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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일본 불교계는 왜 조선 포교에 나섰나?

기자명 법보신문

메이지 정부 억불정책 타개 위한 日불교계 자구책

日 정부, 식민지 포교에 불교계 나설 것 종용
조선 침략이후 1911년까지 167개 분원 건립
韓 불교, 민족의식 희박…120개 사찰 관리신청

 
<사진설명>일본 정토 진종 대곡파 동본원사파에서 개교사로 파견한 오쿠무라 엔싱.

막부(幕府) 정권 하에서 일본 불교계는 막부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특히 동본원사의 법주였던 겐뇨(嚴如)는 186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위패를 봉안하는 영의전(靈儀殿)을 절 안에 새로 건립하고 막부정권과의 유대 관계를 재확인하였다.

1866년 막부 정권이 2차로 조슈한(長州藩)을 토벌할 때는 군수품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모든 신도들에게 전(錢) 백필(百疋)과 쌀 두 되씩을 납부하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1867년 막부의 쇼군(將軍)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가 정권을 천황에게 반환할 것을 선언하였음에도 말사(末寺)의 승려들로 군대를 조직해서 막부의 지휘하에 편입시키고자 하는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1868년 막부정권과 천황측의 내전에서 막부는 타도되었고 천황을 정점으로 한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정부가 탄생하였다. 새롭게 탄생한 정부는 천황을 인간의 모습을 한 살아있는 신으로 섬기도록 하는 신도(神道) 신앙을 강조하였다. 신도은 천황숭배 내지는 조상숭배를 핵심으로 하는 국수주의적 성격이 강한 일본의 고유한 종교이다.

메이지유신 이전까지 일본 종교의 주류는 불교로서 신도는 종속적인 위치에서 불교와 신도가 결합된 신불습합(神佛習合)의 상태로 신봉되어왔지만 이때에 와서는 신불(神佛)을 분리하는 정책이 시행되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신도는 천황제 국가의 지도이념이 되어 거의 국교적인 지위를 확립하게 된다.

반면에 불교는 대대적인 탄압을 받아서 폐불훼석(廢佛毁釋) 사태가 일어난다. 폐불훼석이란 불상을 훼손시키는 것으로 불상의 목과 팔이 잘려 나가는 수난을 당하였다. 불교계는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정권과 타협책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식민지 포교였다.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를 개척할 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종교계의 도움이다.

종교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위안을 주고 자선을 베풀라고 가르침으로써 내세의 안락을 보장해 준다. 종교는 식민지 원주민들의 침략자에 대한 반감을 무마시키는데 활용되어졌다.

따라서 식민지에 포교사를 파견하는 교단의 지도자들은 정치권과 밀접한 관련을 가졌으며, 포교사들에게는 특별한 역할이 주어졌다. 그 역할이란 식민지의 정세를 본국에 보고하고, 원주민이 침략자에게 가지는 반감을 완화시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메이지 유신 정부를 건설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에도 신페이(江藤新平)는 1870년에 이미 대외침략정책에 불교계를 활용하는 의견서를 제출한 바 있다. 이러한 의견서를 접한 메이지 정부는 불교계에 식민지 전도에 나서줄 것을 종용하였다. 메이지 정부에 빚을 지고 있었던 불교계는 탄압에서 벗어나 활로를 찾으려는 자구책의 일환으로 북해도와 천도열도 그리고 조선 등지의 식민지 포교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문호개방과 더불어 일본 불교 종파들은 앞을 다투어 조선에 포교사를 파견하였다. 이들은 정치권과 연결을 가지고 처음부터 계획적이고, 단계적으로 포교 확장을 기하였다. 특히 조선과 일본 사이에 큰 정치적 사건이 있을 때마다 입지를 강화하였다. 정토 진종 대곡파 동본원사파가 1877년에 부산에 동본원사 별원을 설립하고 오쿠무라 엔싱(奧村圓心)과 히라노 게이스이(平野惠粹)를 파견하였으며 이들은 부산·원산·광주 등 개항장과 인근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오쿠무라는 일본 쿄토(京都) 동본원사의 말사인 나가사키(長崎)의 고덕사(高德寺)주지였다. 고덕사는 원래 임진왜란 이전에 부산에 있던 일본 사찰로서 오쿠무라 엔싱의 14대 할아버지인 오쿠무라 쥬신(奧村淨信)이 세운 절이다.

오쿠무라 쥬신은 일본 전국시대 통일 기반을 형성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가신으로 있다가 본원사로 출가하여 1585년에 부산으로 건너와 고덕사를 세우고 일본 불교의 포교에 힘썼다. 그 후 임진왜란 직전인 1591년에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돕기 위해 귀국하였다가 임진왜란 때는 침략군을 따라 종군하였다.

대곡파 동본원사파에 이어 1881년에는 일련종(日蓮宗)의 와타나베 이치웅(渡邊日運)이 건너와서 일련종 포교소를 설립하였다. 이후 쿄토(京都) 묘각사의 주지였던 아사히 미츠(旭日苗)가 부산으로 건너와서 본국의 관장과 협의하여 ‘일종해외선교회’를 조직하고 각지에 지부를 설치하여 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조선침략을 노골화하였다.

