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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 ⑨

기자명 법보신문

첫 발심할 때가 곧 정각 이루는 시기

음 발심할 때가 문득 정각이니
생사와 열반이 항상 함께이다
初發心時便正覺 生死涅槃常共和

<사진설명>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 보현행원품 국보 235호.

수행에 뜻이 있거나 혹은 대승불교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수행의 길에 들어선 보살이 가는 길은 얼마나 멀며,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나면 목적지에 이를 수 있으며, 또 어떠한 방편을 타고 갈 수 있는지 등에 대해서 적어도 한번쯤은 알아보았을 것이다.

삼승보살은 발심하고 삼아승지겁이라는 세월동안 수행한 후에 정각을 이룬다고 한다면, 『화엄경』에서는 일승보살이 처음 발심하면 곧 부처님 집에 태어나 머무르며, 초발심하는 때가 바로 정각을 이루는 때라고 함을 보았다.

그렇다면 초발심주를 포함한 십주의 수행위는 어떤 의미이며, 바로 이어서 전개되는 십행·십회향·십지의 수행은 왜 필요하며, 또 십지 다음 자리에 배대되어 있는 등각과 묘각의 깨달음은 초발심시변정각에서의 깨달음과 같은가? 아니면 다른가?

초발심시변정각은 특히 염의출가(染衣出家)한 출가보살이 신구의 삼업 등 10법(十法)을 관하는「범행품」에서 설파되고 있다. 10법에 대해서 무엇이 범행인지 관찰하여 제법에 두 가지 분별을 일으키지 아니하면 초발심시에 곧 정각을 얻는다는 것이다.

의상(義湘 625-702)은 「법성게」에서 초발심과 정각의 자리[位]가 서로 다르지 아니한 상즉(相卽)의 도리는 모든 계위가 육상(六相)으로 이루어져 원융한 까닭이라고 한다.

상즉이란 완전히 다른 두 존재[事法]가 온전히 그 체성이 같음인데, 이는 물과 파도가 둘이 아니며[水波不離] 동쪽에서 불어온 바람에 의한 파도[東風波]와 서쪽에서 불어온 바람에 의한 파도[西風波]가 서로 다르지 아니한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것은 하나와 전체, 하나와 많은 것, 하나와 열, 부분과 전체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부분과 전체가 서로 용납하고 서로 들어가는 묘용[相容, 相入]도 자재하게 된다. 의상은 이들 상즉과 상입이라는 체와 용의 도리를, “하나가 일체이고 많은 것이 하나이다[一卽一切多卽一]”와 하나 가운데 일체이고 많은 것 가운데 하나이다[一中一切多中一]” 로 표현하고 있으며, 그것을 공간과 시간과 수행계위 등에 배대하여 드러내고 있다. 또 이를 동전 10개의 비유로 설명하고도 있다.

육상은 총상·별상·동상·이상·성상·괴상이니 모든 바라밀행은 이 육상으로 닦고 내지 제법은 모두 육상으로 이루어져 원융하다는 것이다. 의상은 이를 법계도인(法界圖印)으로 설명하고 법장(法藏 643-712)은 기와집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기와집’이 총상(總相)이라면 기와집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로서 부분들인 기와· 서까래· 대들보 등은 별상(別相)이다.

기와 ·서까래· 대들보 등이 각기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이상(異相)이며, 기와· 서까래· 대들보 등이 어우러져 전체 집 모양을 이루는 것은 동상(同相)이다. 기와· 서까래· 대들보 등이 각기 자기 역할을 하는 것이 괴상(壞相)이며, 이들이 통틀어 집 역할을 하는 것이 성상(成相)이다. 그런데 이들 육상이 서로 다르지 아니하여 원융하다는 것이다. 가령 총별이 원융함을 본다면 부분인 별상이 전체인 총상과 다르지 않은 것이니, 그것은 인연법이기 때문이다. 즉 서까래는 기와나 대들보가 있는 집의 인연 속에서 서까래이기 때문에 서까래가 곧 집이다. 만약 서까래가 집이 아니고 서까래가 작은 힘일 뿐이라면 단견과 상견의 허물이 있으니, 서까래가 작은 힘일 뿐이라면 집을 이루지 못하게 되므로 단(斷)이고, 원인이 없이 온전한 집이 있다고 집착하면 상(常)이다. 서까래가 없으면 온전한 집이 아니고 파옥일 뿐이다.

이러한 상즉 경계에 대하여 조선시대 설잠(雪岑)은 “선재동자가 법계를 여의지 아니하고 두루 일백성을 지나며, 초심을 건너뛰지 아니하고 문득 미륵의 누각에 오르니, 무명의 실성이 곧 불성이고, 환화의 공신(幻化空身)이 곧 법신이다”라고 노래하고 있다.
깨달음의 보리심 자체는 어디서나 다르지 않다. 초발심주에서도 구경각과 다르지 않은 깨달음이다. 매순간 새록새록 성불하나 예부터 부처이다. 단지 발심해서야 그 도리를 알았을 뿐이니, 꿈속에서 30역을 돌아다녔으나 제자리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아니하였음을 꿈을 깬 뒤에야 아는 것과 같다. 초발심하고도 펼쳐지는 42계위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타행이고 불국장엄이다. 닦되 닦음이 없고 닦음이 없되 닦는[修而不修 不修而修], 한량없는 무진 장엄행인 것이다.

 해주 스님(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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