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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욕망이 빚은 찬란한 슬픔 시기리야

기자명 법보신문

권력에 눈멀어 스스로를 가둔
고독한 왕?탄廚恝?하늘 궁전

<사진설명>시기리야 바위산 정상에 남아있는 카샤파 왕의 궁전. 스리랑카 관광청이 촬영한 항공사진이다.

스리랑카 불교의 첫 요람 아누라다푸라를 뒤로하고 여정을 남쪽으로 돌렸다. 불교가 도래해 뿌리내리고 꽃피우며 수많은 유적을 남긴 곳. 때론 이민족의 침략과 갈등으로 위기를 겪으면서도 굳건한 신심을 반석삼아 민족과 국가를 지켜낸 고대사의 영광이 남아있는 고도(古都)가 자꾸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게 만든다. 은근하고 깊은 멋이 담겨있는 조선의 백자처럼 소박함 속에 유구한 역사를 그윽이 머금고 있는 아누라다푸라에 순식간에 정을 준 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꾸 발걸음이 무거워지는 진짜 이유는 그 사이 진득이 쌓인 객지에서의 피로 때문이다. 물에 젖은 종이처럼 푹 늘어진 채 다음 목적지 시기리야(Sigiriya)를 향해 차에 몸을 실었다. 이럴 때 힘을 내기 위해서는 뭐니, 뭐니 해도 맛깔스런 음식으로 온몸의 지친 세포들을 유혹하는 게 최고다.

여행의 즐거움은 낯선 환경과 문화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에 있지만 이국의 색다른 음식을 즐기는 것 또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즐거움이다. 그런 점에서 스리랑카는 더 없이 매력적인 나라다. 독특한 향신료가 가득한 음식은 간혹 당혹스러울 만치 혀끝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쌀을 주식으로 하며 신선한 야채로 매콤하게 요리해내는 스리랑카 음식은 우리 입맛에도 맛깔스럽기 그지없다. 그렇다고 해서 스리랑카 음식을 결코 진수성찬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식사는 대부분 밥과 매콤한 커리를 함께 먹으며 여기에 볶거나 무친 야채를 곁들이는 소박한 식단이다. 불교국가답게 육류를 주재료로 사용하는 요리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데 그나마 사용하는 육류도 생선이나 닭고기가 고작이다. 또 어느 식당에서나 육류를 전혀 넣지 않은 채식 메뉴가 마련돼 있어 채식주의자들도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물고기를 잡거나 정육점 같이 고기를 파는 일에 종사하는 이들은 대부분 소수의 이슬람교도나 기독교인들이다. 타밀족이 대부분인 힌두교도들도 살생을 해야 하는 직종엔 거의 종사하지 않고 있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아침 식사를 거르거나 오후가 다 돼서 점심을 겸해 먹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점식 식사는 중요하게 여겨진다. 스리랑카 사람들이 점심식사로 즐겨 먹는 음식 가운데 하나가 쌀로 만든 ‘아퍼’라는 요리다. 쌀가루에 계란과 코코넛을 넣어 묽게 반죽한 다음 둥근 쇠그릇에 얇게 구워내는 아퍼는 언뜻 보기에 우리의 누룽지를 연상시키지만 그보다 훨씬 부드럽고 쫄깃하다. 둥근 모양의 아퍼는 가운데 부분이 약간 부풀어 올라 도톰한 모양인데 이 부분을 손으로 뜯어 먹으면 시루떡처럼 쫄깃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다. 얇게 구워진 테두리 부분은 바삭하면서도 고소한 맛이어서 한 번 손이 가면 멈추기가 힘들 지경이다. 반죽을 조금 진하게 만들어 국수처럼 뽑아먹는 아퍼도 있는데 쫄깃한 맛은 우리의 소면을 따라가지 못한다. 아퍼에 노란색 야채 커리를 곁들여 배를 채우고 물소젖을 발효시켜 만든 스리랑카식 요구르트 ‘커드’에 진한 꿀과 과일을 넣어 입가심을 하고 나니 방금 스리랑카에 도착한 듯 기운이 불끈 솟는다. 하지만 따끈하게 끓여내는 홍차를 마시지 않고서는 식사를 마무리했다고 할 수 없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40도가 넘는 더운 기후 속에서도 수시로 뜨거운 차를 마신다. 그야말로 이열치열이다. 스리랑카 홍차에는 딱딱하게 덩어리진 꿀이나 설탕을 곁들이는데 수시로 차와 꿀을 먹어 체력을 보충하는 것이다.

