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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안창홍

기자명 법보신문

생사혼재한 인도서 원초적 美의 충격 영감 얻어

<사진설명>안창홍 화가의 작품 속에는 환멸과 열반이 공존하며 우리에게 ‘자신의 관조’를 당부하고 있다.

양평에 위치한 안창홍의 작업실은 이미지의 보고다. 작가의 감각적인 손에 이끌려 나온 수많은 이미지들은 더없이 화려하다. 그는 누구보다도 손이 빠르고 화려하며 감각적인 시각연출에 능란하고 몽상과 환각적 연출에 뛰어나다. 자기 생각과 환상을 거침없이 그려내는 그는 그로테스크하고 괴이하며 섬짓하고 음울한 이미지를 축제처럼 그림 안에 녹여낸다.

너무 환하고 밝고 강렬하게 그려진 공포와 징그러움은 기이한 조화를 이룬다. 그런 그는 누구보다도 부지런하다. 거의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꿈대로 그림을 그린다. 해서 그 그림들은 기획이나 개념, 이론과는 다소 무관하게 오로지 자신의 몸에서 발아해서 움터 나오는 무성한 풀 같다. 풀들이 모든 여백을 촘촘히 메꿔 나가듯 그렇게 빈 화면을 가득 채운다. 그는 탁월한 그림 이야기꾼이다.

그는 그림을 통해, 이야기 그림을 동원해 우리 시대의 여러 징후들을 까발리고 증언한다. 그런데 이런 추진력이랄까 일관된 의식을 그림을 통해서, 매번 같은 강도로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작가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그의 작업은 마치 거미가 실을 뽑아내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모든 에너지가 그림에만 쏠려있는 그에게 그림이란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그는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무위도식하면서 거렁뱅이로 살고 싶다고, 그 속에 미쳐서 살고 싶다고 한 적이 있다.



환멸-모욕 풍경의 연속

그는 어린 시절 밀양에서 보낸 유년 시절을 꿈처럼 기억한다.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했던 그 유년의 기억은 그의 그림에서 넓은 풀밭과 완만한 언덕, 지천에 핀 꽃과 나비로 환생한다. 중학교 졸업 이후 홀로 지내며 지금까지 독립적으로 살아온, 견뎌온 그의 여정이 개인성의 근원이다.

80년대 이후 현재까지 그의 작업세계는 결국 유년기의 달콤한 추억과 젊은 시절 겪었던 세상에 대한 환멸과 모욕이 뒤섞인 풍경의 끝없는 재현이다.

그러니까 작업실에서 그가 길어 올린 것들은 대략 어린 시절 밀양에서 보낸 유년기의 추억과 황홀한 자연에 대한 인상, 그리고 일그러진 가족사, 불량과 우울과 광기로 점철되었던 음습했던 젊은 시절의 기억, 내내 목덜미에 붙은 죽음의 내음과 유혹, 사회 속에서 배제되고 타자화 되는 모든 아웃사이더들에 대한 연민의 시선, 여행체험을 통해 만난 사람들과 풍경 등이다. 어쩌면 이 몇 가지 근원들이 지속해서 그의 작품을 화려하게 포장하는가 하면 문득 어둡게 가라앉히고 그토록 다채로운 방법론을 가능케 하는 것 같다.

작업실 곳곳에 인도에서 그려온 작은 드로잉들이 놓여있다. 현장에서 곧바로 그려온 싱싱한 추억과 여행의 감흥들이 신선하게 요동치는 그림에서 인창홍만의 손맛과 순발력, 그림의 묘미 등을 만난다.

인간심성의 다양성 표출

드로잉과 과슈 등 이 작은 그림들도 격이 있어서 홍건한 회화적 맛과 현장에서 느낀 작가의 감흥이 온전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에게 인도는 자신의 그림에 큰 영감을 부여해준 땅에 다름 아니다. 강렬한 색채와 종교의 나라, 신비와 에로티시즘, 생과 사가 혼재한 그곳의 풍경이야말로 그의 그림의 원천을 제공해주었다. 몇 차례 반복해서 찾아간 그 여정은 인도인의 삶과 죽음의 교호, 화려하고 강렬한 색채, 지독한 가난, 자연과 인간의 원초적인 어우러짐 등을 가장 지독하게 보여준 시각이미지였다고 말한다.

