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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윳따니까야』③

기자명 법보신문

실체가 있다는 견해 떨쳐야 진리에 접근

쌍윳따니까야의 몰리야 팍구나 경은 수행승 몰리야 팍구나와 부처님과의 대화를 기록한 것이다. 몰리야는 길게 자란 머리를 머리 위까지 땋아 올려 보석으로 장식한 결발을 뜻한다.

이 경에서 부처님은 뭇 삶들이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보여준다. 우리의 삶은 적어도 네 가지 종류의 빵을 먹어야만 유지된다. 그 네 가지를 부처님은 네 가지 자양분이라고 한다. 이 경의 초두에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이미 태어난 뭇 삶의 섭생을 위하거나, 혹은 다시 태어남을 원하는 뭇 삶의 보양을 위한 네 가지 자양분이 있다.

그 네 가지 자양분이란 무엇인가? 첫째는 거칠거나 미세한 물질의 자양분, 둘째는 접촉의 자양분, 셋째는 의도의 자양분, 넷째는 의식의 자양분이다.”라는 유명한 법문을 한다. 우리가 먹는 물질적인 음식이외에도 접촉, 의도, 의식의 정신적인 요소들이 우리를 지탱하는 빵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동물들도 결코 먹이만으로는 살수가 없다. 적당한 환경과의 접촉은 필수적인 것이다. 모든 동물은 태어나는 순간의 부모와의 접촉은 삶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인간에게도 어린아이 삶은 우유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와 사랑스런 접촉이 필수적인 인격형성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이웃과의 접촉이 그를 성인으로 성장시킨다. 우리가 베푸는 친절도 훌륭한 빵을 상대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그것이 접촉의 자양분이 되어 상대방을 성장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 문명화된 인간들에게는 생태적 자연환경과의 접촉이 삶의 필수적인 조건이 되었다.

그리고 모든 중생은 의도라고 하는 또 다른 빵을 먹어야만 산다. 의도는 각자가 선택하는 생각의 자유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 자유는 각자가 지은 업력에 따라 결정되는 측면이 있고 새롭게 선택하는 자유의 측면이 있다. 우리가 자유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라는 의미는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업력에 따라 형성된 것이고 하는 것은 사상의 자유를 말한다.

지옥이나 축생이나 인간이나 천국의 삶이라는 것은 바로 이 의도의 빵에 의해서 성숙되는 것이다. 특히 인간에게서는 그 자유가 각자의 사유로서 나타난다. 건전하고 풍요로운 사유는 우리를 성장시키고 유지하고 존재를 승화시키는 또 다른 하나의 빵이다.

또 하나의 모든 뭇 삶에게 중요한 빵은 ‘의식’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만날 때 대상을 지각하기 이전에 우리에게 생겨나는 첫 인상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초등학교 교사로서 초등학교의 교실에 들어서는 순간 교실 전체를 정확하게 의식하지만 아직 지각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개똥이’는 여기 앉아 있고 ‘쇠똥이’는 여기 앉아 있다고 아는 순간은 지각이다.

그 이전에 거의 지각하지 못하지만 온전히 아는 단계가 의식이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에게 접촉이나 의도도 생겨날 수 없다. 뭇 삶에게서 의식은 다른 어떤 빵보다도 지속 가능한 생존을 영위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불가결한 빵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 경에서 “의식의 자양분은 미래의 새로운 존재의 생성의 조건”이라고 정의한다. 이 의식은 물질적인 빵뿐만 아니라 접촉의 빵이나 의도의 빵에 따라 결정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결정된 의식은 다시 다른 빵들을 선택하며 생존을 바꾸어나가는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인간은 이러한 빵들을 자양분으로 구성되어 가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러한 빵들을 먹는 존재는 따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경에 따르면, 팍구나는 “그렇다면 세존이시여, 누가 의식의 자양분을 섭취합니까?”라고 물었다. 부처님은 “그러한 질문은 적당하지 않다. 나는 ‘사람이 섭취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만약 내가 ‘사람이 섭취한다.’고 말했다면 ‘세존이시여, 누가 섭취합니까?’라는 질문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말하지 않은 나에게는 오로지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자양분이 생겨납니까?’라고 물어야 한다.”라고 대답하셨다.

인간은 빵을 먹고산다. 그러나 여러 가지 물질적인 빵만으로 살수 없고, 여러 가지 물질적·정신적 빵을 먹고산다. 그러나 그 빵을 먹는 자는 없다. 이것이 이 경에서 강조하는 부처님 가르침의 가르침이다. 이 화두를 통과하지 않으면, 진리의 흐름에 들 수 없다.

불교에서는 진리의 흐름에 들기 위해서 통과해야할 첫 번째 관문이 개체가 있다는 견해 또는 실체가 있다는 견해를 떨쳐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근본적인 사유구조는 행위 주체자를 가정하는 실체론적인 사고에 입각해 있다.
 
전재성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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