대곡파 동본원사파와 일련종·정토종·대곡파 서본원사파 등은 전쟁터에 종군승을 파견하였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각 종파들은 세력 확장에 고심하였고 조동종·임제종·진언종 등이 별원 또는 포교소를 개설한 결과 1911년까지 진종·정토종·일련종·조동종·진언종·임제종 등 6개 종파가 전국에 설립한 별원 및 포교소는 167개나 되었다.

일본 불교 포교사들은 처음에는 개항장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나 점차로 내륙 깊숙한 곳까지 침투하였다. 일본 불교 별원이나 포교소는 본국의 재정적인 후원을 받아 유치원과 각종 실업학교를 세워 위생적인 생활을 가르치고 청소년들에게 직업을 가질 수 있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빈민구제 사업을 하기도 하였다. 일본 불교 세력은 자비를 앞세워 작은 선을 베풀었지만 그 이면에는 식민지인들의 저항 의식을 약화시키는 더 큰 악을 은폐시키고 있었다.

일본 승려 가운데는 한일강제 병합에 적극적으로 활약한 승려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승려는 다케다 한시(武田範之)이다. 그는 지쿠젠 구루메(筑前 久留米) 지방에서 태어나 1883년 경 니가타(新瀉)의 현성사(顯聖寺)에서 승려가 되었다. 그는 1892년 부산으로 건너와 낭인 생활을 하면서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가담하여 히로시마 감옥에 투옥되었으나 무죄로 풀려났다. 그는 이용구(李容九)·송병준(宋昞畯) 등이 움직이던 일진회의 고문이 되어 한일강제병합운동을 추진하는데 협력하였다.

다케다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종단이었던 원종의 종정이었던 이회광과도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였다. 이회광은 다케다의 조언을 받아 1910년 원종과 일본 조동종과의 합병운동을 벌이게 된다. 이처럼 다케다는 정치권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조선불교를 일본 불교 조동종과 합병시키려는 음모를 배후에서 조종한 승려였다.

일본 불교의 세력 확장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성립된 통감부의 후원을 받아 한층 적극적으로 전개된다. 1906년 통감부는 ‘종교의 선포에 관한 규칙’이라는 법령을 공포하였다. 이 전문 6조와 부칙 2조로 된 법령의 내용은 일본 종교의 한국 포교를 허용하는 것이 골자이다. 그 가운데 일본 사찰이 한국의 사찰을 관리할 수 있도록 한 이른바 ‘관리청원’을 허용한 것이 특징이다. 관리청원이란 한국의 사찰이 일본 불교 어떤 종파와 연합 또는 말사 가입을 의미하는 일본식 표현이다.

관리청원을 신청하여 통감부의 승인을 받은 사찰은 김천 직지사·철원 사신암·박천 심원사·과천 연주암 등 많은 사찰이 있었다. 관리청원은 신청하였지만 통감부의 승인을 받지 못한 사찰들 가운데 대표적인 사찰만 열거해 보자면 합천 해인사·동래 범어사·구례 화엄사·하동 쌍계사 등을 들 수 있다. 그 결과 1911년 사찰령이 공포되기까지 약 120여개의 사찰이 관리청원을 신청한 것으로 드러났다.

<사진설명> 일본 조도동종 승려로서 원종과 일진회 고문을 지냈던 다케다 한시(武田範之:앞열 오른쪽)와 일진회 회장 이용구(앞열 왼쪽)의 기념사진.

당시 불교계는 조선왕조 정부의 오랜 억압정책 때문에 상층부의 일부 승려들을 제외하고는 교육을 받지 못한 까닭에 제국주의 세력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였다. 상층부의 승려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받은 교육은 한학 교육이었기 때문에 제국주의 세력의 성격을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런 까닭에 조선불교계는 일본 불교에 대해서 다소 이질적인 감을 느끼기는 했지만 대체로 우호적인 분위기였던 것 같다.

일본 불교 종파들은 교육과 사회사업 등을 통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식민지 시기 불교계에서 저항의식이 투철했던 한용운마저도 1908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조동종의 대표와 교류하고, 조동종 대학에서 일본어와 불교를 공부하려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1910년 승려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는 건백서를 중추원과 통감부에 각각 제출하였다.

그는 당시 서구의 서적들을 읽고서 사회진화론을 수용한 불교계에서는 보기 드문 선각자였는데 그의 일본 인식이 이 정도였는데 다른 승려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통감부가 ‘종교의 선포에 관한 규칙’을 공포하였을 때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사찰들을 포함해서 많은 사찰에서 관리청원을 신청한 것을 보면 그러한 현상은 잘 드러난다. 관리청원을 신청한 이유가 의병들로부터 당하는 피해에서 벗어나고자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니 불교계의 민족의식은 희박하였다고 할 것이다.

당시 산악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의병들이 사찰을 찾아와서 식량이나 기타 물품을 요구하고, 간혹 일본 군대와의 전투에서 사찰이 불에 타는 경우가 있었다. 이 때 일본 사찰에 병합되거나 혹은 말사로 등록된 사찰은 일본 사찰이기 때문에 손쉽게 일본군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현상을 승려들의 의식수준이 낮았다고만 평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사태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500년 동안 지속된 조선왕조의 억불정책이 승려들의 비판 의식을 마비시킨데서 찾아져야 한다.

500년 세월 동안 불교계의 입과 귀는 막혀 있었다. 개항으로 인해서 외세가 유입됨으로써 하루 아침에 뜨여진 눈과 입인데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겠는가.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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