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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구국원력 성지 담불라 석굴사원

기자명 법보신문

타밀 맞서 14년 저항 찬란한 벽화가 전하는 눈부?랑카?신심

<사진설명>흑갈색의 바위를 깍아만든 랑기리 담불라 비하라 입구. 석굴사원이라는 애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스리랑카에는 고속도로가 없다. 일정 구간 사용 요금을 받고 주요 도시를 직통으로 연결해주는 차량 전용 도로가 없다는 말이다. 덕분에 모든 도로는 보행자들과 함께 사용해야 한다. 간혹 짐을 운반하는 코끼리들과 나란히 길을 가야 하는 경우도 있다. 무엇보다도 낯선 풍경은 어디에서도 신호등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니 보행자를 위한 횡단보도나 신호대기로 인한 정차 따위는 애초에 걱정할 바가 아니다. 운전자들은 우회전이든 좌회전이든 가릴 것 없이 앞, 뒤, 양 옆에서 오는 차들을 적당히 피해 요리조리 잘도 빠져 나가며 각자 제 갈 길을 간다. ‘안전 운행’을 위해 다른 차들에게 아낌없이 경적을 울려주며 도로를 달리는 스리랑카 운전자들의 솜씨에 이방인들은 그저 혀를 내두를 뿐이다.

그러니 절대 과속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지만 스리랑카 운전자들 생각은 좀 다른 듯하다. 차량이 많지 않은 도로에서 차는 마치 경주 연습이라도 하듯 거침없이 속도를 낸다. 우리나라 지방도로에 해당할법한 편도 1차선의 구불구불한 도로를 휘청거리듯 내달리는 차에 몸을 싣고 있자니 어지간히 피곤하지 않고서는 한숨 늘어지게 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덕분에 도로변 수풀 속에서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육중한 몸을 날렵하게 움직이는 야생코끼리를 볼 수도 있었지만.

스리랑카 최대의 석굴사원인 랑기리 담불라 비하라(Rangiri Dambulla Vihara)가 있는 소도시 담불라(Dambulla)는 아누라다푸라와 캔디를 이어주는 간선도로 중간 즈음에 위치하고 있다. ‘스리랑카 최대의 석굴이 있다’는 타이틀에 비해서는 그저 작고 소박한 시골마을로 보인다. 시가지는 비교적 사람들로 북적이지만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위치한 성지라는 느낌이 들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석굴사원이 있다는 거대한 흑갈색의 바위산은 평원 한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모습이 한 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은 성지임을 느끼게 해준다.

수도 뺏기고 바위산에 은신

<사진설명>다섯 개의 석굴 중 가장 규모가 큰 제2석굴의 내부 56개의 불상과 화려한 벽화에 입이 다물어 지지 않을 지경이다.

사원으로 올라가는 길은 꽤 험난하다. 경사도 심하고 계단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숨을 헐떡이며 입구에 다다르면 무릎을 탁 치며 “아하, 이래서 여기에 사원을 조성했구나”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평원 한가운데 우뚝 솟아 오른 바위산의 높이는 비록 180여 미터에 불과하지만 지평선까지 내달리듯 트인 시야는 사방 수십 킬로미터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적에게 쫓겨 몸을 숨겨야할 이에게 이곳은 더 없는 은신처, 요새 그 자체였던 것이다.

이곳에 석굴 사원을 조성한 왓타가마니 아브하야(Vattagamani Abhaya) 왕은 기원전 103년 왕위에 올랐지만 타밀족의 침입을 받아 왕위에서 쫓겨나는 모욕을 겪고 이곳 담불라까지 밀려 내려왔다. 타밀족에게 수도인 아누라다푸라를 빼앗긴 왓타가마니 왕에게 랑기리 바위산은 언제 있을지 모를 적의 침입을 관찰하며 몸을 숨길 수 있는 더 없는 은신처였다. 이곳에서 왕좌 복귀를 위해 14년간 인고의 세월을 보낸 왕은 기원전 89년 드디어 아누라다푸라를 탈환하고 그곳에 다시 한 번 화려한 불교의 꽃을 피웠다. 아누라다푸라로 돌아간 왓타가마니 왕은 은둔의 시간을 보낸 곳을 잊지 않고 이곳에 석굴과 불상을 조성해 자신을 도와준 스님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계속된 보수 덕분인지 2천년이 넘었다는 랑기리 담불라 비하라의 첫인상은 말쑥하고 단정하다. 하지만 거대한 바위산을 지붕삼아 회랑을 만들고 그 안에 석굴을 조성한 솜씨는 오늘날의 건축 기술로도 과연 가능할까라는 의심이 들 정도다. 바위산을 따라 늘어선 순백의 회랑은 길이만도 300여 미터 이상 돼 보인다. 이곳에는 모두 다섯 개의 석굴이 있는데 입구에 있는 첫 번째 석굴부터 다섯 번째 석굴까지 조성된 순서대로 역사가 길다. 규모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석굴이 가장 크지만 첫 번째 석굴에서는 눈여겨 봐야할 부분이 있다.

<사진설명>스리랑카에서는 불상을 조성할 때 발바닥을 붉게 물들인다. 싱할라 왕조의 시조인 스리 위자야가 기원전 6세기 스리랑카에 도착했을 때 그의 손발 바닥이 붉었다는 데서 유래됐다고 한다. 붓다의 저 붉은 발바닥 화려한 꽃문양은 싱할라 민족을 붓다와 연결해주는 상징인 셈이다.

