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⑫ 랑카 불교의 구심점 ‘불치사리’

기자명 법보신문

“불치를 받든 이만이 진정한 랑카의 지도자”

<사진설명>호수와 숲, 붉은 지붕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는 스리랑카 제2 도시 캔디의 전경.

롬보와 폴론나루와의 중간, 랑카 섬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 캔디(Kandy)는 이름만큼이나 아름답고 정겨운 곳이다. ‘가장 스리랑카다운 도시’라는 캔디에 들어선다는 것만으로도 순례객의 가슴은 설레기 시작했다. 스리랑카로 출발하기 전 서울에서 스리랑카에 대한 자료를 뒤적거리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이름이 바로 캔디였다. 스리랑카의 수도는 콜롬보이지만 캔디는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도시의 순위에서 콜롬보를 멀찍이 따돌리고 있다. 캔디는 2000여년 이상 이어져왔던 싱할라 왕조가 영국에 무릎을 꿇고 막을 내린 슬픈 역사의 도시이다. 동시에 마지막까지 제국의 침략에 대항하고 최후의 순간까지 불교국가로서의 자긍심을 지켜낸 자랑스러운 역사의 도시이기도 하다. 스리랑카의 전통과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에 ‘가장 스리랑카다운 도시’라는 찬탄이 결코 과하지 않은 캔디는 곳곳에 만발한 형형색색의 꽃과 푸른 호수가 빛나는 화사한 표정으로 순례객을 맞이했다.

온화한 캔디의 첫 인상

해발 600미터, 마하웰리(Mahaweli) 강이 도시 전체를 감싸 흐르고 사방이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자리 잡고 있는 캔디는 인구 60만이 거주하는 스리랑카 제2의 도시다. 스리랑카의 여타 지역과는 달리 고원에 위치한 도시답게 시원하고 쾌적한 공기의 목 넘김이 상쾌하다. 스리랑카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온화한 성품, 그 원천은 바로 이곳 캔디의 온화하고 상쾌한 공기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캔디를 불교 성지이자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명소 만든 것은 이곳에 붓다의 ‘치아사리(佛齒)’가 봉안돼 있기 때문이다.

불치가 이곳 캔디에 봉안된 것은 싱할라 왕조가 포르투갈의 침략과 내분으로 인해 허약할 대로 허약해져 있던 시기였다. 16세기 포르투갈의 침략으로 꼿떼(Kotte)의 왕조가 유명무실한 왕권을 이어가는 사이 캔디에서는 보다 강한 지도력을 행사하는 또 하나의 싱할라 왕조가 형성되고 있었다.

영욕의 역사 공존하는 도시

<사진설명>4세기 인도 칼링가 국의 공주가 불치를 노리는 침략자들을 피해 스리랑카로 불치를 이운하고 있는 모습을 담은 사원의 벽화. 머리카락 속에 숨겨둔 불치에서는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고 한다.

전대미문의 불교 박해자였던 라자싱하 1세의 뒤를 이어 캔디 왕조의 왕이 된 위말라 다르마수리야 1세(Vimala Dharma Suriya I. 1591~1604)는 포르투갈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네덜란드와의 접촉을 시도하는 등 왕권 회복에 많은 노력을 쏟아 부었다. 그의 노력은 특히 라자싱하 1세에 의해 피폐해진 불교의 재건에 모아졌다. 다르마수리야 왕은 숨겨두었던 치아사리를 캔디에 봉안하기 위해 성대한 사원을 세우는 등 정법을 다시 세우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라자싱하 1세의 불교 박해로 당시 스리랑카에는 비구계를 수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스님이 단 1명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승가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5명 이상의 스님이 필요하다는 상좌부불교계에서 이는 사실상 더 이상의 전법이 불가능한, 법맥의 단절을 의미했다. 다르마수리야 왕은 법맥을 다시 잇기 위해 미얀마와 씨암(지금의 태국) 등으로 특사를 파견해 계맥의 전승을 요청했다. 당시 미얀마에서는 여러 스님들을 스리랑카로 파견해 구족계 수계식을 봉행했다. 이때에 많은 왕족들이 출가해 스리랑카 승단을 부활 시켰다.

불치가 캔디에 봉안된 것은 이같이 싱할라 왕조가 허약해진 국력을 재정비하고 스리랑카의 불교와 전통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아픈 역사의 시대였다. 그런 만큼 불치의 캔디 봉안은 정법을 수호하는 싱할리 민족의 자부심을 고양시키는 동시에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구심점의 등장이었다. 또한 불치를 모신 싱할라의 왕만이 진정한 랑카 섬의 지배자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한 상징적 사건이기도 하다.

