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해안 스님의 『해안집』 중에서
40 해안 스님의 『해안집』 중에서
  • 법보신문
  • 승인 2006.03.14 1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불사의 참 의미
여기는 불사를 위해 선남선녀와 스님들이 모이신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불사하는 의미를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어 불사에 대한 법문을 하려 합니다.

세상일은 무엇이나 목적이 있습니다.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밥을 먹고, 추위와 더위를 막기 위해 옷을 입는 것과 같이, 불사를 하는 것도 무엇인가 뚜렷한 목적이 있을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일반적으로 불사라 하면 가사불사, 생전예수, 탱화불사, 인경불사, 불상 조성, 탑사 건립, 수륙재, 종불사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위에서 열거한 것들이 모두 불사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이런 불사를 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다만 복을 짓는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불사를 한다면 맹신이나 미신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사를 시주하는 사람은 가사가 얼마나 어떻게 귀중한 것인가를 알아야 하고, 형상에 주착하지 않는 청정한 마음으로 불사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더러는 깨끗한 신심으로 불사를 하지 않고 한갓 자손의 복을 빌기 위해서, 혹은 선망부모의 왕생극락을 위해서, 혹은 후세의 복을 짓기 위해서, 다 저 잘되자는 마음에서 불사를 하는 이들도 많은 줄로 압니다.

생전예수재도 그렇습니다. 전생 빚을 갚는다고 돈전이나 많이 시주하고 불전의식이나 치릅니다. 그러나 생전에 미리[豫] 닦는다[修]는 것이 ‘예수재’의 뜻인데, 닦는다 할 때 무엇을 어떻게 닦아야 하는지부터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맹목적으로 한다고 해서 뒷일을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탱화불사, 조상불사, 탑사불사, 종불사 등도 복을 바라는 마음이 앞선다면 바른 불사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금강경』에 “보살은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보살은 복덕을 바라는 마음으로 불사를 하지도 않고 자기가 복을 짓는다는 생각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가를 바라고 하는 것과, 하면서도 한다는 생각조차 없는 것과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비교해 보십시오. 한쪽은 필경 미신이나 사도에 빠질 것이고, 한쪽은 무상(無相)을 체득해서 부처가 될 것입니다.

백천강하가 각각 흐름을 달리하지만 모두가 바다로 들어가듯이 불사에도 각가지가 있지만 결국은 성불에 목적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부처님이 고구정녕으로 하신 팔만 사천 법문이 오직 견성성불로 유도하기 위한 방편설이거늘, 이 뜻을 모르는 가련한 중생들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바라보고 있으니 달은 언제나 보게 될는지 참으로 걱정입니다. 나무를 심는 사람은 그 뿌리를 북돋아줘야 하는 것이지 가지나 잎새를 아무리 만지고 보호하여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제까지는 무시겁래로 내려오면서 산과 같이 쌓인 업장을 녹여 없애는 기도불사라든지 또는 불보살의 명호를 부르며 복 받기를 기대하는 불사를 해왔지만 지금부터는 여러분이 직접 부처를 볼 수 있는 정진불사를 해야 할 것입니다.


해안 스님은?
해안(海眼, 1901~1974) 스님은 전북 부안이 고향으로 어린 시절 신동으로 불렸다.

14세 때 유명한 한학지를 찾아 내소사 부근에 왔다가 만허 선사를 만나 불연을 맺었다. 이후 선지식을 찾아 여러 고찰을 찾아다니던 중 백양사의 학명선사 회상에서 은산철벽(銀山鐵壁)을 뚫으라는 화두를 받아 7일 낮밤을 정진하다가 큰 깨우침을 얻었다. 그 뒤 틀을 벗어난 대자유인으로 시(時)와 연(緣)을 따라 중생을 제도함에 추호의 걸림이 없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