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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근 스님 “주지는 머슴일 뿐 … 하심이 불교의 힘”

신라 천년 선등 다시 밝힌양양 진전사 주지 마 근 스님


<사진설명>‘농사꾼 주지 스님’으로 통하는 마근 스님은 삼보정재를 아끼려고 나무를 해다 난방을 해결한다.

“어이~, 안에 있으면 어서 나와 보게!”
“예, 스님.”
요사채에서 종무 일을 보고 있던 천수 스님은 주지 마근(馬根) 스님의 목소리에 벌떡 일어나 뛰어나왔다. 공양간 뒤편에 차를 댄 스님은 어느새 트렁크에서 묵직한 자루를 내리고 있었다. 쓰레기다. 여기저기 자주 다니는 스님은 쓰레기더미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특히 태풍이나 장마가 지나간 뒤에는 바닷가에서 쓰레기를 한 짐씩 실어오곤 했다.

“이 앞에 올라오다 주워왔네. 살펴봐서 쓸 만한 것은 쓰고 버릴 것은 소각장에서 태우게.”

자루 안에는 과자봉지, 음료수 병, 철사조각 등이 그득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국수봉지는 없었다. 지난번에는 “오늘 점심공양은 국수로 하자”며 주워온 국수다발을 내밀었다. 진전사 총무이자 상좌인 천수 스님이 마근 스님을 보아온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나는 과연 은사스님처럼 평생을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솟곤 한다. “주지는 사찰의 큰 머슴일 뿐”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스님은 늘 하심하며 일하고, 도지사건 촌부건 격의 없이 신실하게 대하기 때문이다.

실제 마근 스님은 양양, 고성, 속초 인근에서는 ‘진짜 큰스님’으로 불린다. 제3교구본사인 신흥사를 비롯해 백담사, 낙산사, 삼화사 등 큰 사찰의 주지소임을 오랫동안 맡아왔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랜 세월 한결같이 실천하고 있는 자비행이 가부좌를 틀고 장군죽비를 움켜쥔 선방의 큰스님 못지않게 참다운 수행자의 모습으로 대중에게 비춰지기 때문이다.

1968년 2월 부산 범어사에서 고암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한 스님은 이후 선방을 돌며 견성의 문고리를 틀어쥐기 위해 숱한 정진의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몇 해 뒤 스님은 선(禪)과 교(敎)가 둘이 아닌 이상 경전을 깊이 알아야 한다는 큰스님의 권유에 따라 법주사 강원으로 다시 향했다. 마근 스님은 그곳에서 수행은 좌복 위에서만 하는 게 아니라 일상 속에서 이루어지고 단련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 옛날 백장회해 스님이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고 했던 청규를 평생 실천해야겠다고 다짐한 것도 그 무렵이다.

1979년 1월 천년고찰인 양양 명주사 주지 소임을 맡으면서 처음 한 일은 경운기를 사서 사찰 인근의 수천 평 논밭을 일구는 일이었다. 경작하는 이가 없어 황폐해지는 밭에 나가 아침부터 밤까지 땅을 갈고 씨앗을 뿌렸다. 틈틈이 노인들이 농사짓는 곳을 찾아가 논밭도 일구어 주었다. ‘농사꾼 주지 스님’이 밭을 갈아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여기저기서 도와달라는 요청이 잇따랐다. 스님은 단 한 번 거절하지 않고 곧바로 도움이 필요한 곳으로 달려갔다. 연신 고개를 숙이며 고맙다거나 눈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이도 있었다. ‘처처불상(處處佛像) 사사불공(事事佛供)’이라 하지 않았던가. 스님에게는 나이든 농부들이 부처님이었고 농사일과 수행 또한 둘이 아니었다.

