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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윳따니까야』 ⑥

기자명 법보신문

꽃향기가 무상하듯 영원한 자아란 없다

쌍윳따니까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경전 가운데 하나가 케마까의 경이다.

여기에는 그 유명한 ‘나’라는 것에 대하여 ‘꽃향기의 비유’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존자 케마까는 장로 수행승들이 머물던 코삼비의 고씨따 승원에서 멀지 않은 바다리까 승원에서 홀로 중병이 들었다.

장로 수행승들은 존자 닷싸까를 보내서 존자 케마까를 문병하면서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五蘊)’에 대하여 ‘나’라고 여기지 않으면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하리라는 취지에서 그러한 전언을 전한다. 그러나 그것이 논쟁의 시발이 되어서 닷싸까나 두 승원을 오고가며 케마까의 답변과 장로 수행승의 질문을 전한다.

장로수행승들이 중병이 든 사람에게 어려운 철학적인 담론을 유도하는 것 자체가 매우 경이롭다. 중병이든 케마까는 닷싸까가 수고로이 두 승원을 왔다갔다하면서 대화의 전언을 전하는 것이 안타까워서 지팡이를 들고 병상에서 일어나 장로 수행승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자아에 대한 비유적으로 매우 아름답고 철학적으로 해탈론적인 아름다운 법문을 한다.

“벗들이여, 나는 물질을 두고 ‘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물질이 아닌 것을 두고 ‘나’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느낌을 두고 ‘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느낌이 아닌 것을 두고 ‘나’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지각을 두고 ‘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지각이 아닌 것을 두고 ‘나’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형성을 두고 ‘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형성이 아닌 것을 두고 ‘나’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의식을 두고 ‘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의식이 아닌 것을 두고 ‘나’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벗들이여, 나는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과 관련해서 ‘나’라는 것을 뿌리 뽑지는 못했습니다만,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과 관련해서 어느 것 하나라도 ‘나’라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벗들이여, 예를 들어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의 향기가 있다고 합시다. 누군가 그것이 꽃잎의 향기, 꽃받침의 향기, 꽃 수술의 향기라고 말한다면, 그는 옳게 말한다고 봅니까?” “벗이여, 그렇지 않습니다.” “벗들이여, 어떻게 설명해야 바른 설명이 되겠습니까?” “벗이여, 꽃의 향기라고 설명하면 바른 설명이 될 것입니다.”

존재의 집착다발이라는 것은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정신적·물질적인 요소를 말하는데, 느낌이나 지각이나 형성[신체적·언어적·정신적 형성]이나 의식은 정신적인 요소를 말한다.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은 꽃잎의 향기, 꽃받침의 향기, 꽃 수술과 같은 정신적이나 물질적인 요소들이나 세계들이지만, ‘나’라는 꽃향기는 그것과 같은 것이라도 다른 것이라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라는 것은 변화하는 정신·물질적인 조건에서 생겨나는 꽃향기와도 같은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꽃향기는 꽃잎, 꽃받침, 꽃 수술의 변화하는 상호물질적인 대사작용으로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꽃향기는 변화할 뿐만 아니라 무상하다. 꽃잎이 퇴색하고 꽃받침이 시들고 꽃 수술이 변하면 꽃향기도 사라진다. 이처럼 우리의 자아는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존재의 다발이 변화에 따라 달라진다. 여기에 영원한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케마까는 완전한 해탈을 위해서는 그 꽃향기마저 완전히 사라져야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케마까는 장로 수행승들 앞에서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 가운데 미세하게 발견되는 ‘나’라는 자만, ‘나’라는 욕망, ‘나’라는 경향을 아직 끊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꽃향기의 본질은 미세하게 발견되는 ‘나’라는 자만, ‘나’라는 욕망, ‘나’라는 경향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거칠어지고 악해지면, ‘꽃향기’가 아니라 ‘비린내’가 된다.

꽃향기가 보다 정화되어 ‘나’라는 것이 완전히 없어지면, 해탈의 향기로 바뀌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일체의 정신적·물질적인 요소에서 그 집착을 떨쳐버려야 한다. 존자 케마까는 중병이 들었지만 이러한 법문으로 장로 수행승들에게 이 탁월한 법문을 하여 그들을 감동시킨다. 

경전은 ‘이와 같이 법담이 오갈 때에 육십 명의 장로 수행승과 존자 케마까는 집착 없이 번뇌에서 벗어나 마음에 의한 해탈을 성취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전재성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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