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3 히에이잔 엔랴쿠지 요카와츄우도오(橫川中堂)

기자명 법보신문

장보고와 엔닌의 천년 넘나든 인연 깃든 곳

<사진설명>엔닌 스님은 당에서 10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온 직후인 848년 히에이잔에 요카와츄우도오를 개창하고 밀교적 성격이 강한 천태교학을 설파했다.

일본 히에이잔의 스님 엔닌(圓仁, 794∼864)은 838년 6월 13일 중국행 배에 몸을 실었다. 15세에 히에이잔에 입산해 사이초 스님의 제자가 된지 30년, 스승이 입적하고도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시기였다. 스승의 뒤를 이어 히에이잔 학당을 지켜왔지만 그는 누구보다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사이초의 천태교학은 여전히 많은 부분에서 미완성인 채 남아있었고, 중국의 최신 이론은 더 이상 수입되지 않고 있었다. 그의 소망은 중국 천태산으로 가서 직접 고승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일본의 천태교학을 완성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인연은 쉽게 맺어지지 않았다. 불혹의 나이를 지나면서 천태산을 향한 그의 갈증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러다 마흔넷이 되던 해에, 천황으로부터 견당사(遣唐使)로 다녀오라는 명을 받았다. 그는 당장 짐을 꾸려 거칠고 먼 바닷길을 향해 나아갔다. 그의 바랑에는 히에이잔 천태종 학승들이 풀지 못한 천태교학에 관한 30가지 의문 ‘미결 삼십조(未決三十條)’와 함께 지쿠젠의 태수가 장보고에게 스님의 안전을 부탁하는 편지 한 통이 담겨 있었다. 당시 중국과 일본 사이의 바다를 건너는 사람이면 누구나 신라인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할 정도로 장보고의 해상 장악력은 그 명성이 자자했다.

마음은 이미 천태산 정상을 오르고 있건만 무심한 바다는 그의 구법 순례를 호락호락 허락하지 않았다. 번번이 배가 좌초되거나 해류를 잘못 타서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오곤 했다. 마치 그의 학문이 회오리바람 속에서 제자리 걸음을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천태산을 향한 그의 열정까지 파도에 밀려나간 것은 아니었다. 배가 부서지고 몸이 물고기의 밥이 되더라도 연기의 법칙이 존재하는 한 우리네 삶은 앞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천태산을 오르는 꿈조차 꾸지 않은 채 구차하게 목숨을 이어간들 그 무슨 소용이 있으랴.’

세 번째 항해 시도 끝에 7월 2일 마침내 중국 양자강 하구에 다다른 그는 황제를 만나기 위해 장안으로 떠나는 사신 일행과 잠시 떨어져 양주 개원사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천태산 순례를 청원했지만 양주도독부는 ‘천태산행은 천자의 칙이 있어야만 허락할 수 있다’며 스님의 요청을 거절했다. 장안에서 돌아온 견당사 일행 또한 당 조정에서 이방인 승려의 천태산행을 불허한다는 비통한 소식을 전했다.

1년이라는 예정된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 금새 귀국 기한이 다가왔다. 마지못해 귀국선에 올랐지만, 도저히 이대로는 일본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를 태운 배가 잠시 해주에 정착하자 엔닌 스님은 견당대사 후지와라에게 “잠시 산중에 숨어 있다가 곧 천태로 향하겠다”며 양해를 구하고 몰래 배에서 내렸다. 하지만 바로 그날 낮 스님을 발견한 당나라 관리는 그의 행색과 어투가 당나라 사람도 신라 사람도 아님을 금새 알아차린다. 결국 신분이 들통나 다시 귀국선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스님의 낙담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스님의 일기에는 당시의 안타까운 심정이 소상하게 기록돼 있다.

‘아직 구법의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이제 빈손으로 배를 타게 되니 탄식만 더할 뿐이다.’

