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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우촌 전진한 거사(1907~1972)

기자명 법보신문

독립-노동운동 일궈낸 수행자

항일 협동조합운동 결성
효봉-동산-한암 법제자
마지막 순간까지 참선수행
조계종 전 사찰 타종 애도


우촌 전진한 선생은 자주독립과 노농대중(勞農大衆)의 복리증진을 위해 70평생을 불태운 정열적 애국지사이자 지극한 불교 수행자였다.

전진한 거사가 일제치하에 신명을 받쳐 추진한 협동조합운동은 일제의 착취에 제동을 걸었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의 발판을 제공했다.

전진한은 1901년 경북 문경에서 가난으로 양식조차 부족했던 극빈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5세가 돼서야 보통학교에 입학한 전진한은 17세 되던 해 청운의 뜻을 품고 서울로 고학의 길을 떠난다. 서울에 도착한 그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사전상화라는 시계도매상에서 일하게 되는데 극심한 민족차별로 반일감정은 켜져만 간다.
그러던 중 20세 되던 1920년, 전진한은 기미육영회의 도쿄 유학생으로 선발되는 영예를 안게 된다. 일본으로 건너간 전진한은 동지를 규합해 민족운동을 개척할 비밀결사 ‘한빛’을 조직, 이들을 중심으로 1926년 6월 일본 도쿄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착취에 대항하는 경제조직체 ‘협동조합운동사’를 결성해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28년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한 전진한은 곧바로 귀국 협동조합운동사 본부를 서울로 옮기고 전국에 수백 개의 조합을 건립하는 등 국내에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이 때 조선총독부는 와세다대학 총장을 통해 고위 관리로 중용하겠다고 제안해 왔으나 그는 거부했다.

결국 일제탄압의 대상된 그는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구속돼 신의주 감옥에 2년간 투옥된다. 출옥 후 전진한은 함경남도 갑산에서 사립학교 교원으로 잠시 재직했지만 불온분자로 추방돼 금강산에서 운둔생활을 시작한다. 이때 전진한은 본격적으로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된다.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신계사, 유점사 등지에서 숨어 지내던 전진한은 신계사 미륵암에서 정진 중이던 절구통 수좌 효봉 스님을 만나게 된다. 그는 효봉 스님 밑에서 참선수행에 진력하며 맏상좌 격으로 가르침을 받는다. 또 한국 선불교의 큰 족적을 남긴 동산, 한암 스님과 친분을 쌓으며 불교수업을 받기도 했다.

해방 후 전진한은 초대 보건사회부장관으로 등용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를 박차고 나와 노동운동에 복귀한다. 전진한은 경자유전(耕者有田)에 원칙에 따라 토지개혁을 실현시켰으며 노동법을 통과시켜 오늘날의 노동3권을 보장받는 기틀을 마련한다.

1972년 후두암에 걸린 전진한은 치료를 거부한 채 식음을 전폐하고 참선으로 마지막 운명을 맞았다. 운명 직전 그는 열반삼매에 든 듯 미소로 가득했으며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 활활투탈(闊闊透脫)”이라는 게송을 남김으로써 생전의 높은 수행력을 보여줬다. 전진한 거사가 타계했을 때 조계종 총무원은 전국 사찰에 공문을 보내 영결식에 타종을 하게 하는 등 욕심 없이 살다간 재가불자의 가는 길을 추모했다.

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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