언뜻 보기엔 소박한 상차림이지만 맛있게 식사를 마치고나니 눈앞에 보이는 시기리야의 바위산쯤은 단박에 올라갈 수 있을 듯하다. 물론 이것은 가당치도 않은 오만이었지만….

랑카 문화 삼각지의 중심

<사진설명>쌀가루에 계란과 코코넛을 넣어 묽게 반죽한 다음 둥근 쇠그릇에 얇게 구워내는 아퍼는 언뜻 보기에 우리의 누룽지를 연상시키지만 그보다 훨씬 부드럽고 쫄깃하다.

스리랑카의 문화와 역사를 대표하는 3곳의 유적지는 아누라다푸라와 폴론나루와(Polonnaruwa), 그리고 캔디(Kandy)다. 물방울 모양의 섬나라 스리랑카의 중앙부에 삼각형 모양으로 자리하고 있는 이 세 도시는 ‘문화 삼각지(Culture Triangle)’로 일컬어지는데 시기리야는 이 문화 삼각지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높이 195미터의 거대한 바위산 정상에 펼쳐져 있는 바위궁전(Rock Palace)은 스리랑카를 찾는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스리랑카 여행의 백미다.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솟아있는 붉은 바위산, 그 정상에 세워졌던 화려한 궁전과 그곳에 살았던 고독한 왕의 이야기는 전설 속의 한 장면처럼 경이로우면서도 슬프다.

시기리야 바위산에 웅장한 궁전을 지은 이는 5세기 이곳을 다스린 왕 카샤파1세(Kassapa. 473~491)다. 이 바위궁전을 세운 이유는 스리랑카 사람들의 입에서 입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카샤파 왕은 아누라다푸라에 거대한 저수지를 건립한 다투세나(Dhatusena. 455~473)왕의 장남이었다. 그에게는 배다른 동생 목갈라나(Moggallana)가 있었는데 카샤파의 어머니가 평민이었던데 비해 목갈라나의 어머니는 왕족이었다. 이 때문에 카샤파는 왕위를 동생에게 빼앗길까 늘 전전긍긍했고 결국 아버지인 왕을 감금하고는 자신이 왕위를 차지해 버렸다. 형 카샤파가 왕위를 찬탈하자 생명의 위협을 느낀 목갈라나는 복수를 다짐하며 인도로 망명했다. 하지만 카샤파는 왕좌에 만족하지 못한 채 “숨겨 놓은 왕실의 보물을 내놓으라”며 아버지를 윽박질렀다. 다투세나는 그가 조성한 아누라다푸라의 칼라웨와 저수지로 카샤파를 데리고 가 저수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의 내 재산의 전부다.” 이 말에 화가 난 카샤파는 결국 부하를 시켜 아버지 다투세나를 조용히 살해해 버렸다.

왕좌를 탐해 아버지 죽여

<사진설명>푸른 숲 사이로 우뚝 솟은 붉은 바위산이 시기리야록이다(왼쪽)
궁전으로 들어서는 중앙입구는 거대한 사자의 모습이었다.(오른쪽)

아들의 손에 죽임을 당한 아버지의 원혼 때문이었을까. 카샤파는 이때부터 두려움에 떨며 이성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죽였다는 죄책감과 함께 인도로 망명한 동생이 보복하기 위해 쳐들어올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인 카샤파는 미친 듯이 바위산 꼭대기에 궁전을 지었다. 시기리야의 바위 궁전은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7년여의 난공사 끝에 궁전이 완성되자 왕은 총애하던 무희를 데리고 아무도 접근할 수 없어 보이는 그 높은 바위산 꼭대기의 화려한 궁전 속에 스스로를 가둬버렸다. 하지만 11년 후 카샤파의 두려움은 현실로 나타났다. 인도로 망명했던 동생 목갈라나가 아버지의 복수를 외치며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 온 것이다. 카샤파는 동생과 싸우기 위해 코끼리에 올라타고 전장으로 나갔다. 하지만 싸움이 한창이던 무렵 카샤파를 태운 코끼리가 그만 수렁에 빠져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군대는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고 결국 후퇴하고 말았다. 수렁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한 채 혼자 남겨진 카샤파는 동생의 군대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며 단검으로 목을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버지를 죽이고 동생을 쫓아내며 왕위에 오른 지 고작 18년 만이었다.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왕위에 오른 목갈라나는 카샤파의 무모한 욕망이 빚어낸 시기리야의 바위궁전을 승단에 기증하고 수도를 다시 아누라다푸라로 옮겼다. 시기리야의 바위 궁전은 이후 상당기간 스님들의 수행처로 사용되다가 어느 때인가부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갔다.

