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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남전 스님의 『남전선사문집』에서

기자명 법보신문

시간에 끌려다니지 말고 사용하라

묵은해를 전송하고 새해를 맞이한다고 온 세상이 모두 기뻐하여 새 의복을 만들어 입고 좋은 음식으로 제사를 지내며, 또한 새 사업을 경영한다, 새 정신을 진흥한다 하여 부산하지 않은 이가 없으나 생각해본즉 우리는 저 사람들과 사뭇 다르다. 전송하여 간다는 것은 새해라 하고, 맞이하여 온다는 것은 묵은해라 하는 까닭이다.

남들과 다르게 바뀐 이유를 말하려면 보내고 맞이하는 그 중에 가고 오는 것이 사실 무엇이 있느냐?

단지 허명(虛名)뿐이다. 이 허명뿐인 ‘오는 시간’이 지나갈수록 육체는 무르익어 가고 해가 바뀔수록 육체에 노쇠한 것이 따라온다. 이러므로 우리는 허명을 돌아보지 않고 오직 육체의 새로움이 흘러가고 늙음이 다가옴을 증명하여 오래되고 새로운 것이 뒤바뀌게 되는 것이다. 물질이 생겨나고 쇠락해 가는 것으로 인하여 이른바 새로운 해가 오고 묵은해가 간다.

그저 방편으로 정한 것일지언정 이른바 해란 것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아니하니 불가불 허명뿐이라 할 수밖에 없다. 또 한 번 더 숙고해보면 시(時)로부터 일(日), 일로부터 월(月), 월로부터 연(年)이라 하니 시·일·월 적에는 연이라 할 수 없고 연이랄 적에는 시·일·월이라 할 수 없다. 그러한즉 연·월·일·시가 모두 사람들이 편의상 정한 허명뿐이요, 하나도 실재됨은 없다.

비유컨대 세계와 티끌은 동일하다. 티끌이 화합하면 세계요, 세계가 흩어지면 티끌일뿐인 것이다.

우리가 보고 듣게 되는 세계 등도 이와 같이 항상 실재하는 것이 아니거늘 어찌 형태가 없는 해[年]를 새롭다 오래됐다 하며 집착하랴. 설사 항상 실재하는 해의 새롭고 오래됨을 믿더라도 허공 내에서 망상을 일으키는 것뿐이라.

허공이야 어찌 오래되거나 새로울 것이 있으랴. 하물며 본래 원만한 이치에는 허공도 큰 대해도 물 한 방울과 같다.

이러므로 종렴 선사에게 누가 묻기를 “선사는 24시 중에 여법하게 마음을 쓰십니까?” 하니 선사가 답하되 “그대는 24시의 사용이 되거니와 나는 24시간을 사용한다.” 하였다. 또 고봉 선사는 준령 위의 구름을 가늘게 쓸고 깊은 연못에 달을 엷게 빚어서 지나가는 세월을 수용하였다 하니 이러한 솜씨들은 연·월·일·시를 사용할지언정 사용됨은 아니로다.

또 어떤 일류의 선사는 본래로 드러난 흰소의 고삐를 얻어 잡지 못하고 흐릿한 눈으로 좌선한다, 정진한다 하여 온 종일 공연히 노력만 하므로 고봉 선사가 일찍이 이르되 “저 선사는 속계를 떠난 흰소를 삶으며 시간을 보낸다”고 하였다.

하물며 여기에도 미치지 못한 우리는 허명 세월에 집착할 뿐외다. 다만 겉으로 불법을 희롱하여 무한번뇌를 만들어내니 옛사람의 진정한 시간 다루는 법을 어찌 더불어 논할 수 있으랴.


남전 스님은

남전(南泉, 1868~1936) 스님은 합천 가야면에서 태어나 7세 때부터 안동 서송재의 문하에서 12년간 한학을 배웠다. 1885년 가야산으로 출가한 뒤 백련암에서 정진해 완허장섭의 법을 이었다. 1904년 해인사 주지로 취임해 승풍을 바로잡고 사찰을 정비했으며 도봉·석루·성월 스님 등과 더불어 서울 안국동에 선학원을 세웠다. 이후 직지사 조실 등을 지내다 1936년 선학원에서 입적했으며, 제자로는 석주 스님 등이 있다.

이 법문은 ‘과세(過歲)’라는 제목으로 1925년 1월 「불교」 제7호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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