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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법기암서 입적에 드는 건 내 어릴적부터의 꿈

기자명 법보신문
  • 기고
  • 입력 2006.05.04 14:32
  • 댓글 0

경주 흥륜사 선원장 혜 해 스님

금강산 신계사 참배길에 한 노 비구니 스님이 따라주는 차 한 잔을 마신 적이 있는 이는 별다른 말씀이 없어 그저 지나가는 참배객에게 차 한 잔 보시하는 마음씨 좋은 스님으로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차 한 잔을 우려내는 스님의 가슴 속에는 8·15해방과 한국전쟁이라는 격동의 한국사가 자리하고 있고, 차 한 잔 건네는 손길에 80평생 수행의 숨결이 배어있다. 신계사 대웅전 앞에서 스님은 내리는 빗 속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먼 산을 가리키며 힘주어 말했다. “저쯤에 법기암이 있을 거야!”


해방 후 남녘땅 밟고
효봉·성철 곁에서 정진


선정 상태서 큰 발광
‘불났다’소방차 달려와


‘무심’에 펑펑울다가도
금강산 떠올리리면 ‘미소’


법기암 한 번 오르려
여섯번째 신계사 머물러


비구니계에서 수행과 덕망이 높은 한 사람을 꼽으라면 흥륜사 선원장 혜해 스님을 떠올린다. 스님의 세납 60이 넘었을 때 한 스님이 조선시대 때 불타 폐사가 된 경주 흥륜사를 재건해 맡으라 했으나 “아직은 공부할 때”라며 변함없이 전국의 선원을 찾아 나섰을 정도로 스님은 수행의 한 길만 올곧이 걸었다. 흥륜사 선원을 맡은 것은 세납 70이 넘어서다.

24세때 훌훌털고 출가

흥륜사는 아도(阿道) 화상이 지은 사찰로 신라 최초 건립 도량이다. 한 때 폐허가 되었지만 법흥왕 14년(527)에 이차돈의 순교로 절을 다시 짓기 시작해 진흥왕 5년(544)에 완성 됐다. 진흥왕은 이 절을 ‘대왕흥륜사’라 하고 백성들의 출가를 허락하며 자신도 만년에 스스로 삭발, ‘법운’이라는 법명과 함께 이 사찰의 주지가 되었다.

이처럼 유서 깊은 흥륜사의 선원장이지만 혜해 스님은 벌써 금강산 신계사를 여섯 번째 찾았다. 더욱이 올해는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신계사를 찾은 터여서 그 감회마저 남다르다. 신라 최초의 사찰을 뒤로 하고 신계사에서 조그마한 암자 법기암을 그려보는 스님의 선기 어린 눈에도 그리움이 깃들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기특한 생각이긴 해. 내 집이 신의주 부근에 있었어. 집에서 멀리 보이는 바다를 보면서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늙어 죽은 후에 저 산과 바다만 남으면 어쩌나’하는 생각에 이불을 쓰고 펑펑 울었지. 왜 그토록 울었는지는 몰라. 그런데 한없이 슬프다가도 금강산 생각을 하면 마음이 편하고 금세 웃음기가 돌았어. 숙연인가 봐.” 일제 강점시대 때 어린 시절을 보낸 스님은 어려서부터 탁발 나온 스님을 만나면 “나도 따라가면 참 좋을텐데”하곤 했다. ‘여자가 출가하면 남동생이 안 좋다’는 속설도 나돌 때인지라 쉽사리 출가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금강산에서 내 생을 마칠 것’이라는 마음 하나만은 굳건히 했다.

세속 나이 열 아홉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남동생을 키우며 농사를 지었다. 드디어 남동생이 결혼하자 모든 것을 훌훌 털고 곧장 금강산으로 발길을 돌려 법기암 산문에 들어가 사문의 길을 걸었다. 그의 나이 스물넷이었다.

“그 때는 부처님 앞에서 다른 것 안 빌었어. 하루빨리 독립하게 해달라는 것뿐이었지. 어려서 들은 사명대사처럼 신통묘용한 힘을 얻어 나라를 구하고 싶었지.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꼭 그러고 싶었어 꼭.”

출가해 처음 맞은 겨울인 이월 초엿새 날을 스님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리던 그 해 겨울. 절 앞마당에 언 눈을 모조리 두드려 깨고는 24명의 빨래를 시작했다. 태산 같은 빨래는 하루 일이 아니었다. 스님은 도랑에 솥 하나를 걸어놓고 옷을 삶고 건져 낸 옷은 다시 겨울 도랑의 찬 물에 헹궜다. 한 벌의 옷을 몇 번에 걸쳐 이런 과정으로 잿물을 뺀 후에는 먹물을 들여야 했다. 손이 너무 시려 앞섶에 손을 모으고 녹일 즈음 은사 대원 스님이 곁에 왔다. “힘들지. 이렇게 많은 빨래는 처음 볼거야!” 엄격하기만 했던 은사 스님의 따뜻한 말 한마디였다.