이러한 불치는 어떻게 랑카 섬에 전해졌을까. 불치가 4세기경 인도로부터 전해졌다는 기록은 여러 문헌에서 일치하지만 그 이유와 과정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중 전래 과정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기록을 중국의 삼장법사 법현 스님이 저술한 『불국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붓다의 열반 후 인도의 각국으로 분배된 사리 중 불치는 약 800여년 가량 인도 남부의 칼링가 왕조가 봉안하고 있었다. 그런데 칼링가 왕조에 봉안돼 있는 불치를 친견한 왕들이 인도의 전통 종교인 바라문교를 버리고 잇따라 불교로 개종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자 불치가 영험하다는 소문이 인도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불치를 빼앗으려는 이웃 국가들의 침략과 개종에 반발하는 바라문교 세력의 반란으로 인해 칼링가국은 하루도 평안할 날이 없었다. 약 4세기경 스리랑카를 통치하고 있던 마하세나 왕도 불치에 관한 소문을 듣고는 갖고 있던 보물 전부를 칼링가 왕에게 바치며 불치를 전해주길 간청했다. 그러나 이때 칼링가 국은 또다시 이웃 나라의 침략을 받고 있었다. 칼링가 왕은 이번 전쟁에서 전세가 불리함을 깨닫고 이웃 나라로 시집가있던 공주 헤마말라와 그의 남편 단타구말라 부부를 급히 불러들였다. 왕은 공주 부부에게 “불치를 스리랑카의 마하세나 왕에게 전하여 여법히 모실 수 있도록하라”는 유훈을 남기고 죽음을 각오하며 전장으로 떠났다.

머리카락 속에 숨겨 랑카로

헤마말라 공주는 남편과 함께 불치를 받들고는 스리랑카로 떠났다. 공주는 불치를 들키지 않고 인도 땅을 떠나기 위해 자신의 틀어 올린 머리카락 속에 불치를 숨겨서는 밤을 틈타 성을 빠져나왔다. 공주 부부는 간신히 배를 구해 스리랑카로 떠났지만 중도에 그만 풍랑을 만나 인도 남쪽에 표류했고 온갖 고난을 겪으며 천신만고 끝에 스리랑카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마하세나 왕은 죽고 그 아들인 시리메가완나(Sirimeghavanna. 301~328) 왕이 즉위한 후였다. 시리메가완나는 부왕의 대원이 성취된 것을 크게 기뻐하며 곧바로 불치를 모실 사원을 궁전 옆에 조성하고는 왕 스스로 불치를 안치하며 성대한 공양을 올렸다고 한다. 이후 불치는 싱할라 왕조가 수도를 옮길 때 마다 함께 옮겨져 봉안됐으며 “불치가 있는 곳에 곧 왕이 있다”는 왕권의 상징이 되었다.

불치를 모신 자가 랑카의 지배자라는 민중의 인식은 캔디 왕조가 1815년 영국에 의해 막을 내린 이후에도 뚜렷이 나타났다. 영국의 통치가 시작됐지만 민중들은 영국을 지배자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항쟁이 끊이지 않았다. 영국은 1818년 불치를 손에 넣은 후에야 랑카의 새로운 지배자로서 사실상의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교도 침략 대항의 상징

<사진설명>불치가 봉안돼 있는 캔디의 불치사 입구는 언제나 순례객들로 붐빈다.

랑카 섬을 침략한 포르투갈 인들은 불치에 대한 싱할라 사람들의 이 같은 믿음을 와해시키기 위해 불치를 인도의 고아 지방으로 가져가 부수려고 했다. 하지만 승단은 불치를 델가무(Delgamu)의 사원에 은밀히 숨겨두고는 가짜 불치를 포르투갈 인들에게 넘겨줘 위기를 모면했다. 이 이야기는 스리랑카 사람들에게 지금까지도 전설처럼 전해지는 영웅담이다.
 
다르마수리야 왕은 바로 이때 숨겨두었던 불치를 다시 캔디로 모셔와 봉안한 것이다. 그러니 불치의 캔디 봉안은 이교도이 침략과 불교 탄압에 더 이상 굴하지 않을 것이며 스리랑카에는 여전히 법등이 밝게 빛나고 있음을 상징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캔디의 한 복판으로 푸른 하늘과 눈부신 햇살을 담아 들이고 있는 캔디의 상징 캔디호수는 1812년 스리 위크라마 라자싱하(Sri Wickrama Rajasinha) 왕에 의해 만들어졌다. 호수에는 캔디의 상징인 흰색 자라를 비롯해 갖가지 물고기가 살고 있다고 한다. 물론 낚시꾼은 한 사람도 볼 수 없다. 엄격히 금지돼 있기 때문이다. 주변으로는 잘 정비된 가로수와 산책로 등이 조성돼 있어 낭만적인 도시 캔디에 여유로움까지 더해주고 있다.

캔디는 콜롬보만큼 현대적이거나 세련된 도시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폴론나루와나 아누라다푸라처럼 역사 속에서 튀어나온 듯 고색창연함에 물들어 있는 곳도 아니다. 캔디는 따듯함과 푸근함 속에 뭉근히 녹아있는 역사를 생동감 있게 호흡하고 있는 도시다. 세간의 복잡함에서 한발 물러서 캔디호가 뿜어내는 신선한 공기를 멋들어진 옛 찻잔에 담아 한 모금 마시면서 휴식을 취하기에 딱 좋은 곳이랄까.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녹푸른 산들이 붉은 색 지붕의 건물들과 조화를 이루며 순례객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있는 캔디에 순식간에 매료당해 버렸다.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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