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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원흥사 창건과 사사관리서 설치

기자명 법보신문

도성출입 허가 후 왕실서 세운 첫 사찰…13도 관할

사사관리서 두고 관계법 ‘국내사찰현행세칙’ 제정
봉건틀 못 벗었지만 불교계 자율권 보장은 큰 의미
왜색불교  대응 위한 대한제국 마지막 노력 시각도

<사진설명>1902년 동대문 밖에 창건된 원흥사 전경 (사진제공=민족사)

1895년 일본 일련종 승려 사노 젠레이(佐野前勵)가 제출한 건백서에 의해서 승려들의 도성출입금지가 해제되었다. 이것은 조선왕조 정부가 불교의 공식적인 포교를 허용하였다는 뜻이다. 그로부터 7년 후인 1902년 동대문 밖에 원흥사(元興寺)라는 사찰이 창건되었다.

원흥사의 창건 연대에 대해서는 2가지의 학설이 있다. 타카하시 토오루(高橋亨)는 『이조불교(李朝佛敎)』에서 원흥사의 창건 연대를 1899년으로 서술하였고, 이능화(李能和)는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에서 1902년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황현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원흥사의 창건을 1906년이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1904년에 원흥사를 관할하던 사사관리서(寺社管理署)가 폐지되기 때문에 황현의 1906년 설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런데 1906년 1월 6일자『대한매일신보』에 의하면 ‘동대문 밖 영미정(潁眉亭)에 소흥사(紹興寺)를 창설하고 십삼도 사찰을 통할하게 한 사실은 본보에 이미 보도하였거니와 이제 그 사명(寺名)을 원흥(元興)이라 고치고…’라는 기사가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원흥사 이전에 소흥사라는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신문 1901년 12월 30일자에 ‘근일에 어떤 사람이 소흥사를 창설하고 각 도 사찰을 통할하는데 그 총사장(總寺長)은 이근택(李根澤) 씨(氏)오, 그 외는 부사장(副寺長), 총무, 법주, 총섭 등 제위(諸位)이더라’라는 기사를 읽을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원흥사의 창건은 1902년이지만 그 전신인 소흥사의 창건 연대는 적어도 1901년 또는 그 이전이 되는 셈이다. 1902년 1월 4일 원흥사의 개당(開堂) 법회가 열렸는데 승려와 일반 신도 800여명이 모여 일대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원흥사는 왜 세워졌을까. 창건 목적에 대해서도 몇 가지 주장들이 있다. 첫째, 국가의 안녕과 황실의 기복을 위하여 창건되었다는 것이다. 황실은 원흥사의 창건을 위하여 내탕금 20만냥을 하사하였고, 원흥사 내에 고종 황제의 위축전각(位築殿閣)과 명성황후의 원당(願堂) 등을 준공하였다. 이후 지속적으로 황실과 관련된 행사가 거행된 사실이 당시 신문 지상에 보도되는 것으로 볼 때 이 주장은 설득력을 가진다.

둘째, 십삼도 사찰을 통할하기 위한 기구의 필요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곧 이어 원흥사에 사사관리서(寺社管理署)를 설치하는데서 뒷받침된다. 대한제국 정부는 1902년 4월 11일 「포달(布達)」 제80호로 관리서를 설치한다는 사실을 공포하였다. 이어 4월 15일에 당시 군부 포공국장(砲工局長)이던 종이품 가선대부 권종석(權鍾奭· 후에 권중석으로 개명함)을 관리자로 임명하였다. 셋째, 일본 불교 특히 정토종의 교세가 날로 위세를 떨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서 국가에서 경기 지방의 승도(僧徒)를 모집하고 정토종의 회원들을 흡수함으로써 정토종을 고갈시키려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정토종 개교사로 원흥사의 개당 법회에 참석하였던 히로야쓰 싱쓰이(廣安眞隨)에 의해 제기된 것이다. 당시 일본 불교가 세력 확장에 힘쓰고 있던 때이므로 이러한 목적이 있었음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일본 불교 특정 종파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대한제국의 수사찰(首寺刹)이 세워졌다고 하기에는 우리 역사를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아닐까. 원흥사는 황실의 안녕을 기원하고, 13도 사찰을 관할하기 위한 목적에서 창건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02년 7월 사사관리서의 책임자인 권종석의 이름으로 「국내사찰현행세칙」36개조가 발표된다. 이 무렵 사사관리서는 원흥사에서 수진방(壽進坊) 제용감(濟用鑑) 자리로 이전하게 된다. 아마도 원흥사가 동대문 밖에 위치하여 궁궐로부터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마침 제용감이 없어지면서 도성 안으로 이전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국내사찰현행세칙」은 대한제국 시기 불교계를 관할하는 법령으로 대한제국 불교 정책의 성격이 잘 나타나 있다.

