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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상 아이들과 어울리다 보니 큰스님 소린 못 듣고 살았어”

기자명 법보신문

어린이-찬불가 포교의 산역사 운 문 스님

<사진설명>세수 일흔 여덟에 접어든 운문 스님은 요즘도 틈나는 대로 찬불가 가사를 쓴다. 가사가 떠오르지 않으면 화두를 잡는 것이 스님만의 비법이다.

“거기 잠깐 앉아 있어요. 내 이 불자님들 등만 달아드리면 되니까.”

종로구 홍지동 주택가 한 가운데 위치한 빌라. 현관문 앞 흰 종이에 사인펜으로 적은 ‘조계종 운문사’라는 안내문이 난감하게 방문객을 맞는다. 손수 현관문을 열어주고 지객까지 도맡아 하시는 스님이 올해 세수 일흔 여덟의 운문 스님(사단법인 삼보불교음악협회 이사장)이다. 수년째 주석하던 종로구 구기동 운문사를 한국불교음악역사관 부지로 내어주고 이곳에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는 소식은 익히 들었지만 시자 한 사람 없이 노스님 혼자 계시는 모습을 보니 앉은 자리가 영 불편하다. 그래도 거실에 마련한 법당에는 삼존부처님이 계시고 조롱조롱 걸려있는 연등은 봉축을 앞두고 환히 불을 밝혀 여법함에는 흠이 없다.

17살에 불쑥 찾아온 출가 인연

“그동안 이런저런 소리 많이 했는데, 무슨 얘길 또 들으러 왔어요.”

운문 스님 말씀이 맞다. 어린이 포교, 찬불가 포교에 있어 운문 스님은 이미 그대로 역사의 한 장이 되어있다. 어린이 포교와 찬불가 포교의 역사가 스님에 의해 시작되었고 젊은 시절 스님의 행적이 어린이 포교, 찬불가 포교의 역사이니 말이다.

운문 스님이 어린이 포교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 그 직설적인 질문에 앞서 훨씬 오래전 이야기들이 먼저 궁금하다. 어린이 포교에 진력한 만큼 수행, 출가자로서의 본분엔 소홀해질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하는 짧은 생각에서다.

“그 얘기를 하자면, 아마도 나는 전생에서부터 출가와 인연이 있지 않았을까 싶네요.”

운문 스님은 일제강점기였던 1928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났다. 스님에게는 형님이 한 분 계셨는데 중국 등을 오가며 장사를 했다. 그 형님이 어느 날 갑자기 ‘거지꼴’로 나타났다. 누덕누덕 기운 옷에 꾀죄죄한 행색이 영락없는 비렁뱅이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바랑을 짊어진 스님이었다. 금강산 유점사에서 무풍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는 형님 남장 해촌 스님은 며칠을 집에 머물며 당시 16살이던 동생에게 『부모은중경』과 『목련경』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었다.

“아하, 형님이 거지가 된 줄 알았더니 참 훌륭한 공부를 하는구나. 그 길로 형님을 따라 나서려 했는데 여의치 않았고, 이듬해 형님이 인근 사찰에 와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집을 나온 것이 그대로 출가가 됐으니 참 싱거운 출가였지요.”

운문 스님은 17살에 인곡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해인사에서 공부 했다. 이후 통도사, 범어사, 상원사 등 선방에서 공부 하던 스님은 1955년 “각자의 고향으로 내려가 포교를 하라”는 종단의 지시에 따라 목포로 내려갔다. 스님은 “그때만 해도 세상 물정 모르는 수좌”였다.

“나주 심양사였어요. 지금도 또렷이 기억이 나는군요. 어떤 보살님이 ‘운이 안 좋다고 해서 불공을 올리러 왔다’며 찾아왔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배운 불교는 이게 아닌데, 이렇게 기복만 하다간 큰일 나겠다’ 싶었지요. 하지만 나이든 노보살들에게 아무리 말을 해도 소용이 없더군요. 그래서 어린이들에게 눈을 돌렸지요. 아직 기복에 물들지 않은 아이들에게 바른 법을 가르쳐 딱 30년만 하면 한국불교가 바른 길로 가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어린이법회를 시작했어요.”

하지만 어린이들은 고사하고 신도 가운데에 젊은이들도 많지 않던 시절, 어린이들을 절로 불러 모으는 일은 이래저래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이 많으니 시끄러운 것은 당연지사. 아니나 다를까 몇 차례 법회를 보고나니 기도를 열심히 하던 한 스님이 “왜 절에 아이들을 불러다 시끄럽게 하느냐”며 핀잔을 줬다. 이런 일은 그 후에도 부지기수였다.

