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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묘룡이 수호하는 화엄도량 부석사-6

기자명 법보신문

1300년 화엄법륜 이어온 福善의 도량

화마 없는 터전…『화엄경』 강설, 구름처럼 사람 몰려
해동화엄 근본 도량…가람 배치 미타정토 따라 건립


<사진설명>태백산 영주 부석사의 전경. 의상 대사는 선묘룡의 신통으로 이곳에 화엄도량의 터전을 열었다.(사진제공=영주장애인복지관장 도륜 스님.)

영주의 봉황산 중턱에 화엄종의 근본도량인 부석사가 세워진 것은 신라 문무왕 16년(676) 2월이었습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로 1330여 년 전의 일입니다. 『송고승전』의 의상전에 전하는 부석사의 창건설화는 이렇습니다.

귀국 후에 산천을 편력하던 의상은 고구려의 먼지와 백제의 바람, 그리고 마소의 접근도 어려운 곳에 이르러 말했습니다. “땅이 신령스럽고 산이 수려한 이곳은 참으로 법륜을 굴릴 곳인데도 어찌하여 권종이부(權宗異部)의 무리들이 500명이나 모여 있을까?” 의상은 또 조용히 생각했습니다. “대화엄교는 복선(福善)의 땅이 아니면 흥하지 못 한다.” 그때 항상 의상을 따라다니면서 수호하고 있던 선묘룡(善妙龍)이 의상의 생각을 몰래 알고, 곧 허공중에서 큰 신변을 일으켜 넓이 1 리나 되는 커다란 바위로 변하여 가람 위를 덮고 떨어질듯 말듯 했습니다. 놀란 여러 승려들은 갈 바를 모르고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습니다. 의상은 드디어 이 절에 들어가 겨울에는 양지바른 곳에서 여름에는 그늘에서 『화엄경』을 강의함에 부르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이 설화를 역사적 사실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상징적 의미를 새겨볼 필요는 있습니다. 한 마리 용으로 변신하여 의상이 탄 배를 호위하며 신라로 왔던 선묘, 그는 이제 의상의 부석사 창건을 돕기 위해 부석(浮石)으로 변하여 권종이부(權宗異部)의 승려들을 축출했다는 이야기에는 선묘룡이 의상의 화엄전교를 돕고 화엄도량을 수호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권종이부를 법상종(法相宗)에 속한 승려들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마는 이 또한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화엄종의 진실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꾸며진 이야기일 것입니다. 전국의 산천을 두루 편력하던 의상이 무엇 때문에 궁벽한 이곳에 머무르고자 했을지 궁금합니다.

의상은 이곳을 전쟁의 화를 피하고 조용히 수도할 수 있는 터전으로 판단했던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것은 ‘고구려의 먼지나 백제의 바람이 미치지 못하고 말이나 소도 접근할 수 없는 곳’을 찾아다니던 의상이 이곳이야말로 참으로 법륜을 굴릴 좋은 터전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의상은 누구 못지않게 전쟁의 참화를 목격했습니다. 서기 668년에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킴으로서 일단 삼국통일은 이루어졌지만, 백제나 고구려 유민들의 신라에 패한 반항이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는가 하면, 부석사가 창건되던 바로 직전까지도 당나라와의 전쟁은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을 염두에 둔다면 의상이 왜 영주 땅에 부석사를 창건하려고 했는가 하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석사는 조정의 뜻을 받들어서 창건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정의 뜻을 필요 이상으로 주목하여, 부석사의 창건이 마치 국가의 정치적 목적, 특히 전제왕권의 강화에 부응하기 위한 것인 양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의상의 일차적 목적은 화엄교의 전파에 있었습니다. 부석사가 창건된 문무왕 16년은 당나라와의 오랜 전쟁도 끝나 평온을 찾은 때입니다.

따라서 이때에 와서 절을 지어도 좋다는 국가의 승인을 얻었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부석사를 창건해서 『화엄경』을 강의함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는 기록은 의상이 부석사를 중심으로 화엄교학을 강설하고 제자들을 교육했던 사실과 부합합니다. 궁벽한 태백산에서의 그의 교화는 신라 사회에 널리 소문이 퍼져서 국왕이 그를 더욱 공경하게 되고 가난한 백성들의 입에까지 그의 이름이 오르내릴 정도였습니다. 부석사에서의 의상의 화엄전교가 성황을 이루었음은 의상이 태백산에서 불법을 전해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던 사실이나, 국왕이 그를 공경하여 토지와 노비를 이 절에 주려고 했다는 것 등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의상을 도와서 천리 이국땅에 오게 된 선묘의 넋은 133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부석사를 지키면서 살고 있으니, 이 절의 무량수전 밑에 묻어 있는 석용이 그것입니다. 아미타불 바로 밑에서부터 머리 부분이 시작하여 선묘정에 그 꼬리 부분이 묻혀 있다고 하는 이 석용은 선묘화룡의 설화를 한층 더 실감나게 설명해 줍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현재 부석사에는 선묘정이 있습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절의 동쪽에 있는 선묘정에 가물 때 기도드리면 감응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 우물에는 선묘룡이 살고 있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선묘의 넋이 변하여 되었다는 부석은 지금도 무량수전 뒤편에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큰 자연 반석으로서 석괴 위에 비스듬히 놓여 있습니다.

