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⑪ 포르투갈의 침략, 법난의 시대

기자명 법보신문

무자비한 이교도 침입에
피로 얼룩진 랑카 150년
민초들 목숨걸고 법등 수호

<사진설명>붓다께서 재세시에 방문해 설법 하셨다는 켈라니야 라자 마하 위하라에는 밤늦은 시간까지 참배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어! 저거 교회 아니예요? 스리랑카에 저렇게 큰 교회가 있네요.”

한 낮의 뜨거운 태양이 고개를 푹 숙인 늦은 오후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Colombo)에 들어섰다. 한 나라의 수도답게 잘 정비된 도로와 10여 층 이상의 말끔한 현대식 건물들이 적지 않게 눈에 들어온다. 그 사이 소박한 시골길과 야트막한 농촌 가옥에 눈이 너무 익숙해진 탓인지 콜롬보의 현대적 이미지가 오히려 낯설게 느껴질 지경이다. 콜롬보는 현대식 건물들로 치장한 도시지만 곳곳에서 4~5층 높이의 유럽풍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여러 개의 기둥과 건물 전면의 테라스, 혹은 아치형의 출입문과 고딕 양식으로 치장된 건물들은 마치 유럽의 어느 도시에 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그렇게 정신없이 눈을 돌려가며 이국적인 도시의 풍경에 빠져들 순간 높다란 십자가를 이고 있는 교회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스리랑카에도 교회가 적지 않아요. 스리랑카는 불교국가로 알려져 있지만 태국처럼 불교를 국교로 정하고 있지는 않으니까요. 엄연하게 종교의 자유가 보장돼 있지요. 그러다보니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 다양한 종교가 활동하고 있어요. 특히 기독교는 유럽의 식민지 시대에 들어왔는데 주로 해안가 도시를 중심으로 전파돼 있어요.”

스리랑카에도 교회 즐비

<사진설명>늦은 밤에도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켈라니야 라자 마하 위하라.

안내인의 말처럼 스리랑카는 엄연히 종교의 자유가 보장돼 있는 나라다. 스리랑카를 불교 국가라고 생각하는 것은 외국인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 가운데 하나이다. 인구 통계를 봐도 스리랑카 국민의 70% 정도만이 불교 신자로 나타난다. 약 15%에 달하는 타밀족은 대부분 힌두교도이고 이슬람교도도 8% 가량이다. 나머지 7% 정도는 기독교도이다.

스리랑카의 기독교는 유럽 국가들의 스리랑카 식민지배 역사와 그 맥을 같이한다. 포르투갈, 네덜란드, 그리고 영국으로 이어지는 약 500여 년간의 식민지시대는 스리랑카 역사의 암흑기인 동시에 스리랑카 불교사에서는 법난의 시대라 칭해도 과하지 않을 만큼 고난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15세기 말까지 스리랑카를 침입해온 외세의 대부분은 타밀족이었다. 타밀족의 침입은 때론 왕조와 승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만큼 위협적이기도 했지만 유럽의 침입만큼 치명적인 것은 아니었다. 16세기에 접어들며 처음으로 랑카 섬에 발을 들인 유럽인들은 이전까지 싱할라 왕조의 골칫거리였던 타밀의 침략과는 그 성격부터가 달랐다.

15세기 말에 접어들면서 싱할라 왕조는 혼란과 기근에 신음하고 있었다. 수도 폴론나루와에는 가뭄이 잇달아 관계농수에 의존하던 농업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싱할라 왕조는 점차 황폐하게 변해가던 수도 폴론나루와를 떠나 남쪽으로 천도를 거듭했으며 16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랑카 섬 동남쪽 해안 인근 도시인 꼿떼(Kotte)로 수도를 옮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 통치력은 급속히 약화돼 섬의 내륙 지방으로는 이미 왕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았다. 왕이라고는 하지만 그 영향력은 지방의 토호에 불과했고 캔디(Kandy)와 자프나(Jaffna) 등 지방의 유력 도시에서는 지역의 영향력을 기반으로 하는 통치자들이 등장해 사실상 독립적인 통치를 행하고 있었다.