최근 작업들은 사람의 얼굴이 정면으로 촬영된 사진을 응용한 것들이다. 지금은 사라진 사진관에 있던 주인 없는 증명사진을 구해 이를 크게 확대한 후 그 표면에 다양한 칼질을 가하거나 찢어 붙이는 한편 눈동자와 입술을 조작하거나 얼굴 피부나 목덜미에서 기계부품이나 전선줄이 삐져나오게 그려 넣어 일종의 사이보그로 만들어놓는 등의 다양한 연출을 가한 것들이다.

그는 증명사진 속에 박힌 얼굴을 이용한 여러 유희를 통해 인간의 외부와 내부의 간극과 틈, 분열상을 보여주는 한편 날카롭게 자른 부분과 손으로 찢은 부분의 상충과 겹침, 어긋남을 이용하기도 하고 두 장의 사진을 하나로 겹쳐놓으면서 인간 감정의 여러 측면을 보다 풍부하게 드러낸다. 얼굴은 진실을 가리고 있는, 그 뒤에 또 하나의 속 얼굴을 감추고 있는 장소이자, 동시에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타자를 바라보는 장소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각자가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크 오몽)

특히 어린 시절 갖고 놀던 인형의 눈을 빼닮은 커다랗고 홍채가 햇살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간 눈동자를 그려 넣은 사진 속 얼굴은 무척 기이하다. 더러 눈을 감기기도 하고 입술만 붉게 칠해놓거나 얼굴 주변에 나비를 부착한 경우도 있다.

자기 안으로 침잠하듯 들어가거나 명상에 잠긴 듯, 혹은 열반에 들거나 영원한 휴지기로 접어든 존재들의 영면 같기도 하고 지상에서의 고단한 삶과 생애의 이력을 모두 다 지우고, 뒤로 하고 비로소 맞이한 꿈같은 휴식을 부여한 포즈 같다.
적멸의 순간이자 명상의 정점, 또는 모든 욕망을 잠재운 후에 비로소 드러나는 평화로운 얼굴 같기도 하다. 여기서 눈은 그 경계가 된다. 생사의 경계는 눈을 뜨고 감는 찰나에 서려있다.

‘생을 돌아보라’ 암시

그는 마치 시신에 화장을 하고 염을 하 듯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이 오래된 흑백사진을 빌어 의식을 치루고 있는 것 같다. 직사각형의 철제 프레임 안에 들어간 거대한 사진(얼굴)은 에폭시로 절여져 있어서 반짝이면서 영원한 부동과 침묵, 방부와 시간의 입김이 스며들 수 없는 곳에서 영생과 불사를 누리는지도 모르겠다.

이 치유적인 작업은 앞서 거대한 언덕풍경과 함께 안창홍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멈춤과 쉼, 휴식과 부동 같은 것이다. 그의 작품 속에는 지독한 허무와 무상감이 수시로 몸을 섞거나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아늑한 접점이 흐려지는가 하면 늘상 죽음을 통해서 현재의 강렬한 순간을 대면케 하는 시선들이 교차한다. 인간은 죽음 직전까지 열심히 생의 욕망을 동원해 자신을 벼랑으로 내몰며 산다. 죽음이 비로소 브레이크를 걸어 그간의 멈춤 없던 생명활동을 종식시킨다.

그렇다면 죽음은 커다란 휴식이자 영원한 동면이다. 그런가하면 그 얼어붙은 시선들은 순간 자기 생을 뒤돌라보라고 권유한다.

언젠가 사진관에서 사진사의 부름에 응해 렌즈를 응시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각인하고 증거하며 그 어떤 정체성의 요구에 응해 호출된 자신의 기념비적 얼굴이 이제 망각되고 자신을 기억해줄 누군가도 역시 이 지상에서 사라져 버렸을 때 홀로 남은 이 사진 속 얼굴은 무엇일까?

(미술평론·경기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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