바위산 정상까지 오르려면 족히 두 시간은 땀을 흘려야 한다. 때론 깎아지른 바위를 네발로 기어가듯 올라야 하지만 이 바위궁전이 주는 경이로움은 그 노력이 결코 아깝지 않을 정도로 충분하다. 이 가파른 바위산 정상에 자리 잡고 있는 궁전은 그 흔적만으로도 감탄이 멈추질 않기 때문이다.

농염한 ‘시기리야 레이디’

<사진설명>바위궁전 입구에 그려진 프레스코 벽화의 일부. 천상의 요정 압살라의 고혹적인 미소는 1500년이 지나도 퇴색하지 않았다.

이 바위궁전을 유명하게 만든 또 하나의 유적은 궁전 입구의 벽에 남아있는 프레스코 벽화 다. 거친 바위 면에 정성스럽게 점토와 석회, 꿀을 발라 매끄럽게 만들고 그린 이 프레스코화는 1500여 년 전의 것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정교하고 화려한 색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시기리야 레이디’로 불리는 이 그림은 천상의 요정 압살라와 그를 시중드는 왕의 시녀들로 추정되는데 카샤파 왕이 죽은 아버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그렸다고 전해진다. 그림속의 여인들은 당초 500여 명에 달했지만 이곳이 스님들의 수행처로 사용되면서 지나치게 농염한 여인들의 모습이 부담스러워 일부를 지워버렸고 이후 비바람에 시달리다가 1967년 반달인이 이곳을 공격했을 때 다시 한 번 상당수의 미녀들이 파괴됐다고 한다. 화려한 보석 장신구로 온몸을 치장하고 풍만한 가슴을 훤히 드러낸 채 고혹적인 자세로 꽃을 감상하며 미소 짓고 있는 시기리야 레이디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미소 속에 빨려 들어갈 듯 정신이 아득해진다.
 
시기리야 레이디를 지나면 거대한 사자 모양의 궁전 입구가 나타난다. 지금은 날카로운 발톱을 지닌 사자의 두 발 부분만 남아있지만 처음엔 사자의 입으로 들어가는 모양이었다고 한다. 이 입구를 만들 때 사자를 직접 옆에 놓고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정교한 모양이다.

사자의 입구를 통해 궁전으로 오르는 길은 수직에 가까운 절벽이다. 기어오르듯 바위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사이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거센 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이 깎아 놓은 바위산 정상에 세상에서 가장 고독했던 왕 카샤파 왕의 궁전이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통치하는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 세상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킨 왕. 세상을 다스리는 왕좌에 앉기 위해 지독한 고독을 택했던 카샤파는 거센 바람만이 찾아오는 이곳에서 과연 행복했을까. 웅장하고 화려했던 궁전과 물을 끌어 올려 사용했다는 거대한 수영장, 그리고 카샤파 왕이 그토록 염원했던 왕좌가 과연 고독한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었을까.

잠시도 바람이 멈추질 않는다. 허물어진 돌담 밑에라도 몸을 숨기지 않고서는 서있기가 버거울 정도다. 단도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카샤파도 어쩌면 이 바람이 죽음보다도 더 두려웠을지 모른다. 잠들지 않는 바람은 인간의 욕망, 그 끝없는 회오리에 휩싸여 미친 춤을 추다 스러져 버린 카샤파의 손짓처럼 허망하게 시기리야의 바위산을 휘감고 있다.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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