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 최초 근대 종단 원종 출범과 의의
⑥ 최초 근대 종단 원종 출범과 의의
  • 법보신문
  • 승인 2006.08.14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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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500년 무종단 시대 마감…친일 복무 한계

1908년 불교계 대표 52명 원흥사에 모여 원종 창립
한성에 각황사 건립…이회광을 종무원장으로 추대
日 조동종과의 연합 시도로 불교계 내부 저항 직면

<사진설명>왼쪽. 초대 원종 종무원장을 지냈던 이회광
오른쪽. 원종 종무원에서 통감부에 제출한 신고서. 각황사를 종무원의 사무소 겸 포교소로 운영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사진제공=민족사

조선조 세종 연간에 조계종·천태종·총지종은 선종으로 화엄종·지은종·중신종·시흥종은 교종으로 통합되어 이른바 선교 양종시대가 되었다.

선교 양종 체제의 성립으로 각 종단은 고유한 독자성을 상실하였다. 선종과 교종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법에 의해 구분되는 것이므로 종단의 명칭이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계는 이후 약 500여년을 무종단 시대를 겪어야 했다.

불교계에 종단은 왜 필요할까. 불법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종단이 중심이 되어 포교사업과 교육 사업을 시행할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종단은 대외적으로 불교계를 대표하여 외교활동도 전개해야 한다. 외국 종교 단체들과 교류하고 공동 포교 방안의 모색을 위해서도 종단은 필요하다. 계를 범하였거나 승단에 위해를 가한 승려들을 징계하고, 불법 전파에 공로가 큰 사람을 선양하는 등 승단 내부의 활동을 위해서도 종단은 필요하다. 종단이 필요한 이유가 어찌 이것 밖에 없겠는가. 이러한 활동을 할 수 없었던 무종단 시대에 불교계는 겨우 승단의 명맥을 유지할 뿐이었다.

근대 사회에 들어와서 불교계의 탄압이 완화됨으로써 종단 설립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904년 사사관리서가 폐지되고 원흥사 마저 폐지하라는 칙명이 내려졌지만 불교계의 요구로 원흥사는 폐지되지 않고 관할권이 불교연구회로 이관되었다. 불교연구회는 명진학교를 설립하여 포교사를 양성하고, 불교계의 발전을 도모하였다. 불교계가 자체적으로 발전을 지향하고자 하는 여망은 종단 설립으로 구체화되었다.

1908년 3월 불교계의 대표 52명이 원흥사에 모여 원종(圓宗)을 설립하고 종정으로 당시 해인사의 대강백 이회광(李晦光)을 종정으로 추대하였다. 이와 더불어 총무부장에 김현암(金玄庵)·교무부장에 진진응(陳震應)·학무부장에 김보륜(金寶輪)·김지순(金之淳)·서무부장에 김석옹(金石翁)·강대련(姜大蓮)·인사부장에 이회명(李晦明)·김구하(金九河)·감사부장에 박보봉(朴普峰)·나청호(羅晴湖)·재무부장에 서학암(徐鶴庵)·김용곡(金龍谷)·고등강사에 박한영(朴漢永) 등을 선임하여 종단 집행부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초기 종단의 임원들은 일제시대에 삼십본산연합회의 대표를 역임하거나 본사 주지 또는 강원의 강백 등을 지낸 불교계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던 인물들이었다. 원종이 설립될 당시 신문지상에 발표된 ‘불교종무국(佛敎宗務局) 취지서(趣旨書)’를 살펴보면 종단 설립의 내막을 보다 잘 알 수 있다. 그 요지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현재 세계 각국은 모두 발전하는데 우리나라만 지지부진하며 각 국의 불교가 모두 흥왕하는데 한국 불교만 어둠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이러한 때에 각 승려가 경성의 명진학교에 모여 교육의 방침과 포교의 규정을 원만하게 시행하기 위하여 그 사무소를 설립하고 불교종무국이라고 하였다. 각 도 사원의 총람기관(總攬機關)이요, 전국 승려 활동의 주체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 취지서에 서명한 발기인은 원종 종무원의 임원을 중심으로 모두 65명이었다. 새로 탄생하는 종단은 한국 불교계가 안고 있었던 여러 가지 제약을 극복하고 새롭게 면모를 일신하여 교육과 포교에 매진할 것이니 모든 불자들은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달라고 당부하고 있다. 이렇게 성립된 원종은 도성 안에 불교계를 이끌어 갈 중심 사찰을 건립하는 일을 착수하였다.