지금은 이 반석이 공중에 떠 있다고 믿을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공중에 떠 있지도 않은 돌을 왜 부석이라 하느냐고 따질 필요도 없습니다. 사도에 집착한 무리들을 쫓아내기 위해서 이 돌이 공중에 떠다녔다는 이야기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그만입니다. 지금도 부석사에는 선묘의 상을 봉안한 선묘각이 있습니다.

사찰 경내에 여인상을 모신 경우는 오직 부석사뿐입니다. 그러나 선묘는 세속적인 사랑을 못 잊어 신라까지 따라온 여인은 아닙니다. 해동화엄시조 의상과 화엄의 근본도량을 수호하는 화엄신중으로서 오늘도 부석사를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의상은 정토신앙에 깊이 경도되어 있었습니다. 부석사는 신라 화엄종의 근본도량임에도 불구하고 그 가람배치는 미타정토신앙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부석사의 석단은 일주문에서 무량수전까지 크게 세 구획으로 나누고 구체적으로는 9단으로 구분됩니다.

이는 관무량수경에 토대하는 구품왕생(九品往生)을 의미하고, 안양루(安養樓)를 지나서, 무량수전(無量壽殿)이 이르러 아미타불을 친견할 수 있도록 배치된 것도 정토신앙과 관계됩니다. 남향의 무량수전에 본존불인 아미타불을 동향으로 봉안한 법당의 구조는 일생 서방의 극락세계를 향하여 앉았다는 의상의 정토신앙과도 통합니다. 불상을 모신 건물 안에는 오직 아미타불상만을 조성해 모시고 보처보살(補處菩薩)은 없고, 또한 탑도 세우지 아니했습니다. 이에 대해 의상은 말했습니다. “스승 지엄이 말씀했습니다. 일승(一乘)의 아미타불은 열반에 들지 않고 시방정토(十方淨土)로써 근본을 삼아, 생멸의 모습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화엄경』의 입법계품에서 이르기를, 혹 아미타·관세음보살을 보고 관정수기(灌頂授記)한다는 것은 모든 법계의 보처를 확충하여 보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열반에 들지 않고 보궐이 없을 때이기에 보처보살을 봉안하지도 영탑을 세우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일승(一乘)의 깊은 뜻입니다.” 스승 지엄이 이와 같이 의상에게 전했기에, 의상은 지엄의 뜻을 법사(法嗣)에게 전했고, 또한 원융국사 결응(決凝 : 964-1053)에까지 미쳤습니다.

의상은 오로지 안양(安養)을 희구했기에 평생 서쪽을 등지고 앉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의상조사는 오로지 안양(安養)을 구하여, 평생 서쪽을 등지지 않고 앉았습니다. 그 제자 중에 죄를 범한 한 비구가 있어, 법에 의해 그를 물리치매, 무리들로부터 떠났습니다. 그는 다른 곳에서 유행하면서도 스승을 사모해서 상을 만들어 지니고 다녔습니다. 스승이 그 소식을 듣고 불러서 말했습니다.

“네가 만약 진실로 나를 억념한다면, 나는 일생 동안 서쪽을 등지지 않고 앉는데, 상도 역시 감응할 것이다.”

이에 그 상을 서쪽을 등지게 했지만, 상이 스스로 몸을 돌려 서쪽을 향해 앉았습니다. 스승이 그를 훌륭하게 여겨, 죄를 용서하고 다시 받아들였습니다. 석가여래행적송(釋迦如來行蹟頌)에 전하는 이 이야기로 의상의 지극한 정토신앙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1572년 개판의 염불작법(念佛作法)에는 의상이 지었다는 서방가(西方歌)가 전하는데, 이는 10장의 경기체가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서방가는 후대인이 짓고 의상에 가탁했을 수도 있고, 의상이 지었던 것이 13세기경에 경기체가 형식으로 변화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서방가의 가사 대부분이 소아미타경(小阿彌陀經)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의상은 소아미타경(小阿彌陀經義記) 1권을 저술한 바 있습니다. 서방가는 일승적(一乘的) 정토신앙이 강조되고 있는데, 이 또한 의상의 정토신앙과 궤를 같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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