그런데 오대산 문수보살의 가피였을까. 수일 동안 계속 서풍만 불어오고 있었다. 겨우 동풍을 맞아 배를 띄웠으나 스님을 태운 배는 다시 역풍에 밀려서 황해를 건너지 못하고 산둥반도 끝자락 문등현 청녕향 적산촌이라는 곳에 닿게 되었다. 그런데 이곳에 스님의 일대사 인연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공교롭게도 이곳은 중국 내 신라인들의 거주지인 신라방이었고, 여기에는 장보고가 세운 적산법화원이라는 사찰이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라인들의 도움으로 그해 겨울을 적산법화원에서 머무는 동안 엔닌 스님은 신라에서 온 성림 스님으로부터 오대산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오대산이라는 신령스러운 산에는 문수보살이 상주하고 있어, 불법의 근원이며 대성(大聖)의 화처(化處)로 꼽힙니다. 서천의 한 고승은 험준한 길을 넘어 그곳에 갔으며, 당나라 고승대덕들도 그곳에서 도를 얻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이곳에는 법 높은 천태종의 고승들이 많이 주석하고 있습니다.”

순간 엔닌 스님은 스님을 이곳으로 이끈 구도의 열망이 뼛속까지 전해지고 있음을, 그리고 자신을 이곳으로 이끈 인연이 부처님의 가피였음을 느꼈다. 오대산에만 가면 자신도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선재동자처럼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불법체류자 신세인 일본 거지중의 부탁을 중국 관리가 들어주지 않을 것은 자명한 일. 그렇다고 오대산행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스님의 사연을 들은 신라인 관리들은 중국 조정에 로비를 벌여 여행 허가를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드디어 엔닌 스님의 오대산 순례가 시작된 것이다. 순례는 하루에 30∼40리씩 2300리를 걷는 그야말로 대장정이었다.

영릉향의 꽃들이 산 전체에 깊은 향기를 드리우던 늦은 봄, 드디어 일본의 구법승 엔닌은 꿈에 그리던 오대산 대화엄사에 도착했다. 칼날 같은 봉우리가 줄지어 담장을 이루고 계곡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오대산은 참으로 만봉(萬峰)의 중심이었다. 400여개의 탑과 47개의 사찰로 가득한 다섯 봉우리의 땅 곳곳이 보살의 화현이요, 여래장 세계 그 자체였다.

스님은 문수보살과 관음보살이 몸을 나타냈다는 성지들을 순례하면서 천태종의 여러 고승들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결 30조의 의문은 모두 해결했지만, 거기서 만족할 수는 없었다. 역시 최신 학문을 배우기 위해서는 당의 수도 장안을 찾아 기라성 같은 학승들을 만나야 한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다시 장안으로 발길을 옮긴 스님은 그곳에서 천태종 대덕고승들을 만나 지념(止念)의 법을 터득하고 일본에 없는 불경을 필사하는 한편 산스크리트어까지 익히게 되었다. 하지만 스님이 장안에 머문 지 2년째 되던 해인 845년, 당의 18대 황제 무종이 무자비하게 불교를 탄압한 회창폐불(會昌廢佛)이 일어났다. 어느 날 도교의 도사가 무종 황제에게 “공자설(孔子說:공자를 빙자한 참위설)에 이르기를 ‘이씨는 18대에 성운이 다하고 곧 검은 옷을 입은 천자가 나와 나라를 다스린다’고 했는데, 그 검은 옷이 바로 승려들”이라고 말한 데서 이렇게 엄청난 훼불사건이 촉발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대부분의 사원이 파괴됐고 스님들은 강제로 환속조치를 당했다. 엔닌 스님이 주석하던 사찰에서도 불상과 보살상이 땅에 묻히고 경전이 불살라졌다. 엔닌 스님 또한 승복을 벗고 머리를 길러 신분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당나라와의 인연이 다했음을 감지한 스님은 이틀 후 그동안 필사한 불경과 그림 등을 몰래 꾸려 귀국길에 올랐다. 위험천만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봇짐 속에 담긴 불경과 불화가 발각된다면 스님의 목숨도 보장할 수 없을 터였다. 가까스로 초주에 다다랐지만 스님이 타려고 했던 일본 배는 이미 떠나버리고 없었다. 결국 스님은 또다시 신라인들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신라인들은 스님을 위해 배 한 척을 급하게 축조했다. 이 배를 타고 귀국길에 오른 스님은 청해진을 경유해 고국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스님이 일본을 떠난 지 꼭 10년이 되던 해였다.

