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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이회광의 제1차 조일불교 연합책동

기자명 법보신문

조선불교의 일본 예속 빌미 제공한 매종 행위

1910년 종정 이회광 일본 조동종과 ‘연합맹약’ 체결
조동종에만 일방적으로 유리…사실상 불평등 조약
1911년 정통성 회복위해 임제종 탄생…원종과 대립

<사진설명>1910년 조선불교중앙회소 겸 중앙포교소로 활용되었던 각황사 전경.

1908년 불교계의 대표 52명이 원흥사에 모여 원종이라는 종단을 성립시키고 종정에 이회광을 선출하여 부장 인선을 단행함으로써 종단의 면모를 갖추었다.

원종은 당면한 포교사업과 교육사업을 진행하고, 불교도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실천하기 위해서는 국가로부터 불교계를 대표하는 공식적인 기구라는 공인을 받을 필요성이 있었다.
원종종무원의 설립인가를 받기 위하여 종정인 이회광은 여러 가지 노력을 하였다. 1910년 4월 이회광을 비롯한 원종의 주요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전국 사찰에서 의무금을 걷어서 한성부 전동에 각황사를 건립하였다. 이들은 각황사를 조선불교중앙회소(朝鮮佛敎中央會所) 겸 중앙포교소로 운용하기로 하였다.

동년 5월 6일 이회광을 비롯한 13도 사찰 대표들이 각황사에 모여 각황사의 운영방침을 결정하였다. 이들은 한성 부윤에게 원종종무원의 설립인가를 신청하였다. 한성 부윤은 신고서를 접수하고 내무부 지방 국장에게 송부하였지만 8월에 나라가 망함으로써 원종은 결국 인가를 받지 못하였다.

이회광은 조선총독부에 원종의 설립인가를 취득하여야 할 과제를 안게 되었다. 이회광은 조선불교가 발전하려면 반드시 일본 불교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일진회장 이용구의 추천에 의해 일본 조동종 승려 다케다 한시(武田範之)를 원종의 고문으로 추대하였다.
다케다는 수행에 전념하는 수행승이 아니었고, 정치권과 결탁되어 조선불교를 일본 불교에 병합시키려는 야심을 가진 권력욕이 강한 승려였다. 그는 일진회 간부들을 설득하여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는데 찬성하도록 유도하였고, 이회광이 원종을 일본 조동종과 합병시키려고 했을 때 그는 원종 고문의 자격으로 알선에 나섰다.

1910년 10월 이회광은 원종종무원을 대표해서 전국 72개 사찰의 위임장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연합이 아닌 부속을 주장하였던 일본 조동종과 절충 끝에 동년 10월 6일 ‘연합맹약 7개조’를 성립시켰다. ‘연합맹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전체의 원종종무원은 조동종과 완전 또 영구히 연합맹약하여 불교를 확장할 것. 둘째, 조선원종종무원은 조동종무원에 고문을 위촉할 것. 셋째, 조동종무원은 조선원종종무원의 설립인가를 얻는 데 노력할 것. 넷째, 조선원종종무원은 조동종의 포교에 대하여 상당한 편리를 도모할 것. 다섯째, 조선원종종무원 조동종종무원에서 포교사 약간 명을 초빙하여 각 수사(首寺)에 배치하여 일반 포교 및 청년 승려의 교육을 촉탁(囑托)하고 또 조동종무원이 필요로 하여 포교사를 파견할 때는 조선원종종무원은 조동종무원이 지정하는 곳의 수사나 혹은 사원에 머물게 하여 일반 포교 및 청년 승려 교육에 종사케 할 것. 여섯째, 본 맹약은 쌍방의 의사가 일치하지 않으면 폐지·변경 혹은 개정할 수 있음. 일곱째, 본 맹약은 관할처의 승인을 얻는 날로부터 효력을 발생함.

‘연합맹약’의 내용은 원종과 조동종이 연합동맹하여 불교확장에 노력한다는 것이다. ‘연합맹약’에는 원종은 일본 조동종의 고문을 두도록 명시되어 있었지만 반면에 원종은 조동종 측에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아무런 통로가 없었다. ‘연합맹약’은 형식적으로는 연합이었지만 실질적인 내용면에 있어서는 일본 조동종에 원종을 예속시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원종의 종정인 이회광과 함께 맹약서에 날인한 조동종의 대표자는 우리나라의 종정격인 관장(官長) 이시가와 소도우(石川素童)가 아니고 총무였던 히로츠 셋상이었다. 교섭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일본 조동종은 원종과 대등한 연합이 아니고 원종을 조동종에 부속(附屬)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이 부분에서 이회광은 자신은 조선 사찰의 대표로부터 연합을 위임받았지 부속에 관한 위임은 없었다고 주장하여 일본 조동종과 연합을 성사시켰다.

