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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천송반야경』 ⑫ - 끝

기자명 법보신문

반야란 자비-믿음으로 일으키는 등불

이상, 모두 11회에 걸쳐 초기대승불교의 대표적인 성전인 팔천송반야의 가르침을 살펴보았다. 아마도 많은 부분이 대승의 반야를 이해시키려는 필자의 주관적인 경험과 입장에 기반한 설명이었지만, 사실, 초기대승경전에서 설해지는 반야란 비유와 개념을 통해서 접근해 감이 최선이다. 왜냐하면, 반야를 주제로 삼는 팔천송반야에서조차 정작 반야가 무엇인지 직설적으로 표현되는 경우란 드물며, 그렇다고 소승불교의 범주 내에서 이해되는 반야를 그대로 적용해서는 결코 대승의 반야를 눈치 챌 수가 없기 때문이다.

팔천송반야를 통해 짐작되는 반야란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새롭고도 긍정적인 자각이다. 소승의 반야가 수행의 힘으로 이뤄내는 명철하고도 냉정한 이성의 발현이라면, 초기대승불교의 반야는 순수하고도 지고한 마음 그 자체이다. 그것은 사랑할 줄 아는 우정의 마음이요, 측은함에 눈물 흘릴 줄 아는 연민의 마음이기도 하다. 곧, 가장 인간답고 유정다운 마음이 현현하는 증상을 반야라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이제까지 지적인 탁월함과 완성도를 가지고 반야를 선포하던 소승적 수행주의 내지는 학문주의적 태도와는 전혀 다른 입장이다.

이렇듯 반야는 너무나도 평범한 마음이기에 팔천송반야의 후반부에서는 반야의 내용을 결론짓기보다는 차라리 그리로 다가가는 길(道)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그렇다! 고오타마 붓다의 깨달음이 고도(古道)를 발견한데에 있었듯이, 여전히 불교의 가르침은 어디까지나 길을 전제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 길이란 다름 아닌 일체법, 곧 나를 둘러싼 세계 그 자체이다. 나에게 즐거움도 주고 고통도 주는 이 모든 세상일이 바로 반야의 길임을 밝혀줌으로써 이제까지 일으키던 대립적 갈등과 혼돈을 멈추게 함과 동시에 괴로움을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전환을 마련해 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반야의 길을 걷는다고 함은 곧 나를 둘러싼 세계를 진지하게 상대함을 가리킨다. 이점이 소대승의 반야가 엇갈리는 커다란 이정표이리라.

이제 대승의 가르침이 되면 붓다의 특성을 이룸에 결코 개개의 수행능력이 우선시되는 일은 없다. 붓다의 길을 보고 그 길을 묵연히 잘 가려는 자의 마음이 곧 반야의 시작이다. 나아가 반야를 완성 짓는다[반야바라밀]고 함은 다름 아닌 일체법에 대한 애착과 편견을 가차 없이 버리는 일이며, 일체법에 대해 모순 없이 이해하고 포용하는 일을 말한다.

일체법은 집착의 대상이 아니라고 알고, 일체법은 우정에 의해 약효를 내는 약임을 알고, 일체법이란 사랑하고 연민하고 기뻐하고 집착을 여의는 삶 그 자체임을 알고, 일체법은 기대하거나 원망하거나 하는 대상이 아님을 눈치 챌 수 있다면, 비로소 반야를 완성하는 길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붓다에 대한 투철한 믿음 역시 반야의 완성을 향한 길임을 밝힌다.

붓다의 지혜로 충분히 깨우쳐져 있기에 이를 깨닫는 것을 통해 반야바라밀로 나아가야 하느니라.[팔천송반야, 제29장 도달의 길]

다시 내 자신이 일으키는 정신적 모순을 제거함이 곧 붓다의 나라를 밝히는 일이니, 이는 진정한 의미의 보살의 수행도가 된다.

만약에 수부띠여, 보살마하살이 일체의 자기기만을 버리고, 사량을 버리고, 나태를 버리고, 남을 우습게 보는 태도를 버리고, 나라는 집착·인간이라는 집착을 버리고, 이득이나 명예만을 추구함을 버리고, 탐욕을 버리고, 성냄을 버리고, 들뜸을 버리고, 의기소침해짐을 버리고, 질투를 버리고, 인색함을 버리고, 붓다의 길을 의심치 않는 삶을 통해 반야바라밀에 다가가 비로소 반야가 무엇인지를 눈치 채고 깨닫고 바라볼 수 있다면, 이제 그가 붓다의 나라를 실현하고 붓다의 특성을 성취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리라.[팔천송반야, 제29장 도달의 길]

결론짓자면, 반야란 우리들 삶 속에서 자비라는 기름과 믿음이라는 심지가 어우러져 일으키는 마음의 등불이다. 이 등불에 의지해 어둡고 고달픈 삶을 헤어나가 끝내 붓다의 나라를 이루라는 위대한 메시지를 전해주려 함이 바로 팔천송반야의 가르침이다. 이는 이제껏 수행가이드에 치우치던 붓다의 가르침이 비로소 온전한 종교의 옷을 입는 순간이라고나 해야 하리라.

김형준 박사(경전연구소 상임연구원)
jhanakim@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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