첫 번째 석굴 안에는 거대한 열반상이 조성돼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해 만들었다. 석굴 조성을 위해 바위를 파들어 가면서 열반상 부분만 남겨 놓은 것이다. 와불 전체는 황금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부처님의 발바닥만은 붉은색으로 물을 들이며 둥근 꽃모양의 화려한 문양을 넣었다. 스리랑카에서는 불상의 발바닥을 이처럼 붉게 물들이는데 싱할라 왕조의 시조인 스리 위자야가 기원전 6세기 인도로부터 이곳 스리랑카에 도착했을 때 그의 손발 바닥이 붉었다는 데서 유래됐다고 한다. 그러니 붓다의 저 붉은 발바닥 화려한 꽃문양은 싱할라 민족을 붓다와 연결해주는 상징인 셈이다.

두 번째 석굴은 다섯 개의 석굴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폭이 약 52미터, 깊이 25미터, 입구의 높이는 6미터에 달하고 안에는 56개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하지만 석굴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석굴 내벽을 빈틈없이 채우고 있는 극채색의 화려한 벽화다. 벽과 천장 어디에서도 빈틈을 찾아 볼 수없는 이 벽화들을 보려고 한참동안이나 고개를 젖히고 있으니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훼손된 부분이 많지 않고 색감도 생생한 이 벽화들은 부처님 생애와 스리랑카 역사 등을 말해주고 있다.

붓다의 발엔 붉은 꽃 가득

벽화 가운데에는 싱할라족과 타밀족 사이의 전쟁을 묘사한 그림도 있는데 특히 기원전 2세기 아누라다푸라를 침략한 타밀족의 엘랄라 왕에 맞서 “불교를 수호하기 위해 싸우겠다”며 자신의 창끝에 부처님의 사리를 넣었다는 둣타가마니(Dutthagamani. B.C.E 161~137)의 전쟁 장면이 눈길을 끈다. 아누라다푸라에서 만났던 아름다운 대탑 루완웰리세야 다고바를 조성한 바로 그 둣타가마니 왕의 모습은 역시나 용맹스럽고 당당했다. 벽화는 손에 창을 들고 흰 코끼리에 올라탄 둣타가마니 왕이 검은 코끼리를 타고 있는 타밀족 엘랄라 왕의 심장에 창을 꽂은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사진설명>싱할라 왕조의 영웅으로 추앙되는 둣타가마니 왕(오른쪽)이 타밀족 엘랄라 왕을 무찌르는 벽화가 눈길을 끈다.

엘랄라 왕의 가슴을 관통한 창은 분명 둣타가마니 왕의 것으로 화살 전체가 황금색으로 빛을 내고 있어 부처님의 사리를 넣고 싸웠다는 그 창이 분명해 보였다. 둣타가마니 왕 주변으로는 싱할라 군인들이 적군의 목을 베는 모습을 그려 이 전쟁에서 싱할라 왕국이 승리했음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그림 속의 주인공 툿타가마니 왕은 비록 적군이지만 수 천 명에 달하는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는데, 이 사원을 조성한 왓타가마니 왕은 조상의 그런 고민은 모른다는 듯 그저 위대한 조상의 용맹한 모습을 기록하며 승리의 순간을 마음껏 즐기고 싶었나 보다. 타밀족을 무찔렀던 자신의 위대한 조상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면서 상처 입은 자존심을 달래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석굴 안 한가운데는 엄숙하고 장엄한 석굴의 분위기와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다. 안을 들여다보니 천장에서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을 커다란 돌 항아리로 받고 있다. 천장에서는 바위틈을 따라 물이 흘러온 자국이 보였다. 한참 동안 철망 너머로 물항아리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아까 입구에서부터 기회를 노리던 관광안내원이 바짝 다가와 ‘친절한’ 안내를 시작했다.

“이 물은 어디서 흘러오는지 알 수가 없지만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어요. 특히 이 물을 받고 있는 돌 항아리에서는 물의 양이 줄거나 늘어서 넘치는 법 없이 언제나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보세요. 배수구가 없는데도 바닥에 물이 넘친 흔적이 전혀 없지요? 이 물은 사원의 성스러운 보물로 여겨져서 중요한 의식이 있을 때만 스님들이 물을 떠갑니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이 물만으로 며칠을 지낼 수도 있어요. 지금은 관광객들이 손을 대지 못하도록 이렇게 철망을 둘러놓았지요.”

‘담불라’라는 이곳의 지명도 ‘물이 솟아나는 바위’라는 뜻으로 바로 이 석굴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한다.

제3석굴은 네덜란드의 침략기였던 18세기에, 제4석굴과 제5석굴 또한 열강의 식민 지배시기에 조성된 것들이다. 석굴을 조성할때마다 앞서 지어진 석굴을 보수하고 벽화를 새로 그려 넣었기 때문에 어느 것이 가장 오래되었다는 식의 잣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만 스리랑카 사람들은 국가에 위기가 있을 때 마다 이곳에 석굴과 불상, 벽화를 조성하며 붓다의 붉은 발 아래서 다시 한 번 싱할라 민족의 힘을 하나로 모았다. 불교의 힘으로 몽골의 침임을 막아내기 위해 팔만대장경을 조성했던 우리 조상의 역사처럼 스리랑카 사람들은 이민족의 침입에 대항하며 랑기리 담불라 비하라라는 찬란한 불교성지를 탄생시켰다.

마르지도 넘치지도 않는 물

대평원이 내려다보이는 사원 마당에서 우리의 것과 너무도 흡사한 이들의 역사를 되새기고 있자니 이곳 랑기리 담불라 비하라가 더없이 푸근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저쪽에서 아까 그 ‘친절한’ 관광안내원이 나를 보며 미소 짓고 있다. 아참, 그러고 보니 그의 친절함에 대한 보답(?)을 깜빡하고 있었다. 순례 길에 보시가 빠질 수 없으니 즐거운 마음으로 그에게 감사를 표시해야겠지?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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