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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승려 도성출입금지해제 배경과 의미

기자명 법보신문

조선 첫 불교공인…외세에 의한 타율적 결정 한계

 ‘경국대전’에도 도성출입 금지 없어
연산군-현종 때 불교 극심한 탄압
동학군, 정부에 승려 도성출입 요구
일련종 전파 목적 일본 주도 아쉬움

<사진설명>도성출입 금지 해제 전후 시기의 남대문 사진. (사진제공=민족사)

#조선은 왜 승려의 도성출입 금지시켰나.

고려왕조를 타도하고 성립된 조선왕조 정부는 유교를 국시로 정하였다. 고려시대 불교는 국교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국시가 유교로 바뀌었다는 것은 불교계의 탄압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까닭에 조선왕조 정부의 불교 탄압은 세월이 흐를수록 강화되어 나타난다. 16세기 말에 완성된 경국대전에는 승려들의 도성출입을 금하는 내용이 없다. 다만 승려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3개월 안에 선종 혹은 교종에 신고하여 불경을 외우는 시험을 거쳐 예조를 통해 국왕에게 보고하고, 도첩을 발급받기 위해서 정전(丁錢)을 납부하여야 하였다. 그렇지만 새로운 사찰을 창건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특히 연산군과 현종 연간을 거치면서 불교는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18세기 초 영조 때 편찬된 속대전에 따르면 군역을 피하기 위하여 승려가 되는 것 자체를 금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일을 해서는 안된다고 규정한 형전의 금제조(禁制條)를 살펴보면 승려가 함부로 도성에 들어오면 곤장 100대에 처하고 영구히 노비로 삼는다고 규정되어 있다. 승려가 도성을 출입하는 것은 중죄에 해당되었다. 왜 조선왕조 정부는 승려들의 도성출입을 봉쇄하였을까. 도성 안은 지금 시내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승려들이 도성에 들어와서 하는 일은 포교 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당시의 집권 세력들은 불교가 많은 사람들에게 확산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왜냐하면 고려의 집권 세력이었던 권문세족이 신봉하던 종교가 불교였기 때문에 불교가 전파된다는 것은 조선의 집권층에 저항하는 집단이 생겨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양반 사대부는 승려들을 천시하였고, 고된 역을 부과하였다. 불교 교세가 확장되는 것은 양반 사대부층에게는 하나의 위협적인 요소였던 것이다. 집권층은 불교의 명맥이 끊어지기를 바랐지만 불교는 왕실의 비빈(妃嬪)과 부녀자들을 중심으로 신앙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학자들 사이에서도 불교는 학문의 대상으로서 연구되고 있었다.

조선의 큰 학자였던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는 승려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고,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사노 젠레이가 도성해금 건의한 이유.

사노 젠레이(佐野前勵)는 1895년 일련종 관장대리의 자격으로 조선으로 건너왔다. 그는 청일전쟁 승리의 여파를 타고 조선에서 포교를 확장할 목적으로 호리(堀日溫)와 시부다니(澁谷文英)을 데리고 들어와 일본 공사관의 알선으로 법화경·안국론(安國論)·향로 등 헌상품을 궁내부에 바쳤다.

왕실로부터 답례품으로 특별히 제작된 화로와 돗자리·호피 등이 일련종 관장인 고바야시(小林)에게 내려졌다. 사노는 대원군을 비롯한 고위 관리들을 만나 조선의 승려들도 일본 승려처럼 자유롭게 도성을 출입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을 교섭하여 사전에 묵인을 받은 후에 건백서를 제출하였다. 1895년 3월 29일(양력 4월 3일)자 『고종실록』에 의하면 총리대신 김홍집, 내부대신 박영효가 ‘승려들의 입성 금지령을 완화할 것을 상주하여 윤허를 받다’라고 되어있다. 승려들이 도성을 마음대로 출입하게 허용된 것은 불교계로 보아서는 분명 큰 사건이었다. 이것은 조선왕조 정부에서 불교의 공식적인 포교를 허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도성을 출입할 수 없었을 때 불교는 음성적인 방법으로 포교될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도성 안에서 자유롭게 포교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사노는 조선인을 대상으로 일한학교(日韓學校)를 설립할 계획을 가지고 700여 평의 토지를 구입하고, 일본 일련종 학교에 유학을 시킬 조선 학생의 선발을 김윤식에게 의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도성해금을 사노의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표면적으로 나타난 현상까지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 이면에 내재된 요인들을 살펴보는 것은 역사의 심층적 이해라는 측면에서 중요하다. 도성해금이 단행되기 한 해 전인 1894년은 아래로부터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한 해이다. 동학농민전쟁은 안으로 부패한 정권을 타도하고,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에 맞서 국권을 수호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조선왕조 정부는 동학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혁안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폐정개혁안의 주요 골자는 경제적으로 무명잡세를 폐지할 것, 공사채를 막론하고 지나간 것은 폐지할 것, 토지는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서 경작하게 할 것 등이다. 사회적으로는 탐관오리와 횡포한 부자들을 엄벌할 것, 인재 등용에 공정성을 기할 것, 노비문서를 불태울 것, 칠반천인(七班賤人)의 대우를 개선할 것 등이다. 이러한 개혁안을 시행하기 위해서 국가에서는 군국기무처라는 새로운 기구를 신설하였다. 약 3개월간 존속한 이 군국기무처에서는 약 208건의 신법령을 의결·공포하였다. 그 법령 가운데 승려의 도성출입을 금하는 법을 폐지할 것이 들어있다. 1880년대 전반기부터 조선왕조 정부는 천주교와 개신교 포교의 자유를 묵시적으로 용인하고 있었다. 1895년 도성해금이 이루어졌지만 그 이후에 여러 번 번복되는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백범 김구가 마곡사에서 승려가 된 이후 1896년 금강산으로 가던 중 한양에 들렀다가 다시 부활된 승려의 도성출입 금지령 때문에 성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무렵 도성출입금지 법령은 치폐를 반복하였던 것 같다.

