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7 나라(奈良) 고후쿠지(興福寺) 下

기자명 법보신문

구불교 전통 고수한 법상종 최고 호국도량

<사진설명>고후쿠지 동금당과 오층탑. 헤이안 시대 말기 후지와라 집안이 건립한 사찰 고후쿠지는 법상종을 대표하는 관사(官寺)로 기능해왔다.

삼경(三更)쯤 지났을까. 고후쿠지(興福寺)를 둘러싼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에 젖어있었다. 법당의 부처님도, 원숭이연못(猿澤池)도 모두 깊은 잠에 빠진 그 시간, 고후쿠지 경내에 단 하나의 방에만 불이 밝혀져 있었다. 그곳은 고후쿠지를 대표하는 학승 조케이가 머물고 있는 방이었다. 책상 앞에 꼿꼿하게 앉은 그의 몸은 미동조차 없었지만, 고뇌하는 표정 위로 수천가지의 단상이 지나가고 있었다.

당시(12세기) 염불만이 정토에 이르는 유일한 수행법이라는 호넨의 주장이 열도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고후쿠지의 젊은 사미들은 틈만 나면 머리를 맞대고 그 이야기를 쑥덕였고, 장로들은 핏대를 세우며 그들을 잡아들여야 한다고 노발대발이었다. 엔랴쿠지에서도, 도다이지에서도 스님들의 분노와 성화가 분출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남도6종과 천태종·진언종 대표들이 나라의 고후쿠지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조정에 이 문제를 상정해 요승(妖僧) 호넨의 무리들을 처단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하지만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하는 위치에 있던 고후쿠지의 대표 조케이 스님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쉽게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호넨의 수행법이 왜 그토록 일본 민중들로부터 폭발적인 호응을 얻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고후쿠지와 엔랴쿠지의 불교가 황실과 귀족사회 속에 머물러 있었고, 당시 관승 체계 속에서 일반인들이 불법을 접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전무했다. 그런 가운데 ‘나무아미타불’을 열 번만 외어도 성불할 수 있다는 호넨의 주창이 일반 민중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의 메시지임을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물론 염불만이 불법의 전부가 아님을 호넨 자신부터 너무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고기를 먹어도 왕생에 지장이 없고, 술을 마셔도 왕생할 수 있으니 계율은 중요하지 않다며 공공연히 계율 파기를 허용하는 그의 주장에는 그 나름의 논리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바로 그 점이 조케이를 망설이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물론 법상종, 천태종, 진언종 등 각 종파들의 강원마저 술렁거릴 정도로 일본의 기성 불교계가 갖는 위기감은 심각한 것이었다.

“아, 어쩔 것인가. 국법을 내세워 그들을 잡아들여야 할 것인가. 수행자는 모름지기 짐승의 고기를 먹는데도 주저해야 한다고 했거늘 하물며 승려된 자로서 산목숨을 죽이라는 주청을 올릴 수 있단 말인가.” 밤이 깊을수록 조케이의 고민도 깊어만 갔다.

“우리의 시대에 불제자들은 무엇을 이루어야 할 것인가.” 한숨 섞인 탄식이 절로 터져 나왔다.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온 지 겨우 500여년, 지금의 시대에 부국강병이 최고의 도가 아니요, 그렇다고 안빈낙도가 시대의 틀이 될 수도 없다. 정법을 세우고 불교의 기틀을 뿌리내려야만 한다. 방편이 무조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방편만 앞세우고 정법을 뒤로 한다면 다음 대를 맞이할 사람들은 무엇으로 정법의 기준을 삼을 것인가.”

먼동이 틀 무렵에야 결론을 내린 조케이 스님이 마침내 붓을 들었다. 그리고는 하얀 종이 위로 한 글자씩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호넨의 전수염불이 왜 그릇되었는지, 8조에 걸쳐 그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고, 조정에 이를 금지하도록 건의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날 밤 글을 완성한 스님은 다음날 아침 고후쿠지로 모여든 승려들에게 그 내용을 발표했다. 약간의 수정을 거친 이 고소장은 곧바로 천황에게 전달됐다. 이것이 바로 1205년 제출된 고후쿠지소조(興福寺奏狀)이다.

고후쿠지는 일본 중세불교사에서 일대 파란을 일으킨 이 고후쿠지소조(興福寺奏狀)로 유명한 사찰이다.

이 ‘고후쿠지소조(興福寺奏狀)’가 받아들여져 호넨의 두 제자는 사형에 처해졌고 호넨과 신란 스님 등은 먼 곳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고후쿠지소조는 당시 고후쿠지에 주석하고 있던 조케이(貞慶, 1155∼1213) 스님에 의해 초안이 작성됐다는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고후쿠지는 헤이안 시대의 세력가였던 후지와라 가문이 세운 원찰이다. 당시 고후쿠지를 남도(南都), 엔랴쿠지를 북령(北領)이라 부를 정도로 고후쿠지의 세력은 막강했다. 후지와라 가문의 세력이 약해진 이후에도 고후쿠지는 도다이지, 엔랴쿠지 등과 함께 대표적인 관사(官寺)로 기능했으며, 이후 천여 년의 세월 동안 조정과 황실에 충성을 다하는 호국불교의 전당이자 최고의 승가권력으로 군림했다.