25년간 불우이웃에 땔감-물품 보시

스님의 자비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봄부터 가을까지 주민들의 일손을 도운 스님은 겨울이면 쌀, 반찬, 생활용품을 비롯해 땔나무까지 마련해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 일일이 나누어주었다. 이를 위해 틈틈이 불에 탄 나무나 태풍에 쓰러진 나무를 찾아 지게를 지고 산으로 올랐고, 25년 훌쩍 넘는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은 생활습관 중 하나다. 또 폭설이 내릴 때면 미시령, 한계령, 진부령 등을 찾아 눈에 빠진 차들을 견인해 주고 해안가를 돌며 간혹 바닷가에 빠진 차들이 있으면 긴 로프를 이용해 건져주기도 했다.

“잘나봤자 부처님만큼 잘났겄어. 아무리 욕심내도 하루 세끼 먹는 건 마찬가지고. 다 부질없는 일이여. 하심이 그저 제일이지. 수행도 하심이 있어야 허고, 화합도 하심이 있어야 허고, 남을 돕는 것도 하심이 있어야 혀. 하심이 바로 불교의 힘이란 말이여.”

떠받드는 자리, 큰소리 칠 수 있는 자리에 있을 때에도 스님의 소탈함과 검박함은 변함없었다. 자신을 한없이 낮춤으로써 조계종과 다른 종단들로 분열돼 있는 강원 지역 사암연합회를 하나로 묶었다. 신흥사 주지를 맡았을 때는 삼보정재를 아끼려고 기름보일러 대신 나무를 이용하는 화덕 보일러로 모두 바꿨다. 괜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상좌들도 본사 주요 보직에서 제외해 버렸다. 반면 스님은 관내 노인요양원과 복지시설에 대한 투자를 대폭 늘렸고, 틈만 나면 그곳을 찾아 노인들과 장애인 아이들을 보살폈다.

“처음 스님을 따라 장애인시설에 갔을 때였어요. 스님이 밥을 먹는 아이와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장애인 아이가 밥알을 흘리면 그것을 일일이 주워 스님의 입에다 넣는데 어찌나 자연스럽고 애정이 넘쳐 보이는지 친부모라도 저럴까 싶더라고요.” 한 상좌 스님의 말이다.

“한 번은 비를 흠뻑 맞고 오셨더라고요. 여쭈어 보니 어디 다녀오는 길에 큼직한 바위가 도로 위에 굴러 떨어져 있어 그걸 치우고 오셨다고 하더군요. 그냥 피해서 와도 되지만 밤길에 사람들이 다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1시간 이상 비를 맞으며 그걸 치우신거죠.” 또 다른 스님의 말이다.

스님은 늘 일할 준비가 되어있다. 차를 견인할 수 있도록 개조한 승합차에는 낫, 톱, 망치, 드릴, 체인, 용접기, 밧줄, 푸대자루 등 족히 1톤은 됨직한 장비들로 그득하다. 나무를 하거나 차를 견인해주고 주민들 농사일을 거들기 위해 싣고 다니는 필수용품들이다.

수행도량 진전사 중흥 발원

<사진설명>“수행도 화합도 하심이 있어야 한다”는 스님은 강원지역 사암 연합회를 하나로 묶어 불교의 역량을 지역사회로 희향시켰다.

이렇듯 이타행과 소욕지족(少欲知足)의 삶을 사는 스님에게 요즘 뒤늦게 ‘큰 욕심’이 하나 생겼다. 백담사 회주 오현 스님과 정영호 단국대 석좌교수의 원력을 계기로 지난해 6월 복원된 진전사. 한국 선의 시발점이 된 이곳이 장차 한국 선불교에 활기를 불어넣고, 나아가 많은 불자들이 기도와 정진으로 업장을 소멸할 수 있는 여법한 수행도량으로 정착시켜나가겠다는 서원이 그것이다. 매서운 바람이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지나는 설악의 진전사. 그 기나긴 겨울의 끝자락에서 만난 스님의 맑은 미소는 새로운 계절을 알리는 봄의 전령사였다.

양양=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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