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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윳따니까야』 ⑨

기자명 법보신문

부끄러움·창피함 아는 게 가장 큰 가르침

무명이란 과연 무엇인가? 무명은 초기 경전에서는 무지, 몽매, 은폐, 번뇌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이에 비해 대승경전에서는 무명은 고요한 바다에 홀연히 바람을 일으켜 파도치는 윤회의 바다와 삼라만상을 전개시키는 근본원인처럼 묘사된다.

무명에 대한 초기경전의 일반적인 정의는 ‘괴로움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발생에 대해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알지 못한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고 …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실을 알지 … 못하는 것이고 … 이렇게 해서 목숨이 다하고 우주가 다하도록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경전에서는 무명을 어리석고 캄캄하여 밝음이 없는 치암무명대명(癡闇無明大冥)이라고 한다. 무명에 빠진 무지한 자는 영원한 어둠속에 있는 것이다. 무지한 자가 구제될 수 있는 방도는 없는 것이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빛을 만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무명에 이끌리고 갈애에 휩싸여 유전윤회하면서 생노병사를 거듭하며 살고 있다. 부처님은 『쌍윳따니까야』의 「무명의 경」에서 “수행승들이여, 무명이 앞서가면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에 도달하며 그것과 더불어 부끄러움도 모르게 되고 창피스러움도 모르게 된다.

수행승들이여, 무명을 따르는 무지한 자에게는 잘못된 견해가 생겨난다. 잘못된 견해를 지닌 자에게는 잘못된 사유가 생겨난다. 잘못된 사유를 지닌 자에게는 잘못된 언어가 생겨난다. 잘못된 언어를 지닌 자에게는 잘못된 행위가 생겨난다. 잘못된 행위를 지닌 자에게는 잘못된 생활이 생겨난다. 잘못된 생활을 지닌 자에게는 잘못된 정진이 생겨난다. 잘못된 정진을 지닌 자에게는 잘못된 새김이 생겨난다. 잘못된 새김을 지닌 자에게는 잘못된 집중이 생겨난다.”라고 했다. 무명에 이끌린 생노병사의 세계는 부끄러움도 모르게 되고 창피스러움도 모르는 팔사도(八邪道)의 세계이다.

그러나 다행히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나 괴로움이 무엇인가를 인식하면서 캄캄한 어둠 속에서 홀연히 기적처럼 생겨난 그 인식의 빛을 알아채게 된다. 그 한 줄기 빛의 바람이 홀연히 불어오면 영원할 것 같은 어둠의 바다에 태양이 여명을 드리운다. 부처님은 그 태양을 명지라고 불렀다. “수행승들이여, 명지가 앞서가면 착하고 건전한 상태에 도달하며 그것과 더불어 부끄러움을 알게 되고 창피스러움을 알게 된다. 수행승들이여, 명지를 따르는 지혜로운 자에게는 올바른 견해가 생겨난다. 올바른 견해를 지닌 자에게는 올바른 사유가 생겨난다. 올바른 사유를 지닌 자에게는 올바른 언어가 생겨난다. 올바른 언어를 지닌 자에게는 올바른 행위가 생겨난다. 올바른 행위를 지닌 자에게는 올바른 생활이 생겨난다. 올바른 생활을 지닌 자에게는 올바른 정진이 생겨난다. 올바른 정진을 지닌 자에게는 올바른 새김이 생겨난다. 올바른 새김을 지닌 자에게는 올바른 집중이 생겨난다.” 명지에 이끌린 해탈의 세계는 부끄러움을 알고 창피스러움을 아는 팔정도(八正道)의 세계이다.

명지의 태양이 떠오르는 여명의 세계는 부끄러움을 알고 창피스러움을 아는 세계이고 무명의 어둠이 다가오는 황혼의 세계는 부끄러움을 모르고 창피함을 모르는 세계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부끄러움을 알고 창피스러움을 아는 것을 세계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이라고 말했다.

부끄러움을 모르고 창피함을 모르면, 팔사도의 세계가 전개된다. 거기에는 계행도 명상도 지혜도 없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알고 창피스러움을 알면 팔정도의 세계가 전개된다. 거기에는 계행과 명상과 지혜가 수반된다. 계행은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이고, 명상은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고 지혜는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를 의미한다.

윤회를 벗어나서 해탈하여 깨달음을 이룬다는 것은 거창한 노력을 기울여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알고 창피스러움을 아는 것을 선구로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움을 알고 창피스러움을 아는 것은 팔정도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가르침 가운데 가장 심오한 것이다.

전재성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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