당시 일본 불교계는, 한 부류의 인간에게만 불성이 있다고 강조하는 법상종의 오성각별설과 모든 인간이 성불할 수 있지만 각 단계에 맞는 수행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천태종의 일승사상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호넨이라는 둔세승은 모든 인간이 성불할 수 있다고 주장하다 못해 기존의 교리와 수행법을 완전히 부정한 채 ‘오직 염불만 할 것’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니 당시 기성 불교계가 당혹스러웠을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었다. 특히 삼승주의를 근거로 인간의 성불에 대한 차별성을 강조해온 법상종의 입장에서는 호넨의 전수염불이야말로 자신들의 사상적 근거를 흔들 수도 있는 엄청난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고후쿠지소조를 제출한 법상종의 입장을 기성불교의 ‘횡포’라고 쉽게 단정할 수 있을까. 내가 고후쿠지의 경내에 서서 문득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연유는 조케이라는 승려의 이력 때문이다.

후지와라 사다노리의 아들로 태어난 조케이는 아버지가 헤이지의 난에 연루돼 유배되자 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고후쿠지로 출가했다. 하지만 기존 교단에 대한 회의와 실망감으로 그 또한 관승의 길을 포기하고 둔세승으로 이곳저곳을 전전했다. 여기까지는 오히려 호넨과 거의 비슷한 경로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긴 방랑을 마치고 다시 고후쿠지로 돌아왔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세상 밖이 아닌 세상 속에 머물러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법상종의 이론과 기존 교단의 폐단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입장이었지만, 법상종을 버리는 대신 오히려 오성각별설의 문제점을 보완해 전통적인 법상교학을 집대성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히에이잔의 일체성불설과 고후쿠지의 오성각별설을 융합하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계율에 의거한 청정한 삶을 강조하면서 율종의 기틀을 재확립하는 한편 부처님과 관세음보살, 미륵신앙을 확산시키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다시 말해 조케이는 기성불교의 틀 속에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해나간 온건 개혁주의자였던 셈이다.

후대의 학자들은 기존의 틀 안에서 머무르면서 교단의 타락을 걱정하고 사상적으로나 실천적으로 혁신적인 활동을 펼친 승려들을 구불교 개혁파로, 호넨이나 신란처럼 구불교의 틀을 벗어나 거의 혁명에 가까운 활동을 펼친 이들을 신불교로 설명하고 있다. 구불교의 사상가들 또한 나름대로 고대불교의 한계성을 인식하고, 새로운 변화를 모색한 개혁가들로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조케이를 비롯한 당시의 스님들이 자신들의 가치관을 지키는데 충실했다 해도 그들이 권력을 가진 관승의 입장에서 폭력을 행사했다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전후 사정을 불문하고 고후쿠지소조는 자유로운 학술의 장에서 벌어진 논쟁이 아니라, 권부의 힘을 빌려 전수염불을 금하기 위해 황실에 제출된 고소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조케이 스님과 당시 승려들을 현재적 관점에서 재단하여, 매도하는 것도 올바른 시각은 아닐 것이다. 후대의 학자들이 조케이보다 호넨 스님을 비롯한 신불교의 기수들을 더 높이 평가하는 연유는 신불교 사상이 보다 먼 미래의 시대정신과 맞닿아 있음을 높이 산 것일지언정 구불교의 개혁가들이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간 데 대한 비판에 근거한 것이라고만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진설명>해탈상인 조케이좌상. 조케이 스님 입적후 해탈상인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어느 사회에서나 틀 안에서 원칙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존재하기 마련이고, 그것은 전통과 질서를 유지하는 뼈대를 이루게 된다. 보수주의자가 무조건 과거의 인습에 얽매인 채 다수의 이익을 버리고 자신의 안위만을 도모하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수구세력이나 기득권층이 스스로를 보수 세력으로 포장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진정한 보수’는 전통과 미래 속에서 다리 역할을 하며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온고지신(溫故知新)’을 구현하고 새로운 것들을 부단히 창조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일본을 불교국가로 만든 것은 호넨 스님만도 아니며, 또한 호넨 스님을 비판한 조케이 스님이 반시대적인 인물이었던 것만도 아니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서로의 입장을 지키기 위해서 치열하게 다투었던 그 역동성, 그리고 정법을 세우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조케이의 노력이 모두 일본불교의 중세를 탄생시킨 힘일 수 있는 것이다. 적어도 그들의 싸움은 스스로의 신념에 충실했던 혁명가와 개혁가의 전투였으며, 이는 중세 불교국가를 탄생시킨 역동적 에너지였다고 감히 평가하고 싶은 것이다.

takhj@beopbo.com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