유럽인들이 랑카 섬을 침략해온 것은 이런 혼란의 시기였다. 1505년 랑카 섬에 처음 발을 디딘 유럽인들은 포르투갈의 군대였다. 꼿떼의 해안가에 도착한 포르투갈 인들은 대부분의 침략자들이 그렇듯 처음에는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들은 영향력이 줄어든 꼿떼의 왕에게 다른 지역의 통치자들과 대적할 수 있도록 군사적인 지원을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계피 무역을 하겠다던 포르투갈 인들은 항구도시였던 콜롬보의 해변가를 중심으로 요새를 세우기 시작하더니 점차로 무역 거점지를 늘려가면서 해안지역에 대한 사실상의 지배에 들어갔다. 하지만 포르투갈 인들은 해안지역에 만족하지 않고 수시로 내륙을 기습하며 영향력을 넓혀나갔다.

포르투갈 인들이 스리랑카에 대한 식민 지배를 시작했지만 꼿떼 지역의 싱할라 왕조는 이들에게 대항할 힘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포르투갈 인들은 침략자로서의 잔인함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스리랑카의 여러 역사서들은 식민지배 시기의 포르투갈 인들에 대해 ‘잔인하고 비인간적이며 탐욕스럽고 야만적인 불교의 박해자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싱할라 민족을 하나로 묶어주는 불교에 대한 포르투갈 인들의 박해는 참혹할 지경이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싱할라 민족의 구심점인 불교를 말살하기 위한 수단으로 가톨릭 전파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포르투갈 인들은 16세기 꼿떼의 왕이었던 부와네까바후 7세(Bhuvanekabahu Ⅶ)에게 군사 원조를 해주는 대신에 왕의 손자이자 후계자인 다르마팔라(Dharmapala)가 스리랑카 가톨릭 교단의 주교가 될 것을 요구했다. 왕은 이 요구를 받아들여 포르투갈의 황제가 개최한 주교 서품식에 특사단을 보냈고 이 특사단은 가톨릭 전도사들과 함께 스리랑카로 돌아왔다. 이로써 랑카 섬에 최초로 기독교가 발을 딛게 된 것이다.

기독교 앞세운 포르투갈의 침입

<사진설명>콜롬보, 캔디 등 스리랑카의 주요 도시 곳곳에는 유럽풍의 교회가 들어서 있다.

왕의 손자를 주교로 앉혀 가톨릭 교단을 설립한 포르투갈 인들은 불치사를 비롯해 모든 사찰의 수입을 가톨릭 선교 비용으로 징수하는 등 왕조를 꼭두각시 삼아 대대적인 개종 작업을 펼치기 시작했다. 포르투갈 전도사들은 처음에는 호의적으로 개종을 권유했지만 이에 응하지 않을 때에는 무자비한 탄압을 가했다.

기록에 따르면 공식적으로 예불을 하거나 법회를 집전한 스님은 가차 없이 죽였으며 심지어는 황색 가사를 입고 다닌 것이 처형의 이유가 되기도 했다. 개종을 거부한 사람들은 악어의 먹이로 강에 던져지기도 했으며 고문을 받다가 목숨을 잃는 이가 부지기수에 달했다고 한다. 사원은 물론이며 사원에서 세운 학교들 조차 대부분 파괴되거나 폐쇄됐으며 사원에 보관돼 있던 수많은 성보들이 약탈당했다. 순박하고 신심 깊은 수많은 랑카의 백성들이 처참하게 죽어가는 사이 권력을 탐하는 약삭빠른 귀족들 일부는 재빨리 개종을 하거나 자신의 이름을 아예 기독교식으로 바꾸며 힘 있는 이교도 지배자에게 아부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특히 왕위를 손에 넣기 위한 왕가의 권력 다툼은 스리랑카의 불교에 치명적인 독소가 되었다.

부와네까바후 7세의 아우였던 마야단네(Mayadanne)는 형이 왕이 되던 해 꼿떼의 동부인 시따와까(Sitavaka) 지역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의 아들인 라자싱하 1세는 포르투갈 인들에게 휘둘리고 있던 꼿떼의 왕과는 달리 침입자들에 대항해 싸우며 수차례 승리를 거둬 싱할라 민족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했다. 하지만 권력에 대한 탐욕이 지나쳤던 라자싱하는 아버지 마야단네를 살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는 폐륜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왕위에 오른 라자싱하는 자신이 저지른 죄악의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는 스님들을 불러 자신의 잘못을 용서받을 길을 구했다. 하지만 스님들은 한 마디로 왕의 부탁을 거절했다.

