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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 싱할라 왕조의 두 번째 수도 플론나루와

기자명 법보신문

비구니 절멸 슬픔 딛고 왕조 제2 황금기 일군 랑카 불교문화 결정체

<사진설명>폴로나루와 불교유적의 중심지는 왕궁옆에 조성된 사원구역 쿼드랭글이다. 이곳엔 12개의 사원이 모여있다.

스리랑카 성지를 순례할 때는 반드시 지켜야할 몇 가지 예절이 있다.

우선 사원에 들어갈 때 노출이 심한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 이는 우리나라의 사찰 예절과 별다를 바가 없다. 남녀를 불문하고 무릎 위로 올라가는 반바지나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웃옷 등이 경계 대상이다.

하지만 요즘은 스리랑카에도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늘어서인지 외국인들, 특히 서양인들의 옷차림은 이런 예절을 무색케 할 만큼 과감하기 그지없다. 낮 기온이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폭염인 까닭에 외국인들 가운데는 아예 웃옷을 벗어버리고 다니는 남자들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띤다. 하지만 스리랑카 사람들, 이해심이 많아서인지 아니면 아예 포기해서인지 이런 노출 심한 외국인 관광객에게 제재를 가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문스톤, 윤회·성소의 상징

<사진설명>사원이나 왕궁 등 성소의 입구를 알리는 문스톤. 윤회의 상징인 문스톤은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불교문화유산이다.

복장에 대한 이런 느슨한 규정과는 달리 외국인이라도 절대 예외 없이 적용되는 규칙이 있다. 사원에 들어설 때 입구에서 모자와 신발을 반드시 벗어야 한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사원 입구에는 ‘문스톤(Moon Stone)’이라 불리는 반원 모양의 석조 발판이 있는데 바로 이 지점이 신발과 모자를 벗어야하는 곳이다. 문스톤은 윤회의 상징으로 불꽃, 코끼리, 말, 사자, 소, 꽃, 새, 연꽃 등을 통해 인간 세계의 생노병사와 그로부터의 해탈, 열반 등을 상징하고 있다.

스리랑카의 유적 특히 싱할라 왕조의 두 번째 수도였던 폴론나루와(Polonnaruwa)에서 이 규칙은 순례 길을 예상치 못했던 ‘고행길’로 만든 복병이 되었다.

11세기 초 남인도로부터 대군을 이끌고 처들어 온 촐라(Chola) 왕조에 의해 수도 아누라다푸라는 폐허가 되었다.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었다. 아누라다푸라의 수많은 사찰이 파괴되었을 뿐 아니라 스리랑카의 비구니 승단이 절멸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단 한 사람의 비구니도 살아남지 못한 대 비극이었다. 그러나 1055년 즉위한 위자야바후1세(Vijayabahu I)는 1070년 촐라인을 완전히 격퇴시키고 수도를 아누라다푸라의 남동쪽 폴론나루와로 옮겼다. 이로써 폴론나루와는 스리랑카 싱할라 왕조의 두 번째 수도가 된 것이다.

폴론나루와로 수도를 옮긴 위자야바후는 불교적 기준을 통해 혼란해진 국가의 질서를 바로 잡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쇠락한 불교의 재건이 시급했다. 위자야바후는 스리랑카가 법등을 전해주었던 미얀마의 수도 바간에 사절단을 파견, 스님과 경전을 보내 줄 것을 요청했고 미얀마는 이러한 요청을 받아 들여 스리랑카 불교 재건에 힘을 보탰다. 스리랑카가 전해주었던 법등이 다시 돌아와 쇠락해있던 스리랑카의 불교를 부흥시킨 뜻 깊은 교류였다.

위자야바후가 폴론나루와로 수도를 옮기고 불교부흥을 위해 노력하는 등 국가의 틀을 다진데 이어 그의 손자이자 싱할라 왕조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손꼽히는 파라크라마바후1세(Parakramabahu I. 1153~1186)는 수많은 사원과 거대한 저수지 등을 건립해 폴론나루와를 부유하고 아름다우며 외국의 승려들도 수없이 찾아오는 세계적인 불교의 중심 도시로 성장시켰다. 이후 니상카 말라(Nissanka Malla. 1187~1196)의 통치시대에 이르기까지 폴론나루와는 최고의 황금기를 구사하며 싱할라 왕조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폴론나루와로 가는 길, 일행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은 파라크라마바후가 조성했다는 거대한 저수지 ‘파라크라마 사무드(Parakrama Samudra)’다.

“저수지를 조성한 파라크라마바후 왕의 이름을 딴 것인데 ‘사무드라’는 싱할리어로 바다를 뜻 합니다. 저수지이긴 하지만 바다 만큼이나 크기 때문에 썩 잘 어울리는 이름이지요.”

12세기 세계 불교의 중심지

설명을 듣지 않았다면 멀리 보이는 수평선과 출렁이는 파도의 이곳이 저수지라는 사실을 눈치체기 어려웠을 것이다.