도성해금의 숨은 주역으로 박영효를 지목하는 견해도 있다. 박영효는 개화파로서 이동인을 신임하여 순금으로 된 길이 2촌(寸)둘레 1촌(寸)정도 되는 원통 막대기 금봉(金棒) 4개를 주어 일본으로 건너가 근대 서적과 물건을 구해 오도록 한 사실이 있다. 당시 박영효는 내부대신의 지위에 있었고, 불교에 귀의하고 있었다. 외부대신 김윤식도 유학자이면서 불교에 이해가 깊었다. 박영효는 승려의 도성출입 해제를 관장하는 부서의 최고 책임자였으므로 사노의 건의를 수용하여 도성해금을 결정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리라는 추론은 설득력을 가지고 있지만 자료적인 뒷받침이 없는 것이 흠이다.

#도성해금에 대한 조선불교계의 반응은.

조선의 승려들 가운데는 사노가 추진한 도성해금을 일련종 포교를 위한 작업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을 간파한 승려는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일본인 학자인 다카하시 토오루(高橋亨)는 그러한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이조불교(李朝佛敎)』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사노가 경성에 머무른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조선불교는 생기가 없고 승려들은 종승(宗乘)과 종지(宗旨)의 신념도 없다는 것을 간파하였다. 좋은 방편을 활용한다면 조선의 승려들을 일본 불교의 종지로 개종시켜 일련종으로서 조선불교계를 통일시키는 것이 반드시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러한 때에 조선승려를 위하여 파천황의 은혜를 베푼다면 조선 승려들을 일련종으로 유인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사노가 포착한 것은 실로 조선승려의 입성해금을 수행한 것이다.” 다카하시는 사노가 도성해금을 건의한 원인을 일련종의 포교 확장에 있다고 보고 그러한 사실을 비판하였다.

조선의 승려들 가운데는 도성해금을 큰 은혜로 여기는 승려도 있었다. 그 가운데는 사노에게 편지까지 보내서 치하를 한 승려도 있었으니 수원 용주사의 상순(尙順)이라는 법명을 쓰는 최취허(崔就虛)는 그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 그는 도성해금을 ‘오백년의 원통함과 굴욕을 풀어 주어서 감사하다’는 내용의 편지를 사노에게 보냈다.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도 도성해금은 환영되고 있었다. 이능화의『조선불교통사』에 의하면 일련종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왕실의 성수무강(聖壽無疆)과 중흥 유신의 성업을 축하는 대법회를 성안의 북일영에서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는 화계사·용주사·금강산·남한산성·북한산성의 승병 대장들과 조선 승려 300여명, 김윤식 외부대신 등 정부고관 20여명, 일본인 명사와 일반인 등 약 1만 5천 여 명이 참석하였다. 이능화도 이 자리에 참석하여 성황리에 진행되는 법회를 보고 기뻐하였다고 한다. 당시 이 자리에 모인 군중들이 이 법회를 보는 시각은 상반되게 나타났다.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승려들의 도성출입이 자유롭게 허용된 사실을 불교 발전의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반면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중이 성 안에 들어와 법회를 가지는 사실에 대하여 가증스럽게 생각하는 부류도 있었다’고 한다.

승려들의 도성해금 사실에 대하여 불교계는 크게 환영하였지만 일반인들 사이에는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입장이 공존하고 있었지만 대체적인 분위기는 우호적이었던 것 같다.
도성해금은 조선왕조 정부가 불교의 포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그것이 일본 일련종 승려인 사노 젠레이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왜냐하면 밀려드는 서구의 물결과 민중들의 지식 정도의 향상으로 볼 때 도성해금은 시대의 대세에 순응한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사노의 건의가 있기 이전부터 심도 있게 논의되어 왔기 때문이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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