‘붓다의 발자국’이 ‘아담’의 것으로

<사진설명>‘성스러운 발자국’이라는 의미의 성산 스리파다는 포르투갈의 침략 후 ‘아담의 봉우리’라는 뜻의 아담스 피크로 ‘강제 개명’ 당하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왕께서 지은 업의 대가는 왕 스스로가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붓다께서 말씀하신 진리입니다. 또한 왕께서 저지르신 잘못은 용서 받기에는 너무나도 커다란 폐륜입니다.”

스님들의 이 같은 말에 왕은 격노했다. 불교가 자신의 죄업을 대신 갚아줄 수 없다는 말에 왕은 절망했고 절망이 큰 만큼 왕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었다. 분노에 휩싸인 왕은 승단의 장로를 돌로 쳐서 죽이고 수많은 스님들을 산채로 땅에 묻어 쟁기로 갈아 죽이는 끔찍한 학살을 자행했다. 또 수많은 사찰을 파괴하고 경전과 불서를 불태우는 등 왕의 분노로 인해 승단은 폐허로 변했다. 그나마 살아남은 스님들은 외국으로 도망치거나 아예 환속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왕의 탄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스리랑카 최고의 성지로 손꼽히는 스리파다(Sri Pada)의 관리권을 포르투갈의 가톨릭 전도사들에게 넘겨줘 버렸다.

스리파다는 붓다께서 재세시에 스리랑카를 방문하여 강림했다고 전해지는 성산이다. 정상에 남아있는 커다란 발자국이 바로 붓다의 것으로 싱할라 인들의 굳은 신심을 상징하는 동시에 스리랑카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첫 손에 꼽는 성지이다. 하지만 라자싱하는 이 스리파다의 관리권을 이교도에게 넘겨줬고 이때부터 ‘성스러운 발자국’이라는 의미의 스리파다는 ‘아담의 봉우리’라는 뜻의 아담스 피크(Adam’s Peak)로 불리게 됐다. 지금도 스리랑카 불자들은 이곳을 스리파다로 부르지만 이슬람교도나 기독교도들은 여전히 아담스 피크라는 이름을 고집하고 있다.

이슬람교도들과 기독교도들이 이 산을 아담스 피크라고 부르는 이유는 각자 이 산 정상에 있는 발자국을 자신들 종교의 성물로 삼으려하기 때문이다. 스리파다의 관리권을 장악한 포르투갈 인들은 이 발자국이 가톨릭의 성자인 성 토마스(St. Thomas)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이슬람교도들은 이것이 에덴의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이 지상에 내려올 때 남긴 발자국이라고 주장했으며 힌두교도들은 전쟁의 신인 시바가 스리랑카를 보호하기 위해 왔을 때 남긴 발자국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싱할라 인들은 붓다께서 재세시에 스리랑카를 세 번 방문 하셨고 이 발자국이 그때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처음 두 번은 성도 전인 6년간의 수행 시절이었고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되신 후 또다시 스리랑카를 방문하셨다고 한다. 이때 붓다는 콜롬보 인근인 켈라니아(Kelaniya)에서 목욕 후 설법을 하셨으며 그후 스리파다로 가 발자국을 남기셨다고 한다. 부처님이 설법하신 곳에는 켈라니아 라자 마하 위하라(Kelaniya Raja Maha Vihara)가 세워졌고 이곳의 대탑에는 붓다께서 설법하실 때 앉으셨던 의자가 봉안돼 있다고 한다.

포르투갈의 침략은 150여 년간이나 계속되다가 1658에 이르러서야 종식된다.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는 스리랑카 역사를 피로 물들인 학살의 시기였고 승단의 단절을 불러올 만큼 처참한 법난의 시기였다. 이처럼 가혹한 탄압 속에서도 법등이 꺼지지 않았음이 오히려 경이로울 따름이다.

붓다께서 직접 방문하셔서 법문을 하셨다는 켈라니야 라자 마하 위하라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방이 어두워진 후였다. 하지만 사원은 참배객들을 위해 환하게 불을 밝혀놓았고 늦은 저녁 사원을 찾은 평범한 불자들은 불 밝힌 작은 기름등과 꽃을 불단에 공양하는 것으로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하고 있다. 외세의 침략과 이교도들의 박해 속에서 랑카의 법등을 지켜낸 힘은 저들 같이 평범하고 이름 없는 불자들이었다. 저들이 불단에 올리는 저 작은 기름등은 붓다에게 소박한 등불을 공양했던 가난한 여인 난다의 등불처럼 오래도록 꺼지지 않고 사원의 밤을 밝힐 것이다. 그 등불의 빛을 따라 랑카의 법등도 끊임없이 이어지길 기원해 본다.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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