폴론나루와는 아누라다푸라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도시가 그대로 유적으로 남아있다. 폴론나루와는 파라크라마 호수로부터 흘러나오는 물길을 끼고 호수에 기대어 직사각형 모양으로 건설되었다. 도시의 중앙에는 거대한 왕궁과 수많은 사원들이 건립 됐는데 특히 왕궁 바로 옆에는 사원구역인 쿼드랭글(Quardrangle)이 조성됐다. 쿼드랭글은 사각형이라는 뜻인데 벽으로 둘러싸인 사각형의 정원 안에 12개의 사원이 조성돼 있다. 이곳은 폴론나루와 불교의 중심지였으며 그 곳에는 현재 캔디의 불치사에 봉안돼 있는 부처님의 치아 사리가 캔디로 옮겨지기 전 모셔져있던 사원들도 있다. 순례객에게는 그야말로 매력적인 도시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쿼드랭글의 이 고풍스러운 유적들과 마주선 순간 그만 발길이 멈춰져 버렸다. 하필 태양이 머리 꼭대기에서 기세를 펼치고 있는 한낮인 것이다. 쿼드랭글의 수많은 사원들은 약속이나 한 듯 지붕이 없다. 처음 사원들이 지어졌을 때는 나무로 만든 지붕과 회랑이 있었겠지만 천년여의 세월이 흐른 지금 남아있는 것은 오직 돌로 만들어진 기둥과 벽, 그리고 눈부시도록 태양을 반사시키고 있는 돌바닥뿐이다. 저 뜨거운 태양 아래 녹아내릴 듯 달구어진 사원들을 바라보며 화들짝 겁을 집어먹은 순례객의 속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문스톤 앞에서 안내인은 신발과 모자를 벗으라고 친절히 설명해 준다.

사원에 들어서려면 어쩔 수 없다. 쿼드랭글 안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원형의 불탑 와타다게(Vatadage) 안에서 미소를 머금고 앉아있는 저 부처님 앞에 삼배를 올리지 않고서야 폴론나루와를 다녀갔다고 할 수 없지 않은가.

모자를 벗어 들고는 신발을 벗어 눈을 질끈 감고 문스톤 위로 한발 내딛었다. 순간 문스톤의 열기가 발바닥의 신경을 찌르듯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잘 달구어진 프라이팬 위에 떨어진 물방울처럼 발을 구르며 발뒤꿈치를 바짝 치켜 올리고는 까치발이 돼서 순식간에 계단을 뛰어올랐다. 발가락이 화끈거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이번엔 자세를 바꿔서 발가락을 치켜들고는 발뒤꿈치만으로 뒤뚱거리듯 걸음을 옮기며 간신히 불단 앞까지 갔다. 불과 수십 초도 안 되는 시간인데 모자를 벗은 머리 위로 햇살이 내려 꽂혀 눈앞이 아득해지는 느낌이다. 다행히 불단에는 휘장이 쳐져 있어 겨우 한 사람이 설만큼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휘장 그늘 아래 가부좌를 틀로 앉아 계신 부처님이 측은한 듯 그런 모습을 내려다보신다. 그러고 보니 이곳 부처님도 곳곳에 깨지고 갈라진 것을 보수한 흔적이 역력하다. 13세기 이후 다시 격화된 타밀족의 침입에 의해 싱할라 왕조는 수도를 더욱 남쪽으로 옮겼고 폴론나루와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점차 폐허의 도시로 변해갔다. 폴론나루와가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20세기가 되어서다. 그런 역사를 생각해보니 이곳 폴론나루와의 유적들은 모두 뜨거운 태양 아래서 800여년에 가까운 시간을 묵묵히 견뎌낸 위대한 영웅들이다.

불치, 캔디 봉안 전엔 이곳에

<사진설명>12세기 니상카 말라 왕이 건립한 불치사 하타다게. 부처님의 치아사리가 모셔져 있었다.(왼쪽)
랑콧 비하라 다고바. 아누라다푸라의 루완웰리세야 다고바를 모델로 만든 폴론나루와 최대의 불탑이다.(오른쪽)

지금은 비록 기둥만 남아있는 하타다게(Hatadage)는 폴론나루와 시대 부처님의 치아 사리가 모셔졌던 사원이었고, 보수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투파라마(Thuparama)는 지금도 예전의 웅장했던 위용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융성했던 당시의 불교를 보여주고 있다. 파라크라마 왕의 궁전이었다는 로얄 팔레스(Royal Palace)는 벽과 돌기둥만 남아있지만 벽의 두께가 무려 3미터이고 높이만도 3층 규모에 달해 보는 이를 압도한다. 당초 이 궁전은 7층 높이에 36개의 기둥이 궁전의 중앙 홀을 지탱하고 있었으며 방이 무려 50개에 달했다고 한다.

폴론나루와가 싱할라 왕조의 수도였던 기간은 체 2백년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폴론나루와의 왕조와 국민들은 이민족의 침략을 막아냈다는 자부심과 불교에 의지해 다시 한 번 싱할라 왕조의 번영을 이루겠다는 의지를 모아 풍요롭고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어냈다.

넋을 잃고 폴론나루와의 아름다운 사원과 왕궁들을 둘러보는 사이 발갛게 익어버린 발바닥의 통증도 조금씩 익숙해진다. 그러고 보니 스리랑카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신발을 벗고 침착한 걸음으로 사원을 참배한다. 그들이 보기에 종종걸음으로 뛰어다니는 이방인의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웠을까.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짐짓 점잖게 자세를 바꿔 폴론나루와가 낳은 최고의 걸작 갈 비하라(Gal Vihara)로 발걸음을 옮겼다.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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