“기복만 하다가 불교 큰일 날라”

“어린이들에게 불교를 알려주려고 하니 무엇보다도 노래가 필요했어요. 경전을 토대로 가사를 쓰고 인근 국민학교나 중학교 교가를 빌어다 찬불가를 만들었지요. 나중엔 학교 음악선생님들한테 부탁해서 찬불동요를 몇 곡 만들기도 했어요.”

그렇게 해서 탄생한 노래 가운데 한 곡이 지금까지도 불리는 ‘경배하세’다. 1950년대 작곡비 한 푼 못주고 만든 곡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후 서울로 올라온 스님은 서울 시내에 어린이 법회를 30군데만 만들자고 다짐했다. 어린이법회가 하나, 둘 늘어나 연합체인 불교소년교화연합회가 탄생했고 오늘날 사단법인 청소년교화연합회로 이어지고 있다. 1950년대 근대적 찬불가의 개화기를 연 운문 스님은 60~70년대 본격적으로 찬불가를 보급해 나갔다.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 탄생한 찬불가가 무려 400여 곡에 이른다.

그 사이 종단 종무행정에도 관여했고 주지 소임도 적지 않게 맡았지만 불사나 살림살이는 늘 뒷전이었다. “도통 관심이 없기도” 했지만 수행과 포교가 출가자의 본분이라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사미시절 스님은 기필코 깨달음을 얻겠다는 각오로 오른쪽 손가락 두 개를 연지(燃指)해 소신공양하기도 했다. 그런 운문 스님에 대한 은사 인곡 스님의 기대는 컸다.

“은사 스님은 내가 평생 수좌의 길을 갈 것이라 기대하셨는데…. 그러니 저만 보시면 ‘중이 참선이나 염불을 해야지 노래가 다 뭐냐’며 꾸중도 많이 하셨지요.”

은사 스님의 기대도 저버리며 어린이 포교, 찬불가 보급에 진력하다 보니 당초 발원했던 30년이 훌쩍 지나 반백년을 넘겨 버렸다. 그 사이 어린이 포교라는 말은 정착됐지만 정작 스님은 오늘의 성과가 만족스러울까.

“요즘엔 어디서 무슨 행사를 하던 찬불가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잖아요. 그 중에는 내가 가사를 쓴 ‘산회가’도 있고 ‘보현행원’도 있지요. 내가 쓴 찬불가를 들을 때면 보람을 느껴요. 그거면 됐지요.”

‘보현행원’ 등 찬불가 400곡 보급

<사진설명>운문 스님은 피아노 연주를 배운적이 없다. 하지만 어깨너머로 익힌 솜씨가 수준급이다.

고작 이 정도에 만족한다는 말에 맥이 풀려버린다. 좀 더 욕심을 부려도 되지 않을까. 어린이 포교만이 한국불교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다고 강조해도 될법한데 말이다. 이런 아쉬움을 눈치 챘는지 운문 스님이 한마디 보탠다.

“요즘 아이들은 공부도 많이 해야 하고 비디오니 컴퓨터 오락이니 해서 재미있는 것들이 많아져 절에 불러 모으기가 점점 더 힘들겠지요. 어린이 포교에 대한 스님들과 종단의 관심이야 예전에 비하면 백배는 늘었지만 여전히 힘든 일입니다. 누구든 어린이 포교를 하려면 대보살의 마음을 가져야 하고 종단과 어른 스님들은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야 합니다.”

운문 스님은 출가 후 늘 그래왔듯이 요즘도 매일 같이 새벽기도와 예불을 거르지 않는다. 찬불가 가사 쓰기도 멈추지 않고 있다. 가사를 쓰다가 막힐 때면 ‘이 뭣꼬’를 화두로 참선에 든다. 화두를 들면 막힌 가사가 풀려나온다는 것이다. 화두를 들어 진리를 깨치듯 어린이들에게 부처님 말씀을 올곧게 전하기 위한 스님의 고민이 고스란히 화두가 된 것이리라.

그 사이 초라해 보이던 운문사 법당에도 따뜻한 봄볕이 가득 스며들었다. 스님은 원고지에 적어 놓은 가사들을 펼쳐 보며 “날마다 아이들과 어울려서 노래나 부르며 촐랑촐랑 다녔으니 큰스님 소리 못 듣는 것이 당연하지요”하며 환한 웃음을 머금는다. 운문 스님의 그 천진한 미소를 타고 올해도 아이들의 웃음소리 가득한 부처님오신날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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