한편 조동종은 원종이 총독부로부터 설립인가를 받는 데 알선의 노력을 한다고 약속하였으므로 와카오 구니에(若生國榮)를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총독부에 원종의 설립인가를 청원하였다. 그러나 이미 조선을 장악한 조선총독부에서는 조선불교를 일본 불교의 한 종파인 조동종에 넘겨 줄 생각이 없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불교를 직접 장악하여 통치에 활용하고자 하는 계획을 입안 중이었던 것이다.

<사진설명>조선불교 원종 종정인 이회광과 일본 불교 조동종 종무대표였던 히르츠 셋상 사이에 체결된 연합맹약 7개조.

원종은 조동종 포교사를 초빙하여 그들이 지정하는 곳의 수사(首寺)나 혹은 여타의 사원에 숙소를 제공하기로 하였다. 원종 측이 일본 포교사에게 머물 수 있는 사찰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었고, 조동종이 필요로 하는 사찰을 지정하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조동종이 조선에서 교세를 확장하는데 원종이 협력한다는 내용을 명문화 한 것이다.

원종과 일본 조동종의 연합을 알선하였던 다케다는 1910년 10월 일본으로 귀국하여 신병 치료를 위해 동경에 있는 양생원에 입원하였다. 그는 병석에서도 원종과 조동종을 연합시키려는 야심을 버리지 못하고 1911년 3월 20일자로 총독 테라우찌 마사다케(寺內正毅)에게 일본 조동종과 조선의 원종을 합병시키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조선의 승려들은 4년 전에 원종종무원이란 것을 만들었는데 1910년 9월에 13도 총회를 열어 결의한 결과 대표자를 동경에 보내어 조동종과 연합맹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조동종은 아직 조선의 사정을 잘 모르고, 조선 승려들은 세상 물정에 어두워 조동종의 종명을 아직 들어보지 못한 자가 많습니다. 그런 까닭에 조선 사람들에게 황화(皇化)를 일깨우는 것이 저의 임무로서 이러한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해 「원종육체론圓宗六諦論」을 저술하였으니 황화선양(皇化宣揚)에 보탬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회광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범해(梵海) 각안(覺岸)이 저술한 『동사열전東師列傳』의 맨 마지막 인물이 이회광이다. 각안에 의하면 그의 학문적 수준은 상당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회광이 스승의 법맥을 이어 독자적으로 설법을 시작하니 ‘황해도와 평안도 그리고 삼남지방의 학인들이 풀덤불을 헤치며 몰려들었으며, 그가 한번 묵고 지나가면 마치 봄에 사향노루가 산 속을 지나가매 풀이 저절로 향기롭듯 인품의 향기가 남았고, 한 번 사람과 대화하면 마치 밝은 달이 선정(禪定)에 든 듯 분명하였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그가 어떻게 해서 그런 경솔한 행동을 하게 되었을까.

그는 조선 불교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포교에 주력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또 많은 사람에게 포교를 하자면 발달된 일본의 포교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결국 조선 불교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일본 불교와 연합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일본에서 귀국한 이회광은 ‘연합맹약’의 승인을 얻기 위해서 관련된 사찰에 찬성 날인을 요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가 체결한 7개조의 ‘연합맹약’ 내용은 알리지 않고 일본 조동종과 대등하게 연합하였다는 사실만을 강조하였다. 그런 까닭에 일부 사찰에서는 동의를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매종책동은 1910년 12월 경 원종종무원 서기에 의해서 통도사에 전해짐으로써 불교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전라도의 백양사의 박한영(朴漢永)과 화엄사의 진진응(陳震應) 등과 북쪽에서는 한용운(韓龍雲)이 중심이 되어 이회광의 경솔한 행위를 규탄하였다.

이들은 이회광이 시도한 조선불교 원종과 일본 불교 조동종의 연합맹약 체결을 매종(賣宗) 행위로 규정하고, 조선불교의 정통성을 사수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경상도와 전라도에 있는 각 사찰에 통문을 돌려 1911년 1월 15일 송광사에서 승려대회를 열어 임제종(臨濟宗)을 탄생시킴으로써 북쪽의 원종과 남쪽의 임제종이 양립하는 형세가 되고 말았다. 당시 원종의 종정이었던 이회광은 당대 최고의 강백으로서 불교계의 존경을 받던 승려였지만 일본이 제국주의 세력이라는 본질을 간파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힘을 빌려서 자체 성장을 도모하겠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렇듯 무모한 그의 생각은 불교계를 양분시켰을 뿐만 아니라 조선불교계의 위상을 실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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