대한제국이 사사관리서를 설치한 사실에 대하여 당시 많은 사람들은 지금까지 방치하여 왔던 불교계를 제도권으로 편입시킨 것을 환영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정치권의 종교 간섭이 초래할 수 있는 폐단을 생각하지 않고, 조선왕조 정부의 불교 탄압만을 염두에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왕조 정부가 500여년 동안 불교계에 취한 탄압정책을 생각하면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불교계의 자율권을 보장한 이 법령은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이 법령은 봉건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전근대적인 요소가 다분히 남아 있다. 이 법령의 성격은 제정 배경을 설명한 연의(演議)에 함축적으로 드러나 있는데 그 골자는 다음과 같다. ‘승려들을 규제하는 법령이 없어 국왕의 감화가 불교계에 미칠 수 없었다. 승려라고 해서 어찌 백성이 아니겠는가. 이제 관리서를 세워 승려들을 감화시키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 연의는 조선왕조 정부가 취했던 불교계 비하(卑下)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며 승려들을 어리석은 교화의 대상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 법령은 승려들의 정치에 대한 발언을 엄금하고 있다. 설령 정치권에 부정과 비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승려들은 그것을 비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명문화하고 있다. 또 승려가 되기 위해서 일정한 규비금(規費金)을 납부하도록 하는 것도 봉건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불교계를 규율하는 법령에 부모와 스승에게 효도하고 공경하며, 국가에 충성할 것을 강조하는 유교 윤리를 강요하고 있다.

「국내사찰현행세칙」은 이전 시기에 비해서 불교계의 자주적인 발전 가능성을 보장하는 면도 있다. 그것은 불교계의 수장인 좌교정(左敎正)을 임명하지 않고 승단에서 선출하도록 한 점이다. 이것은 불교계의 자율권을 보장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반 승려의 징계포상에 관한 규정은 사사관리서에서 마련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 승려가 현행범일 때는 그 경중에 따라서 죄가 가벼울 경우에는 자체적으로 해결하고 사안이 중대할 경우에는 관리서에 보고하여 지시를 받도록 하였다.

그리고 사찰 형편에 따라서 학교를 설립하고 승려 중에서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여 교육시킬 것을 권장하였다.

인재를 선발하여 교육시킬 것을 권장한 조항은 불교계 발전을 고무시키는 긍정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권유에 따라 불교계는 1906년 원흥사 안에 명진학교(明進學校)를 설립하고, 근대적인 교육을 실시하게 된다. 나아가서 일반 사원의 제반 잡역을 혁파하라는 것이었다. 관리 및 이속배(吏屬輩)의 토색적인 행위에 일체 응하지 말라는 것을 명문화해 주었다. 이제 불교계도 다른 종교 단체들과 비슷한 조건에서 포교와 여러 가지 사업을 할 수 있는 계기를 얻었다고 할 것이다.

「국내사찰현행세칙」은 원흥사를 수사찰(首寺刹)로 하고 각 도에 중법산을 두어 사찰을 일원적으로 통할하게 하였다. 당시에 선정된 16개 중법산은 다음과 같다. 경기좌도(京畿左道) 봉은사(광주)△경기우도 봉선사(양주)△경기남도 용주사(수원)△충청남도 마곡사(공주)△충청북도 법주사(보은)△전라남도 송광사(순천)△전라북도 금산사(금구)△경상우도 해인사(합천)△경상남도 통도사△경상좌도 동화사(대구)△강원남도 월정사△강원북도 유점사△함경남도 석왕사(안변)△함경남도 귀주사(함흥)△평안도 보현사(영변)△황해도 신광사(해주) 등 이다. 이 중법산은 1911년에 조선총독부가 공포하는 「사찰령시행규칙」에 명시된 30본사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경제적인 부분에 있어서 각 사찰은 관리 대상인 전답·산림 등의 자산과 불상·탑·부도·범종 등 문화재적 성격을 띠는 유물 목록 3부를 만들어야 하였다. 그 가운데 1부는 문서를 만든 사찰에 두고, 1부는 중법산에 두게 하고 1부는 사사관리서에 제출하게 하였다. 이것은 간승배(奸僧輩)들의 농간과 투매를 방지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제출기한과 제출하지 않았을 경우에 처벌에 관한 사항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전근대사회의 법령이 지니는 한계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겠다. 끝으로 국내사찰현행세칙에 명시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관리서의 판정을 기다려서 시행할 것을 규정하였다.

사사관리서는 「국내사찰현행세칙」의 시행을 관리·감독하는 기구였다. 앞에서 언급한 점들을 미루어 보면 대한제국의 불교정책은 이전 시기에 비해서 많이 나아지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시정되어야 할 많은 부분이 남아 있었다. 1904년 사사관리서는 소속 부처인 궁내부와 의정부 내각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서 소관 사무를 내부(內部)로 이관시키고 폐지되기에 이른다.

사사관리서 폐지 원인에 대하여 여러 가지가 거론되기도 하지만 근본적인 것은 불교계가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자주권을 수호할 수 있을 만큼 능동적으로 대처할 만한 역량이 갖추지 못한데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당시 국내외 정세는 일본이 노골적으로 한반도의 침략을 가속화하던 시기였고, 대한제국 또한 자주권을 지켜내지 못하던 때였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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