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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나라 사이다이지(西大寺) 上

기자명 법보신문

흥정보살, 계율로 자비의 원천을 재건하다

<사진설명>사이다이지 금당으로 두 마리의 비둘기가 날아들고 있다. 금당 앞에는 원래 동탑이 위치해 있었는데, 고후투지나 호류지의 오중탑과 비슷한 형태의 목조탑이었다고 전해진다.

제법 찬 새벽바람이 옷섶을 헤집고 밀려들어온다. 벙어리장갑에 목도리를 칭칭 휘감은 완전무장의 자세로 사이다이지(西大寺)에 들어섰다. 그런데 저런! 별안간 짧은 반바지에 타이즈를 신은 꼬맹이들 수십 명이 병아리 떼처럼 몰려오고 있다. 영락없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이웃집 토토로’에 등장하는 ‘메이’들이다.

‘요이, 스타또!’

선생님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의 구령이 떨어지자 병아리 떼들은 일제히 ‘와~’ 함성을 지르며 사찰 경내를 가로질러 달려간다. 일본에서는 아이들을 강하게 키우기 위해 겨울에도 옷을 가볍게 입힌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아이들의 활기찬 모습을 대하니 겨울코트로 칭칭 감긴 나의 행색이 무척이나 쑥스럽게 느껴진다.

깔깔거리며 경내를 내달리던 수십 명의 아이들은 이내 숲속으로 사라지고 어느새 사이다이지에는 비둘기 몇 마리만이 고개를 앞뒤로 흔들며 거닐고 있다.

‘저 아이들이 혹시 어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숲 속의 요정 토토로를 만나고 있는 건 아닐까?’ 문득 호기심이 발동한다. 아이들을 따라 숲 속으로 가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발길을 떼는 순간, 아뿔싸! 나의 일탈을 눈치 챈 동국대 김호성 교수님의 걸걸한 목소리가 목덜미를 잡아끈다. “탁 기자 어디 가노? 흥정보살 안 만날끼가?”

사이다이지 경내에 들어서자 석가모니 부처님이 모셔진 불단 왼쪽 편에 흥정보살(興正菩薩)이라는 이름의 조상이 모셔져 있다. 이름대로 ‘바른 법을 일으킨 보살’의 삶을 들여다보기 위해 사이다이지의 안내문을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흥정보살 에이손(叡尊) 스님은 1201년 고후쿠지의 학승 케이겐(慶玄)의 아들로 태어났다. 17세때 교토 다이코지(醍寺)에서 출가한 스님은 그해 도다이지에서 계단을 수계하고 다이코지 소속의 관승으로 승려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승가의 부패와 관승들의 타락에 회의를 느낀 스님은 관승의 길을 버리고 민중 속으로 성큼 들어간다. 에이손 스님이 출가한 것은 호넨 스님의 전수염불이 공인된 지 딱 5년이 지난 뒤였다. 하지만 전수염불이 안고 있는 자기모순은 이미 호넨 스님 생전부터 터져 나오고 있었다. 에이손 스님의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출가자들은 결혼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일반 불자들 또한 술과 고기를 즐기는 등 계를 범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1236년, 에이손 스님은 정법을 세우겠다는 결심을 하고 도다이지 법화당 관음보살 앞에서 계율을 지킬 것을 맹세한다. 그리고는 스스로 보살승이 되었다고 선언했다. 스님은 출가자의 참된 도리는 자신의 깨달음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구제하는 것이라 확신했고, 그래서 스스로를 보살승이라 부른 것이다. 이후, 나라 사이다이지로 건너온 스님은 계율 부흥과 중생 구제 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스님은 사이다이지에 주석하면서 우지와 교토 등지에 살고 있는 일반 민중들에게 불법을 전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둔세승들이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았던 것과 달리 에이손 스님은 출가자는 물론 재가자들에게도 철저하게 계율을 지킬 것을 강조했다. 어업을 생업으로 살아가던 우지 사람들의 어망을 거두어 땅에 묻고, 그 대신 차를 덖어 돈을 벌 것을 가르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스님은 부처님으로부터 벌을 받은 것이라며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았던 한센병(문둥병) 환자들을 돌보았으며, 다리와 항만을 정비하고 사찰과 신사를 수리·개조하는 한편 비구니 스님들을 위한 사찰을 창건하는 등 다양한 사회구제 사업을 전개했다. 자기 부정에서 비롯된 현실의 비판이 궁극적으로는 보다 많은 이들을 향한 보살행의 실천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당시 스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이 무려 10만 명이 넘었으며, 에이손 스님의 법을 이어간 진언율종은 이후 가마쿠라 시대 최대의 불교세력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정법을 바로 세우고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이 둘이 아님을 몸소 실천해 보여준 스님이 1290년 입적하자 그 뜻을 기려 ‘흥정보살’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고후쿠지 관승을 아버지로 둔 에이손 스님에게는 분명 관승으로서의 보장된 미래가 열려 있었다. 하지만 그는 미련 없이 관승의 길을 포기했다. 또한 둔세승으로서의 자유분방한 삶도 동시에 부정했다. 자신이 승려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승려는 마땅히 비구(독신)의 신분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계율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스님의 삶을 한 마디로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굳이 언급한다면 ‘이율배반의 연속’ 쯤으로 표현할 수 있을 듯싶다. 스님은 정법을 위해 스스로 가진 모든 것을 부정했고, 관승의 신분도, 둔세승의 자유도, 심지어 아버지의 존재까지 모두 부정하지 않았던가.

