 거부하던 남편은 1999년 홀연 세상을 떠났다.

“감옥을 들락거리던 남편을 대신해서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아이들을 키워야 했습니다.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고 의지할 무엇인가가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부처님 법을 만나게 됐습니다.”

진 교장에게는 별다른 불교와의 인연담이 없다. 결혼하고 보니 시댁의 종교가 불교였고 마음 졸이며 살다보니 부처님께 의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만난 불교의 가르침은 진 교장으로 하여금 지식을 전하는 교사가 아닌 마음을 키워주는 스승이 되도록 이끌었다. 부처님의 사상을 어떻게 교육에 접목시키는가가 그의 화두였던 셈이다.

“요즘 아이들은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힙니다. 바쁘고 지식은 많지만 보고 들은 것을 생각하고 분석하는 힘은 점점 약해지는 듯합니다. 아이들에게 정체성을 키워주고 스스로 판단하는 힘을 키워주기 위해서는 자신을 돌아보는 교육이 절실합니다.”

아이들의 생각하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 진 교장이 선택한 방법은 명상교육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하던 영어 방송을 대신해 짧고 감동적인 동화를 들려주고 아이들로 하여금 감상과 생각을 기록하도록 했다. 불교의 오계와 성경의 십계명을 토대로 아이들이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바른생활 지침도 만들었다. 하지만 진 교장은 아이들에게 불교신자가 되길 강요하진 않았다. 교육 현장이 선교나 포교의 공간으로 오용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 진 교장의 소신이다.

장학사로 재임하던 90년대 후반 초등학교에서 벌어지던 각종 종교 편양 사건에 대해 진 교장은 여지없이 자신의 소신을 관철시켰다. 관할 학교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무마하기 보다는 엄정한 교육의 잣대로 바로잡고자 했던 진 교장은 자신보다 선배였던 현직 교장에게 경고 조치를 내리는 단호함을 보이기도 했다.

“종교 의식 아닌 가치 가르쳐야”

교육현장에서는 원칙을 강조하는 진 교장이지만 불자로서 부처님의 법을 전하는 일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이러한 진 교장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탄생한 것이 전국불교스카우트지도자회다. 1991년 강원도 고성에서 열린 스카우트 세계잼버리대회에서 종교시간에 불자 학생들을 지도해줄 선생님이 없다는 사실에 당혹했던 진 교장은 뜻을 함께하는 선생님들과 힘을 합쳐 전국불교스카우트지도자회를 탄생시켰다. 올해 창립 15주년을 맞아 전국에서 700여 명의 선생님들이 가입해 활동하고 있는 불교스카우트지도자회는 어린이-청소년 불자 양성에 대한 진 교장의 희망 그 자체다.

44년의 세월을 가쁜 호흡으로 달려온 진 교장은 정년퇴임을 앞둔 지난 겨울 훌쩍 인도 성지순례 길에 올랐다. 퇴임 후 수행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마음먹긴 했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선택이었다.

“인도에 도착하는 순간 이곳이 부처님의 땅이라는 벅찬 감동과 함께 입에서 부처님을 부르는 소리가 멈추질 않더군요. 그런데 막상 인도의 현실을 눈으로 보니 이 가난하고 거친 땅에서 사셨던 부처님 생각에 가슴이 저려왔습니다. 이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탁발을 하셨던 부처님께서는 공양이나 제대로 하셨을까. 차를 타고 가기에도 버거운 길을 맨발로 걸으시며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 죄송스러울 지경이었습니다. 전법을 위해 그 모든 희생을 감수하셨던 부처님의 자비로움이 떠올라 ‘감사합니다. 부처님’ ‘사랑합니다, 부처님’이라는 말이 잦아들질 않았습니다.”

성지순례를 마친 진 교장은 이제 퇴임 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명확히 알고 있다. 이제는 마음의 스승이 되는 것이다.

“주변 분들로부터 ‘지금까지 그토록 바쁘게 살아왔는데, 정년퇴직하고 나면 허전하지 않겠느냐’ ‘뭘 하겠느냐’는 질문을 수없이 많이 받았어요. 그러면 이젠 대답하죠. 진짜 선생님 되는 공부를 시작하겠다고. 살다가 힘든 일이 생기면 언제든 찾아오라고. 열심히 공부해서 힘들 때 도와줄 수 있는 마음의 선생님이 되겠다고요.”

단기출가로 새로운 출발 계획

<사진설명>가족과 함께 정년퇴임식에 자리한 진정순 교장. 헤어짐의 자리이지만 새로운 만남을 준비하는 진 교장의 얼굴엔 밝은 미소가 가득하다.

퇴임식을 며칠 앞두고 진 교장은 학교에서 마지막 훈화방송을 했다.

“어린이 여러분, 우리는 무엇으로 사물을 볼까요.”

“눈으로요.” “눈이 있어야 볼 수 있어요.”

“마음으로 보아요!”

한 어린이의 대답에 진 교장은 정신이 번쩍 드는 듯 했다. ‘마음으로 본다’는 아이의 대답에 진 교장은 벌떡 일어나 펄쩍 뛰며 박수를 쳤다.

‘그래, 우리 아이들이 드디어 마음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구나.’

44년 교단에서 전해주고 싶었던 것을 이제 아이들 스스로가 깨닫기 시작했다. 정년퇴임을 앞둔 진 교장에게 이보다 더한 선물은 없었다. 퇴임식을 마친 진 교장은 단기 출가나 시민선방 동참을 계획하고 있다. 그 동안의 바쁜 생활을 정리하고 조용히 마음을 닦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다. 그것은 ‘진짜 선생님’이 되기 위한 진 교장의 힘찬 첫 걸음이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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