1909년 12월 원흥사에 승려 150여명이 모여 한성 중앙에 사찰을 건립하기로 하고 1910년 2월부터 공사를 착수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하여 전국의 사찰로부터 모아진 건축비는 백미(白米) 2천 석과 금화(金貨) 8만 냥에 달하였다. 이 사찰이 바로 한성 북부 전동에 건립된 각황사(覺皇寺)이다. 각황사의 건립은 서울의 도심 가운데 새워진 사찰이라는 점에서 또 건립 주체가 불교 종단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이회광은 원종종무원장의 자격으로 각황사를 종무소의 사무소 겸 포교소로 사용하겠다는 신고서를 통감부로 제출하였다. 이제 불교는 산 속에 은둔하면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시대에서 벗어나 도심에 포교의 기반이 되는 중심 사찰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원종은 근대 사회 초기에 성립된 종단이었기 때문에 해결해야 할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먼저 전국적인 조직망 확보와 교육 및 포교사업의 방향 설정 그리고 국가로부터 종단으로 승인을 받아야 하는 일 등을 비롯하여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이 가운데서 국가로부터 불교 종단으로 승인을 받는 문제는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원종은 전국 사찰의 주지와 각 도의 지원장(支院長) 임면권 등 13도 사찰을 통할할 수 있고, 종단 운영에 필요한 예산 등을 확보하기 위해서 합법적인 권한을 부여받을 필요성이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회광은 일본 불교 세력의 힘을 빌리고자 하였다. 이회광은 당시 대표적인 친일파로 일진회 회장이었던 이용구(李容九)와 내부대신 송병준(宋秉畯)의 권유로 일본 조동종 승려로서 정치권과 긴밀한 연관을 가지고 있던 다케다 한시(武田範之)를 원종의 고문으로 영입하였다. 다케다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관련되어 히로시마(廣島) 감옥에 투옥된 경험이 있는 인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후일 원종과 일본 조동종을 연합시키려고 이회광을 배후에서 움직인 인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8년 7월 27일 이회광을 비롯한 13도 사찰 대표 48명은 원종의 인가 문제와 불교계의 개선사항을 담은 청원서를 내부에 제출하였다고 한다. 이회광은 원종종무원의 인가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다케다에게 불교계의 주요 인사들의 서명을 받아서 두 차례나 사신을 보낸 사실이 있다.

그런데 일제시대 대표적인 항일 승려였던 한용운도 여기에 서명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한용운은 일본의 침략성을 깊지 인식하지 못하고, 배워야할 선진국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 무렵 그는 일본을 방문하여 근대사회의 모습을 보았고, 조동종 대학에서 공부를 하려고 하기까지 하였다. 그가 항일노선으로 돌아서는 시점은 1910년 말 이회광이 원종과 일본 조동종과의 연합맹약이 체결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임제종 설립운동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회광은 원종종무원의 인가를 받기 위해서 인가신청서를 1910년 5월 한성부를 통해서 통감부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통감부는 원종종무원을 인가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일본 불교 세력으로 하여금 한국 불교계를 장악하게 하려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제기한 문제는 이러하다. ‘새로운 사찰의 창립’을 허용 여부와 ‘주지 임용’에 관한 절차 문제 그리고 ‘종무원의 명칭 사용’에 관한 것들이다. 통감부는 한국 불교계에서 자체적으로 종단을 구성하여 전국의 사찰을 통솔하게 된다면 그로 인하여 발생되는 문제가 적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듯하다.

원종의 설립 인가가 벽에 부딪히게 되자 종정이었던 이회광은 종단의 인가를 받기 위한 방법으로 일본 조동종과 연합을 시도하게 된다.

그는 이 연합을 위해서 전국 72개 사찰의 위임장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가서 1910년 10월 7일 한국 불교 원종과 일본 불교 조동종이 연합하는「연합맹약」을 성립시켰다. 「연합맹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불교계에 알려지자 민족적 성향이 강한 박한영(朴漢永)·한용운(韓龍雲)·진진응(陳震應)과 같은 승려들이 주축이 되어 전개된 임제종 설립운동이라는 불교계의 저항에 부딪히게 된다.

결국 원종은 나라가 망한 이후 조선총독부 체제 아래서 1911년 6월에 사찰령(寺刹令)이 시행되자 ‘조선불교선교양종본산주지회의원’이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그것은 원종의 임원들 대부분이 당시 30본사 주지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원종은 무종단 시대에서 벗어나 여러 가지 불교 발전 사업을 시행할 수 있는 최초의 근대 종단이 불교계 내부에서 태동하였다는 사실은 큰 의미를 갖는다. 새롭게 성립된 종단은 『원종』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여 종단이 성립한 사실과 향후의 방향 등을 설명하는 글들이 실렸겠지만 불행하게도 아직까지 잡지가 발행되었다는 사실만 전하고 책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원종의 탄생은 환영할 만한 일이었지만 그 운영에 있어 지도부가 민족의식의 부족으로 일본 조동종과 연합을 시도함으로써 불미스러운 결과를 낳고 말았다.

김순석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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