다시 히에이잔으로 돌아온 그는 중국에서 배워온 천태 교학을 후학들에게 전파했다. 당시 당에서 유행하고 있던 최신식 밀교를 익힌 스님은 밀교적 성격이 강한 일본식 천태교학을 완성시켰다. 후인들은 그를 일본의 천태종을 완성시킨 대성자(大成者)라고 추앙해오고 있다.

히에이잔 요카와츄우도오(橫川中堂)는 엔닌 스님이 당에서 돌아온 직후 개창한 곳이다. 이곳 히에이잔에는 엔닌 스님과 장보고의 인연을 기린 후대인들의 비석이 세워져있다. 엔닌 스님에게 있어 청해진 대사 장보고는 죽어서도 잊지 못할 은혜를 베푼 사람이었지만, 두 사람은 평생 동안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다만 엔닌 스님이 남긴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장보고에게 보낸 스님의 편지가 남아있어 두 사람의 인연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지금까지 삼가 만나 뵙지는 못하였습니다만 오랫동안 높으신 인덕을 들어왔기에 흠모의 정은 더해만 갑니다. 엔닌은 옛 소원을 이루기 위해 당나라에 체류하고 있습니다. 미천한 몸 다행하게도 대사님의 본원의 땅(적산법화원)에 머물고 있습니다. 감사하고 즐겁다는 말 이외에 달리 비길만한 말이 없습니다. (중략) 언제 만나 뵐지 기약할 수 없습니다만 다만 대사를 경모하는 마음 더해갈 뿐입니다.”

당시의 상황에서는 엔닌 스님이 일방적으로 장보고의 은덕을 입고 신라인들의 도움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인과의 도리는 시공을 넘어 삼세 시방세계에 걸쳐져 있는 법. 김부식의 『삼국사기』이후 그동안 한국사에서 정치적인 반란자로 평가돼온 장보고의 삶이 엔닌 스님의 순례행기를 통해 오늘날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다. 얼마 전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던 최인호 소설 『해신』 또한 엔닌 스님의 순례행기에서 그 모티브를 얻었다고 하질 않는가. 업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오고간다는 사실이 재차 확인되는 예가 아닐 수 없다.

동아시아 바다를 제패한 장보고의 인품은 아무 연고도 없는 이방인들을 넉넉히 끌어안을 정도로 넓었고, 그의 자비행은 노예 신분으로 추락한 신라인들을 구출해냈다. 또한 장보고의 영향력은 동아시아를 잇는 바다를 망라하는 해상장악력을 갖고 있어서, 그의 활동으로 인해 수많은 이들이 해적들의 분탕질을 피해 바다를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이 엔닌 스님의 편지에 의해 그대로 확인되고 있으니, 이제는 장보고가 엔닌의 신세를 지고 있는 셈이다.

<사진설명>엔닌 스님은 귀국 후 문수전을 짓고 히에이잔에 오대산 문수보살 신앙을 전파했다.

우리 일행을 엔랴쿠지로 인솔한 동국대 김호성 교수는 엔닌 스님의 구법행과 신라인들과의 인연을 이야기하며 “나는 일본인들에게 사과 없는 용서를 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한다. 솔직히 나는 당시 그 말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순례를 마치고 돌아와 엔닌 스님의 글을 읽으면서 무엇이 우리의 삶, 나아가 한국인과 일본인들의 역사를 연결시키는지를 어렴풋이 알아차리게 되었다. 은혜가 더 큰 은혜로, 선업(善業)이 더 큰 선업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엔랴쿠지에서 만난 엔닌 스님은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법계는 시공을 초월한 중중무진의 화엄만다라임을 엔닌 스님과 장보고의 인연이 천년 세월을 넘어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고 있다.

takhj@beopbo.com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