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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혜암 스님 『늙은 원숭이』 중에서

기자명 법보신문

사판 노장 스님의 깨달음

오래전 지리산 천은사 삼일암에서 내가 겪은 일이다. 그 선원은 전국에서 공부 잘 하는 선객들이 구름처럼 모여와서 성황을 이루었다. 그런데 그 당시 천은사 큰절에 나이 70여세나 되는 호은이라는 노장님 한 분이 계셨는데 그는 중노릇 수십 년에 강당이나 염불당, 또 기도처만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그런 방면에는 아는 것이 많았으나 한 번도 참선은 해 본 일이 없었다.

이 노장이 결제 전날 삼일암에 와서 다른 스님들과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입승은 “어림도 없다”고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이 사실을 안 성월 조실 스님은 허락하며 “이왕 아주 올라와서 공부하시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는 “돈 빌려 준 문서와 쌀 빌려 준 문서를 지켜야 하고…”

그 당시 나뿐 아니라 50여 대중의 불평도 조실 스님 명령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그 후 노장 스님은 공부하러 절에 오르내리는데 그 시간조차 일정치 않았다. 어떤 날은 한 낮이 되어 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추운 새벽에 수염에다 고드름을 주렁주렁 매달고 오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가 모여 앉은 공부이야기를 할 때에는 그는 깜깜 절벽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원숭이가 참선하는 흉내만 내고도 천상락을 받았다는데 저런 사람도 무슨 인연이 있을까?”라며 비웃었다.

마침 반 살림이 끝난 어느 날 나는 혜월 스님 회상에서 들은 법문을 조실 스님에게 여쭈었다. “어떤 젊은 수좌가 혜월 스님께 와서 ‘소를 타고 소를 찾는다[騎牛覓牛]는데 그것은 어떤 도리입니까?’ 하자 혜월 스님은 그에게 ‘왜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니느냐?’ 하셨습니다. 그러니 혜월 스님이 그 젊은 수좌에게 대답하신 말씀이 잘 한 것입니까?” 그러나 성월 조실 스님은 그 젊은 수좌가 혜월 스님께 물은 것과 똑같이 그대가 나에게 물으라고 했다. 나는 가사 장삼을 수하고 큰 절을 세 번 드린 뒤 똑같이 여쭈었다. 조실 스님은 “그대가 소를 타고 소를 찾는다니, 그 찾는 소는 그만두고 탄 소나 이리 데리고 오너라.”

나는 말이 막혀 어리둥절하고 앉아 있었고, 여러 공부하던 학인들도 앉아만 있었는데, 늦게 공부를 시작한 호은 스님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둥실둥실 추며 하는 말이 “대중 스님네는 다 몰라도 나는 알겠습니다.”하고 큰소리를 쳤다. 이에 대중들은 모두 비웃었지만 조실 스님은 방으로 불러 불조의 공안에 대해 차근차근 물어보시니 하나도 막힘이 없이 다 대답하니 조실 스님은 그 노장님이 깨달았다고 인가를 하셨다.

참선에는 선후배가 없는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도 조사의 말 한 마디를 듣고 깨달아, 일생 늙도록 공부한 사람의 스승이 되는 수도 있는 것이다. 또 공부하는 사람으로 가장 조심해야 할 일은 상법(相法)이니, 이 상법이란 내가 제일이다 하고 뽐내는 아만이다. 경전에 “모든 상을 여의면 부처님과 같다”고 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참선하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혜암 스님은?
혜암(惠庵, 1886~1985) 스님은 황해도 백천군 해암리가 고향으로 12세에 출가했다.

성월 스님 회상에서 용맹정진 끝에 34세 때 대오했다. 그후 만공, 혜월, 용성, 한암선사 등 당대 선의 거승들로부터 지도받으며 보림했다.

1956년 덕숭산 수덕사 조실로 추대되어 주석하며 눈 푸른 납자들을 지도했고, 1985년 5월 19일 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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