기존의 토속 신앙 대신 불교를 수용한 쇼토쿠 태자, 관료화된 교단을 버리고 엔랴쿠지로 들어간 사이초 스님, 그리고 엔랴쿠지를 버리고 세상 속으로 뛰어든 호넨과 신란 스님, 둔세승의 자유분방한 삶을 비판하며 다시 계율 부흥을 주창한 에이손 스님에 이르기까지 일본 불교사에 있어서 큰 획을 그었던 고승들은 이처럼 자신을 배태한 장(場)을 부정함으로써 보다 높은 사유세계에 도달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앞서간 사람들은 언제나 뒤에 도달하는 사람에 의해 부정되고 비판되기 마련이다. 그것은 장강(長江)의 물이 치고나오는 뒷물에 의해 앞으로 밀려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를 헤겔식으로 표현한다면 변증법적 삶이 될 것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거해 표현하자면 ‘이 세상에 고정된 존재로 연속되는 것은 없으며 삼사라(輪廻)의 수레바퀴는 항상 굴러갈 수밖에 없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에 다름 아닐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부정에 부정을 거듭하면서 도달한 절대 긍정의 단계! 원효 스님이 진여문과 생멸문에 대해 불이이불이(不一而不二)라는 이중 부정의 논리를 전개함으로써 화쟁을 역설한 것처럼, 부정의 부정은 결국 대긍정의 단계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이는 궁극적으로는 출세간적 해탈로 연결된다. 선과 악이 둘로 분리되지 않고, 긍정과 부정의 개념이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려 있는 세계의 발견은 절대 긍정의 단계 속에서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에이손 스님은 자신을 부정하고, 부정한 자신을 다시 부정함으로써 더 큰 진리의 세계를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스님의 이런 세계관은 그의 삶을 보살행의 실천으로 이어지게 했다.

최근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통해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사유 세계 속에서 자기 부정을 거듭해온 에이손 스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불가사의한 마을(不思議の町)’에 도착한 치히로는 부모가 돼지로 변하고 난 다음 극심한 자기 부정에 휩싸이게 된다. 치히로는 여기서 자신에 대해 강하게 부정하며 자신의 세계에서 깨어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건 꿈이야’를 외칠수록 치히로의 모습은 점점 사라져간다. 자신에 대한 부정이 자신의 존재마저도 사라지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부모를 되찾기 위해 자신이 처한 고난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온천으로 모여든 병든 영혼들을 치유해주는 과정 속에서 하나의 성숙한 존재로 성장하게 된다.

치히로의 성장 과정 속에는 일본인으로서의 업과 정체성을 담으려 했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스스로의 방황이 담겨있을 것이리라. 근대국가로 거듭나기 위해 주변국들을 희생양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원폭에 폐허가 된 ‘천황국’을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으로 발전시켰지만 아마테라스의 신성한 땅을 폐유와 쓰레기로 가득한 곳으로 만들어버린 베이비붐 세대들. 그리고 경쟁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파괴시키며 살아가는 젊은이들. 유바바의 아기처럼 어른이 다 된 몸을 한 채 젖병을 물고 살아가야만 하는 미숙아의 삶을 살아가는 현대 일본인들의 모습을 하야오 감독은 낱낱이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일본인들의 죄와 과보를 애써 재단하려 들지 않는다. 인간 행위 선악 너머에 존재하는 것, 생명이 있는 존재가 살아가야하는 그 당위성에서 대해서 역설할 뿐이다. 그는 일본의 현재를 냉철하게 비판하면서도 수천 년 간 일본인들이 이어온 자연친화적인 정신세계와 생명력을 찬탄한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그래도 살아야 돼’라는 메시지를 속삭이듯 던진다. 하야오 감독의 세계 속에서 모든 만물은 조화로운 오케스트라를 이루며, 악인도 선인도 모두 긍정되는 ‘해방된 세계’로 거듭난다. 어느덧 그가 그리는 삶은 하나의 화엄적 축제의 장으로 승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따뜻하고 자비로운 시선 속에서 현대 일본인들은 얼마나 큰 위로를 느낄 지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이 일본 내에서 신기록에 신기록을 거듭하고 있는 것도 모두 이 같은 이유에서 비롯되는 것이리라.

<사진설명>병아리떼 마냥 사이다이지 저편으로 달려가는 어린이들의 모습.

하야오 감독의 시각을 통해 세계인들은 현대 일본인들에 대한 ‘모노노아하레(物哀)’를 은연중에 느끼게 된다. 하야오 감독이 그려낸 만화 속 세상을 통해 일본인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있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에 대한 연민과 동료애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사유 세계는 어쩌면 자기 부정에 부정을 거듭한 끝에 도달한 절대 긍정의 단계일지도 모른다. 마치 사이다이지의 승려 에이손의 방황의 결말이 그러했던 것처럼….

takhj@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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