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8 모든 것은 여법하다

기자명 법보신문
목련은 목련, 진달래는 진달래
자연은 여법하기에 늘 아름답다


계절의 질서란 변하면서도 변함이 없다. 이것이 어찌 계절의 질서 만이랴.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는 순간도 있는 그대로의 것이 없이 항시 변하고 있다. 이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진화한다 할 것이다. 진화란 글자 그대로 앞으로 나아가면서 변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큰 틀의 자연에다 기준을 두고 본다면 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

올해도 어김없이 봄은 왔다. 담 밖의 개나리가 노랗게 수를 놓고 있다. 며칠 전만해도 삭막했던 주위가 화사하여 늙은이의 마음까지도 설레게 한다. 아무 생각 없이 밖으로 나가고 싶은 유혹에 이끌린다. 그런데 금년에는 이상한 현상에 새삼 놀라게 한다. 갖가지의 봄꽃이 나름대로 피는 시기의 순서가 있는데, 금년에는 이 순서가 심하게 말하면 뒤죽박죽이 된 듯하다. 피는 시기의 앞뒤가 예년과는 전혀 다른 것을 알 수가 있다. 3원 초·중순에 목련이 피고 그 뒤를 이어 개나리가 피고, 이어 진달래 벚꽃 들이 순서적으로 피는 것이 나름의 질서이었던 것 같은데, 올 봄은 개나리와 목련이 지금 같이 피고 있고, 진달래도 같이 피고 있으니, 백화제방(百花齊放 온갖 꽃이 모두 핀다)이라 하여 봄의 화려함을 표방했던 옛 표현이 글자 그대로 실현된 느낌이다.

그 이유를 잠시 생각해 보았다. 이는 올 봄 우수 경칩 철에 때 늦은 추위의 엄습에 의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목련은 입춘 전에 벌써 꽃봉오리가 부풀어 우수 경칩이면 봉오리를 벌리기에 가장 이른 봄의 전령 같았다. 그런데 올 경칩 철에 예기치 못한 추위가 닥쳐오는 바람에 꽃봉오리가 놀라 움츠려 든 것이다. 이 움츠린 꽃봉오리가 다시 기운을 돋아 피려니까 숨 고르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꽃들은 봄추위도 겨울 추위의 연장으로 여겨 숨 고름이 없이 예년처럼 진행되어 개화의 시기에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마치 앞서 달리던 차가 신호등에 막혀 있고, 뒤에 달리는 차는 정지 없이 달릴 때 전진 신호가 나면 앞서 멈추었던 차는 다시 전진을 시작하고 뒤따르던 차는 쉼 없이 계속 전진하니까 앞선 차보다 도리어 앞서는 것과 같다.

목련이 늦추위의 시련으로 개화기가 늦었지만 꽃 자체로는 지난해의 꽃과 다를 것이 없이 아름답다. 목련 개나리 진달래가 일시에 피어 우리의 주변은 더 아름다워졌다. 늦든 이르든 길든 짧든 꽃 자체로는 아름다운 본성의 여여한 실현일 뿐이니, 자연 진리 그대로의 여법(如法)한 현실이다. 목련은 목련이고 개나리는 개나리이고 진달래는 진달래이다. 그야말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이것이 바로 여법한 자연의 진실이다. 그러기에 아름답다.

이럴 때 신라 경덕왕 때의 충담(忠談)스님이 왕명에 의하여 불렀다는 ‘안민가(安民歌)’가 연상된다. 이 노래의 끝 구절은 이러하다. “임금다이 신하다이 백성다이 한들 나라가 평안하리이다” 하였다. 그렇다 중생 모두가 각기 제 자리에서 그 자리답게 한다면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갈구하는 서방정토인 것이다.

충담스님은 3월 3일 날 남산의 미륵세존에게 차 공양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왕의 부름으로 마주 앉게 되었던 것이고, 이금은 이미 그의 노래 솜씨를 알고 있었으니, 스님이 지은 ‘찬기파랑가’가 유명함을 알고 있었다. 그 노래는 기파랑을 찬양한 것이니 나를 위해 백성을 평안히 할 수 있는 노래 하나를 지을 수 없겠는가 하여 이 노래를 지어 올렸고, 스님은 이로 인해 왕사로 봉해졌다.

임금과 신하의 아름다운 자리임이 눈에 드는 장면이지만, 그 아름다운은 결국 누구나 제 몫을 저답게 이루어냄에 있음이니, 앉든 서든 쉬든 눕든 선이 아님이 없다는 선의 실현은 바로 이러함이니, 그래서 선은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sosuk0508@freechal.com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