법기암 근처에 불이 났을 때 사중을 피신시킨 후 법당 부처님 앞에 초연하게 앉은 스님이 바로 은사 대원 스님이다. 늘 관음기도를 하며 겨울이면 ‘법화경 산림’을 열었던 스님으로 기억하고 있다. 은사 스님의 엄함에 누구 하나 명을 거역하는 일이 없었다. “6.25 한국전쟁 전까지는 법기암에 계셨다고 들었지. 불 날 때도 법기암을 떠나지 않았던 스님인데 전쟁 중에 피신이라도 하셨는지…”

출가 1년이 된 해 유점사에서 ‘해방’을 맞았다. 해방의 기쁨과 함께 스님의 가슴 한 구석에서 새로운 원력이 뿜어져 나왔다. “이제 참말로 불법이 뭔지 알아야겠다.” 공산 정권 아래서는 수행이 어려워 금강산과 법기암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와야 했다. 가장 먼저 효봉 스님이 조실로 계신 가야산 해인사를 찾았다. 스님은 해인사 인근 토굴에서 참선을 하며 한철을 보냈다. 효봉 스님은 생사를 건 수행 끝에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타는 불속 거미집에선 물고기가 차를 달이네/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 흰 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라는 오도송을 내놓으며 깨달음을 얻은 곳이 바로 법기암이었기에 그곳 출신의 혜해 스님을 각별히 아껴주셨다.

1949년 스님은 해인사를 떠나 한국불교 현대사의 새로운 흐름을 창출한 결사도량 봉암사로 자리를 옮긴다. 당시 봉암사는 성철 스님을 중심으로 ‘오직 부처님 법대로 살아보자’는 원에 따라 공주규약(共住規約)을 제정해 추상같은 법도를 세워 오늘날 수행의 근간을 세운 ‘봉암사 결사’가 한창이었다.

혜해 스님은 봉암사 백련암에 거처를 정하고 성철 스님과 향곡 스님 밑에서 지도를 받았다. 이때 스님은 평생 참선 수좌의 길을 걷겠다는 굳은 의지로 왼손 가운데 손가락을 연비했다. 그리고 그때의 다짐을 잊지 않고 평생을 선방에서 생활하며 겸손과 검소를 목숨처럼 지켜왔다.

비구니계에서는 모르는 스님이 없을 정도지만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은 스님의 수행 일화 한토막이 있다.

1970년대 흥륜사가 복원된 후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혜해 스님은 다른 날처럼 선방에 좌정하고 선정에 들었다. 하늘에 별들이 총총히 빛나는 시간 “불이야!”하는 외침과 함께 느닷없는 종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 퍼졌다. 흥륜사 대중은 물론 잠자리에 들려던 마을 사람들까지 물동이며 괭이, 빗자루를 집어 들고 문밖으로 뛰쳐나왔고, 소방차까지 흥륜사로 속속 모여들었다. 흥륜사 선방에서 발한 불꽃은 하늘 위까지 치솟으며 경주 사정동 일대를 훤히 비췄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이 불꽃이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이 아닌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장엄한 환희와 편안함을 주는 것이었다. 흥륜사 대중들이 놀라 방문을 열었을 때 좌선중인 혜해 스님의 몸에서 강렬한 빛이 발산되고 있었다. 혜해 스님은 “무슨 일 일어났냐?”며 오히려 반문했을 뿐이었다.

60여년 참선수행 외길

비단 혜해 스님이 이러한 이적행 때문에 스님과 불자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상대를 존중하고 하심하는 마음, 9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선방에 나가 정진하는 모습, 지금도 작은 텃밭을 손수 일구고 검정고무신만을 고집하는 검소함 등, 스님의 삶 모두가 지남이고 지침이다.

“신계사에 머물러도 불사하는데 별다른 도움은 못 주지. 인부들이나 참배객들에게 이렇게 차 내는 것 밖에 못 해. 그저 있고 싶으니까 있는 거지.” 부처님오신날이 다가오지만 스님은 올해도 신계사에서 초파일을 보낼 순 없을것 같다.

“사실 나 혼자 오고가기는 어려워. 매번 스님들 도움으로 오고 갔는데 이번에도 법륜사 일문 스님 덕에 올 수 있었지. 다른 스님들은 돌아가 법회를 보아야 하잖아. 여기서 초파일 보내자고 하면 그건 내 과욕이지. 이제 좀 있으면 예불 올려야 해.”

신계사에서 조석예불 올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혜해 스님. 5월 12일 하안거 입제식을 봉행한 후 다시 신계사로 돌아오려 한다.

일곱번째 신계사를 들러 법기암에 오르지 못한다 해도 내년 초파일에는 법기암에 오르기를 바라는 소망은 혜해 스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소망일 것이다.

금강산=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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